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오르면 한 마리 사자가 된다. 소리꾼 이자람(45)은 야수처럼 으르렁대면서 관객의 멱살을 잡았다 놨다를 반복한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무언가가 올라올 때가 있어요. 흥 같은 건데 한마디로 말하기 힘들어요. 스스로도 ‘내 소리가 미쳤다’ 그런 느낌이거든요? 이런 감각이 찾아오면 ‘나 진짜 소리 하기를 좋아하는구나’ ‘정말 잘하는구나’ 싶어요. 저는 진짜 소리꾼이에요.”
이자람은 다섯 살 때 아빠가 만든 곡 ‘내이름(예솔아)’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열 살 때 우연치 않게 명창 은희진을 만나 판소리와 마주했다. 이후 35년 동안 전통 판소리를 탐구하면서 여기에 지금의 것을 입히는 이른바 ‘작창(作唱)’을 하며 자주 무대에 올랐다. 옛것과 멀어지려던 관객을 공연장으로 이끈 것이다. 이자람은 국악계에 없던 ‘신기한 현상’ 그 자체였다. “롤모델이 없었어요. 누구도 소리꾼으로서의 삶을 제시해주지 않았죠. 그러나 저는 누군가에게 구체적인 롤모델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괴로울지언정 제가 지금 하는 일을 계속 잘하는 게 소리꾼들에게 그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소리에 얼마나 자신이 넘치는지는 2022년 펴낸 에세이 ‘오늘도 자람’에 써 있다. 판소리가 대중에 섞이지 못하는 걸 속상해하면서 “이 해내기 만만치 않은 공연의 빈 좌석을 볼 때면 아까운 마음이 든다. 나 되게 잘하는데. 이런 공연이 그리 흔치는 않을 텐데. 좀 오지. 와서 한 번이라도 보지”라고 꾹꾹 눌러 담은 책이다. 최근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에 이어 3시간 30분짜리 적벽가 완창을 무대에 올린 이자람을 만났다. “책에 쓴 말은 진심이었어요. 앞으로 제가 소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앞으로 10년? 쌩쌩할 때 꼭 와서 제 소리를 들어야 후회가 없을 겁니다.”
◇운명처럼 만난 소리
어릴 적부터 유명해져 삶이 평탄했으리라 예상한다면 틀렸다. 스무 살에 춘향가 8시간 완창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직후 어머니 같던 스승의 예기치 않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1년간 입을 떼지 못했다. 창작 판소리로 세계가 그녀를 주목할 때는 환희 뒤 스멀스멀 두려움이 몰려왔다. 9년을 함께해온 팀을 해체하면서 3년간 무대에 서지 않았다. “트라우마, 배신, 이별…. 제 인생에도 굴곡이 있었죠.” 그 혼돈 속에서 ‘아마도이자람밴드’에선 인디음악 보컬로도 활동하고 기타도 쳤다. 연극 무대에도 서보고 예술 감독, 극작가로도 변신했다. 이 분야 저 분야를 넘나들었지만 노래 밖에서 살진 못했다. “저는 참 운이 좋아요. 아니, 꼭 그것만은 아니네요. 열심히 노력했고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아직도 예솔이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빠가 음악을 하니까 집에 작업하는 방이 있었어요. 위에 언니 둘은 말귀를 알아듣는 나이라 출입을 안 했고요. 저는 기어다닐 때라 문을 안 열어주면 울고불고 하니까 그 방에 오가면서 노래를 배웠나 봐요. 옹알이를 ‘엄마’ ‘아빠’가 아니고 노래로 했을 정도니까요. 아빠도 ‘얘 봐라. 노래 좀 하네’ 해서 데뷔하게 된 거죠.”
-판소리는요?
“비슷하죠. 열 살 때였는데요. 무슨 생각이 있었겠어요? TV 프로그램 때문에 판소리를 배워야 했어요. 제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은희진 선생님이 입을 열겠다고 에너지를 엄청 썼어요. 그때 사람한테 반한 것 같아요.”
-아리송한 말이네요.
“소리꾼은 관객을 집중시키는 일을 하다 보니 어떤 매력이 있어요. 그걸 선생님을 통해 본 거 같아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열리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다 소리를 1년간 쉬었다고요.
“선생님이 암 판정을 받았죠. 저에게 ‘판소리는 곧 은희진’이었어요. 선생님이 없으니 제가 소리 할 이유도 사라졌어요. 길을 잃은 느낌이었죠. 연습만 할라치면 눈물이 났어요.”
-스승의 영향이 컸군요.
“은 선생님은 제가 집중해서 소리를 하면 ‘놀란 토끼 같다’며 좋아하셨죠. 그러면서 ‘소리 암만 잘해도 소용없다.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어요. 또 ‘발음 똑똑하게 해라’ ‘태가 안 예쁘면 소용없다’ ‘움직임이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고도요. ‘춘향이는 울고 있는데 네 몸은 울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가르쳤죠. 그 말들을 지금도 되뇌곤 합니다. 1년을 넋 놓고 있다가 오정숙 선생님이 불러서 다시 입을 열었죠.”
◇대중의 무관심, 되돌리고 싶었다
남과 다른 길을 걸었다. 판소리로 돈은 못 벌 테고 하고 싶은 거나 실컷 해보자 생각했다. 대학 시절 팀 ‘타루’를 만들어 당시엔 생소한 국악 뮤지컬을 무대에 올렸다. 그게 작창의 시작이었다. “대학 졸업 후 국립창극단 같은 곳에 가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주어진 프로그램에 맞춰 살고 싶진 않았지요. 제 손으로 무언가를 일구고 싶었습니다. 제 유효기간을 늘리고 싶어서요.”
-작창을 시작한 계기는요?
“‘왜 판소리는 안 멋있지’란 물음이 늘 제 안에 있었어요. 대중이 따라 부르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니까요. 이유를 생각해봤어요. 미장센도 별로, 의상도 매번 똑같지, 조명도 하나, 관객도 없고. 이걸 깨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을 한 계기라면.
“대학 시절 노래패(서울대 동아리 ‘메아리’) 일원으로 주 5일을 살았어요. 국악과 학생으로는 고작 주 0.5일 살았나. 그러면서 공연을 많이 했죠. 제작부터 뒤풀이까지 발로 다 뛰었죠.”
-그래서요?
“판소리는 무대 자체가 없었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맞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어렵지’가 결론이었어요. 대중가요는 ‘이거 딱 내 이야기인데’ 하잖아요. 그렇다면 판소리도 내 얘기로 써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구지가가 탄생한 배경이군요.
“스물다섯쯤이었어요. 인터넷이 상용화될 때였는데 ‘언니네’라는 사이트에서 수많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고백을 접했어요. 사회적 부조리를 담아 구지가를 만들었어요. 혼자 말고 노래패처럼 하면 어떨까 해서 ‘타루’를 결성한 거고요. 각 대학에서 소리 하는, 일면식도 없는 애들한테 전화해서 ‘나 노래하는 이자람인데 같이 할래?’ 한 거죠.”
-첫 공연 반응은 어땠나요?
“판소리 뮤지컬이라는 이름으로 젊은 애들이 공연을 올리니 엄청난 사랑을 받았죠. 상도 휩쓸고요.”
-그게 우리나라 첫 창작 판소리라고 봐도 될까요?
“창작 판소리가 우리 역사 안에 있어요. 박동진의 예수전 같은 거요. 하지만 창작이라는 건 지금 이 시대에 가까운 느낌일 때 그 단어가 살아 숨쉰다고 생각해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창작 판소리가 살아 숨쉰 건 제가 만든 ‘사천가’가 분기점 같아요.”
◇세계는 열광했지만 나는 외로웠다
2007년 사천가, 2011년 억척가를 무대에 올렸다. 최고의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이야기를 따와 판소리화한 작품이다. 원작을 수십 번 정독하고 한국적 상황을 얹어 썼다. 이때부터 이자람은 더 빛을 발했다. 브레히트와 판소리의 만남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2시간 40분짜리 억척가 공연에서 홀로 15역을 하며 사람의 몸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내자 세계가 열광했다. 저명한 극장의 초청으로 미국, 프랑스, 호주 등을 누볐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죽는다고 저 친한 나의 연출이, 나의 무대감독이, 나의 악사가 날 도울 순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사무치게 외로웠어요.”
-사천가는 어쩌다 쓰게 됐나요?
“팀 ‘타루’ 활동을 5년 정도 하고 정리했어요. 엄청 뜨겁게 사랑하다 이별했으니 아팠죠. 이후 ‘뭘 먹고 살아야 하나’ ‘나는 쓰레기인가’ ‘돈도 못 버는 백수 대학원생일 뿐이네’ 하면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다 운명처럼 만났어요.”
-이자람도 그런 시간이 있었군요.
“그럼요. 그때 정동극장에서 ‘800만원 줄 테니 마음대로 공연해보라’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다른 팀을 꾸려 무대에 올린 게 사천가예요.”
-히트를 쳤죠?
“첫날 관객 점유율이 90%를 넘었고 나머지 날은 전부 매진이었어요. 브레히트 작품을 판소리로 만들었다고? 모든 언론이 집중했죠. 대성공을 거뒀어요.”
-기뻤나요?
“저는 성취한 것에 크게 기뻐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오히려 겁을 내는 타입이에요. ‘왜 이렇게 잘되지?’ 하면서요.”
-2010년 초연한 뮤지컬 ‘서편제’의 주인공 송화로 이자람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은데.
“제 마니아층을 확 열어 준 작품이에요. 12년을 했어요. 배우 (차)지연이랑 의지하면서 했죠. 그런데 그렇게 반응이 뜨거웠나요?”
-그걸 몰랐어요?
“서편제를 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혹평을 받은 것 같아요. ‘살다 보면’을 못 부른다고요. 제 목소리가 탁성이니까 고음에서 갈라지잖아요. 관객이 악플을 달았어요. 너무 괴로웠죠. 마지막 공연 때야 즐길 수 있었어요.”
-억척가도 해외에서 폭발적이었는데.
“30대 초반이었어요. 성공 가도에 있었죠. 루마니아 무대에 올랐는데 숨이 안 쉬어지고 심장이 조이는 경험을 했어요.”
-너무 열심히 살아서였을까요?
“갑자기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모르겠는 거죠. 사천가, 억척가 모두 3시간가량의 대서사시였어요. 저한테 너무 컸어요. 관객이 기립할 수밖에 없도록 엄청난 힘을 썼죠. 부담감을 벗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압박이 처음 왔어요. 두려웠죠.”
-그래서요?
“소박해지고 싶었어요. 덜어내고 싶었죠.”
◇내 판소리, 역사로 남을 것
그래서 2016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단편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을 판소리로 각색한 ‘이방인의 노래’를 썼다. “무겁고 어렵고 한 서린 거 말고 소소하면서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 무대를 끝으로 이자람은 사라졌다. “사천가부터 9년을 함께한 팀과 헤어질 때가 됐더라고요. 연애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의 느낌이 오듯이 그냥 그렇게 헤어졌어요.” 3년 후인 2019년 이자람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을 직접 각색·작창한 ‘노인과 바다’와 함께 돌아왔다. 티켓 오픈 3분 만에 전회 전석 매진.
-잠시 내려놨군요.
“아주 무대를 떠난 건 아니었어요. 창극을 했죠. 예술 감독으로, 한 명의 스태프로.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 보니 좋았어요.”
-’노인과 바다’로 복귀했어요. 지금도 이자람의 첫 연관 검색어더군요.
“그렇다면 제가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노인과 바다‘는 지금 제 몸에 딱 붙어 있는 시그니처 작품이죠. 많은 영광을 가져다 준 사천가도 아니고, 세계를 기립시킨 억척가도 아니고요.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뜻이잖아요. 지금에 서 있는 거잖아요. 너무 고마운 얘기예요. ‘노인과 바다‘는 죽을 때까지 정신만, 마음만 탁해지지 않으면 궤도에 올라서 부를 겁니다.”
-전통 판소리처럼 다 남을까요?
“노인과 바다는 역사에 남을 거예요. 다른 악기나 무대장치 없이 몸 하나로만 한 전통 판소리 같은 작품이에요. 지금은 저작권 때문에 아무나 못 부르지만.”
-전수할 건가요?
“죽기 전에 해결하고 가야죠. 전수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퍼블릭 오픈을 해야죠.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판소리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가 있는데.
“하하. 부끄럽습니다. 솔직히 대중화를 위해 한 게 아니라 그냥 저를 위해 작창한 거예요. 1979년생 이자람이 무엇을 마주 보고 있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를 판소리로 만든 것뿐이에요. 그게 잘 구동돼 관객이 따라왔고요. 선봉은 언젠가 뒤처져야 하는 거잖아요. 그 말은 무서워요.”
-완창을 고집하는 이유라면.
“전통 판소리를 완창하면서 다음 창작을 생각해요. 창작은 전통을 정말 잘해야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그 많은 가사를 어떻게 다 외우나요?
“완창했다고 해서 지금 제 속에 전부 있지는 않아요. 최근에 연습하고 노력하는 작품이 선명한 거죠. 가사는 지금도 무서워요.”
-무대에서 틀리기도 한다는 말인가요?
“그럼요. 심지어 ‘다음이 뭐더라’ 이런 말도 했는걸요. 준비는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이에요.”
◇오래오래 소리꾼으로 남고 싶다
이자람은 공연을 하면서도 능글맞은 아니리로 ‘나는 이 힘든 판소리를 왜 계속할까” 넋두리한다. “소리꾼으로 오래오래 남고 싶어서요.” 판소리는 온몸을 쥐어짜는 일이다. 홀로 몇 시간을 울고 웃으며 관객의 숨을 이끌어야 한다. 몸 깊숙한 어딘가에서 소리를 길어올려 뱉어낸다. 복음을 내다 뇌압이 높아지고 탈장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자람의 청력이 안 좋은 것도 그래서다. 공연을 끝낼 때마다 앓는다. 혼신을 다했다는 뜻이니 그걸로 됐다고 위안을 삼는다.
-’예솔아’ 때부터 40년간 노래를 했네요.
“열심히 산 거 같아요. 남의 삶이 어떤지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없어요. 그저 생에서 누군가와 만나 술 마시는 시간, 차 마시는 시간 같은 걸 안 했어요. 제 삶에 유흥은 없어요. 그 시간에 연습을 했죠.”
-인디밴드 보컬, 예술 감독, 소리꾼, 그 많은 것 중 하나만 꼽는다면.
“흠,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 진짜 미쳤네’란 감각이 오는 건 무대 위 소리꾼 이자람일 때예요.”
-앞으로의 계획은.
“당장은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거예요. 앞으로 10년, 무대에서 잘하려면요.”
-10년이라니, 50년은 해야죠.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느낌이 그래요. 어릴 땐 선생님들이 왜 자주 무대에 서지 않는지 이해를 못했거든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하루 연습은 얼마나 하나요?
“예전엔 6시간도 했는데 지금은 길어야 2시간. 힘들어요. 대신 체력을 위해 많은 시간을 쏟죠. 결국 다 체력 싸움이거든요.”
-이 힘든 걸 왜 계속합니까.
“판소리는 1고수, 2명창, 3청중이란 말이 있잖아요. 진짜예요. 지금은 아파도 관객을 믿고 가죠. 대한민국 그 어떤 소리꾼보다 무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솔리스트로요. 한 달에 한 번 완창을 하고 있는 셈이에요. 이런 인생이 역사에 있었나 찾아봤더니 거의 없더라고요. 토막 소리는 해도요. 저는 이미 많은 소리를 무대에서 했어요. 이젠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하려고요.”
-이자람에게 소리란 뭘까요?
“(오랜 침묵) 그렇네, 애인 같은 거네. 아직 완전히 내가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대상. 여전히 밀당을 하고 있는 거죠. 로맨틱하지 않나요?”
이자람은 아직도 판소리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주 무대에 서는 동력이 뭐냐고 묻자 “아마도 연습의 힘인 것 같다”고 했다. “35년을 배웠는데요. 아직도 제 멱살을 잡고 놔주지 않는 엄청난 매력이 있어요. 매번 소리가 달라요. 그 매력을 관객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 말은 한 번이라도 제발 제 공연에 오시라는 거예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