기내식의 진실은 무엇인가. 정숙하게 앉아 피둥피둥 살찐다. 자다 깨다 꾸역꾸역 입에 쑤셔넣는 밥. 대외비로 부쳐져 늘 원가가 궁금해지는 단출한 끼니. “비프 오어 치킨?”(소고기야 닭고기야 빨리 골라)으로 요약되는 선택지, 그래서 때로 얌전히 사육당하는 기분까지. 지금과 같은 형태의 기내식을 처음 선보인 건 1936년 미국 유나이티드항공. 그 관록의 여객기에서도 지난해 여름 승객 난동이 벌어졌다. 기내식이 마음에 안 든다고.

변신이 본격화되고 있다. 관광업계가 활기를 되찾으며 하늘길이 분주해지자, 항공사마다 여행의 ‘묘미(妙味)’로 승부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는 것. 미쉐린이 인증한 맛집과 협업하고, 유명 셰프와 메뉴를 공동 개발하고, 이를 적극 홍보한다. 몸에 꽉 끼는 좌석, 장거리 비행의 고단함을 입으로 달랜다. 이제 기내식 메뉴판으로 항공사를 고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지상의 맛집, 여객기에 탑승

포동포동 타이어처럼 살찌울 기내식의 변신이 시작되고 있다. /미쉐린 가이드

‘기내식 맛집’이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맛집을 기내에 태우는 것이다. 제주항공은 가성비 맛집을 뜻하는 ‘미쉐린 빕구르망’에 선정된 강남 갈빗집 삼원가든과 손잡고 지난해 12월 갈비찜·떡갈비 기내식을 내놨다. 탑승 전 사전 주문하는 형태의 부가 서비스. 제주항공 관계자는 “K푸드 열풍에 따른 한식 메뉴를 고민한 결과”라며 “올해 기내식 판매 매출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라고 했다. 에어부산은 부산 명물 닭갈비집 유가솜씨와 협업해 닭갈비 제품을 기내식으로 내놨다. 지역 로컬 맛집을 앞세워 맛과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한 것이다.

제주항공×삼원가든=갈비찜과 떡갈비, 에어서울×정호영 셰프=김치비빔우동, 이스타항공×빕스=떠먹는 페퍼로니 피자(위부터). /제주항공·에어서울·CJ푸드빌

저비용항공사(LCC)에서 이 같은 움직임은 두드러진다. 기내식은 티켓 판매 외 상당 매출을 가져다주는 수익원이기 때문이다. 기존 기내식에서 볼 수 없던 요리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다. 에어서울은 일식 전문 정호영 셰프와 협업해 국내 업계 최초로 ‘우동’ 기내식을 선보이고 있다.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 일본 다카마쓰 지역을 오가는 취항지 특성을 살렸다. 진에어는 열무비빔국수·김치비빔국수를 내놨고, 이스타항공은 패밀리레스토랑 빕스와 손잡고 전용 피자까지 출시했다. 가족 단위 여행객을 타깃으로 후속 주류 판매까지 노린 것이다.

◇공항 안 가도… 동네에서 기내식

실제 비행기 의자 등을 비치해 여객기 내부처럼 꾸민 서울 중곡동 카페 ‘라운G’에서 한 남성이 기내식을 맛보고 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상공(가상)이, 앞을 보면 야외 테라스(현실)가 펼쳐진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비행기를 타려면 적잖은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해외 순방 다니듯 누구나 전용기를 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생겨난 게 이른바 ‘항공 카페’다. 서울 중곡동에 있는 기내 콘셉트 카페 ‘라운G’로 가보자. 인천공항공사가 운영을 지원하는 곳. 수속 없이 곧장 비즈니스석에 앉을 수 있다. 실제 항공기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아 키오스크로 주문한 기내식을 먹는다. 기내식은 두 종류. 함박스테이크 정식, 김치볶음밥. 접시 모양까지 실제 기내식 스타일이다. 8900원. 네끼를 챙겨 먹어도 4만원을 넘지 않는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면 활주로~도심~상공으로 이어지는 풍경 변화가 영상으로 펼쳐진다. 박꽃별(45) 대표는 “비행기 타려면 큰맘 먹어야 하는데 누구나 쉽게 기분 낼 수 있는 장소로 꾸미고 싶었다”며 “기저귀 찬 어린아이와 함께 오는 젊은 엄마들이나 혼자서 좌석에 앉아 일하는 회사원들도 있다”고 말했다. 여행 가기 힘든 사람들. 단골 탑승객 양인자(62)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셀카를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데 다들 ‘제주도 다녀 왔냐’고 묻는다”며 씩 웃었다.

힙지로에 걸맞는 독특한 항공 카페 '보잉' 내부. 실내 곳곳을 공항이나 비행기처럼 꾸며놨다. 기내식과 주류를 맛볼 수 있다. /보잉

서울 을지로3가에는 최근 카페 ‘보잉’이 들어섰다. 747기(機)를 떠올리게 하는 상호,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간판이 공항에서 보이는 비행기 탑승 시간 안내판이다. 실내는 역시 기내처럼 꾸며놨는데, 이곳 의자는 이코노미석이다. 앉아서 멜론과 하몽을 곁들인 기내식, 커피·와인·하이볼 등을 음미한다. “딱 외국 가는 느낌”이라는 방문평처럼, 환상을 위해 카페 곳곳에 산소마스크와 구명조끼까지 갖춰놨다. 심지어 화장실마저 비행기 화장실. 다만 이곳의 예절은 자리에 1시간 이상 앉지 않는 것. 웨이팅 때문이다.

◇라면 없이는 못 살아

비행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간식, 역시 라면이었다(위). 한 때 진에어에서 자체 제작해 판매했던 컵라면 '진에어 컵면'과 일본항공(JAL)과 닛신식품이 합작한 컵라면(아래 왼쪽부터). /농심·진에어·닛신

비행기는 위험한 곳이다. 하늘에 떠 있으니까. 안전 및 관리상의 이유로 뜨거운 국물 요리는 웬만해선 기피된다. 그러나 라면은 예외다. 한국인의 솔푸드 아니던가. 기내에서는 물을 팔팔 끓이기 어려워 약간 미지근한데도, 배우 한소희처럼 “기내식은 라면만 먹는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제주항공이 지난 1월 발표한 지난해 기내 편의점 판매 1위 품목은 라면(20.7%)이었다. 2위 캔맥주(14.3%)를 훨씬 앞서는 수치다.

보통은 컵라면이고, 비즈니스석 이용객에게는 그릇에 옮겨 담아 준다. 이를테면 대한항공의 경우 컵라면 내용물에 북어나 콩나물 등을 넣어 더 푸짐하게 해주는 것이다. 일등석은 봉지 라면을 끓여준다. 라면은 전염성이 강한 음식. 냄새가 퍼져 연쇄적으로 주문이 밀려든다고 한다. 기내식 라면이 더 맛있는 이유? 승무원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 비결은 ‘핫컵’. 라면 끓이는 냄비, 일종의 전기 포트다. 단시간에 물이 끓어 면이 빨리 익고 쫄깃하다고.

◇상공에서는 맛이 다르다?

밥맛이 없어 화가 날 수도 있다. 허나 누굴 탓하랴. 비행 고도(高度) 때문인 것을. /MBC

제아무리 미식가여도 기내에서는 혓바닥이 둔해진다. 기압과 습도가 낮아 신체 능력이 저하되기 때문. 짠맛과 단맛을 느끼는 미뢰의 민감도가 30% 가까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간을 세게 하거나 조미료를 팍팍 치는 이유다. 제한적인 조리 여건도 고려해야 한다. 일단 ‘불’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달 티웨이항공과 기내식 공동 개발 업무 협약을 맺은 CJ제일제당 측은 “죽 같은 경우 보통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물이 많이 생기는데 이를 보완한 제품을 개발하는 식으로 기내 환경에 최적화된 조리와 취식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다만 감칠맛만큼은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 토마토 주스가 유독 기내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다. 고무적인 토마토 주스 수요에 놀란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는 자체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을 정도다. 괴짜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그노벨상’ 수상자인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찰스 스펜스는 ‘기내 소음’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뇌는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감칠맛을 세게 감지하는데, 비행기는 엔진 등의 소음이 클 수밖에 없고, 토마토에는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천상의 밥, 지상의 쓰레기

하늘에서 먹는 밥, 그러나 잔반은 땅에다 버려야 한다. 매년 발생하는 기내 폐기물만 600만t이 넘는 것으로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추산한다. 이 중 30% 정도가 음식물이다. 항공사가 늘어나면서 쓰레기는 지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자 지난해부터 일본항공·델타항공 등 일부 외항사는 좌석 예약 시 기내식을 거절할 수 있는 ‘노 생큐’ 옵션을 도입하고 있다. 착한 금식. 환경 보호를 위한 ‘윤리적 선택’이라지만, 별도의 요금 차감은 없다는 점에서 비용 절감을 위한 상술로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