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칼럼 쓰고 방송에 출연하던 젊은 시절 종종 듣던 질문이 있었다. “언제 출사(出仕)하십니까?” 여기서 ‘출사’란 고위 관직에 오른다는 왕조시대 용어다. 결국 출사란 출세를 돌려 말한 표현이다. 평생 학교에만 있던 책상물림 철학 선생에겐 턱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풍토가 흥미로웠다.
출세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어감은 유독 뜨겁다. 인재라면 출세해야 하고 그 종착점은 ‘벼슬’하는 데 있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이다. 한국에서 모든 길은 정치로 통한다. 자기 영역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은 명망가들조차 최종 목표로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꿈꾼다. 권력 사슬의 정점엔 대통령이 있다. 민주화한 지 수십 년이 됐건만 대통령은 ‘선출된 왕’으로 여겨진다.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이유다.
정치에 뜻을 두는 행위 자체는 중요한 일이다. 유능한 인사들이 나랏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치도 맞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돈·권력·명예가 정치권력과 고위 관직에 지나치게 몰려 있다. 출세를 향한 인정 욕구가 권력, 돈, 명예를 고리로 사람들을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인다. 정치뿐 아니라 상아탑이라는 대학에서도 ‘자리’를 둘러싼 권력 게임이 치열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출세 지향적이다.
출세해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건 우리네 본능이다.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땐 삶 전체가 흔들린다. 좋은 의미의 인정 욕구는 인격과 자존감의 바탕이다. 그러나 출세를 성공과 기계적으로 동일시하면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사회에선 모두가 허덕일 수밖에 없다. 권력과 돈을 사회적 인정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곳에선 사람들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패배자가 양산된다. ‘선진국 한국’에서 한국인의 행복감이 바닥을 치는 이유다.
돈과 권력에 초연해 보이는 성자들조차 인정 욕구에선 벗어나지 못한다. 선사의 입적(入寂)엔 ‘앉아서 죽는’ 경지를 넘어 ‘서서 죽는’ 사례도 있다. 인도를 순례한 수행자는 한 ‘깨달은 자(구루·guru)’가 다른 깨달은 자를 질투하는 현실에 놀랐다. 철학자들도 상대방 철학자를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다. 작가들은 내심 서로를 깔본다는 ‘문인상경(文人相輕)’이라는 옛말도 있다. 인정 욕구를 아예 없애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에 집중된 돈·권력·명예의 연결 고리를 자르는 게 급선무다. 정치 중독증보다 허망하고 해로운 건 없다. 정치인이 부정한 돈을 탐하거나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넘보는 건 사회적 금기로 만들어야 한다. 명예에 자족하는 지식인과 전문가들이 존중받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자신이 하는 일을 자긍하는 이가 많을수록 좋은 세상이다. ‘높은 자리’에 따라붙는 특권과 의전을 덜어내는 그만큼 한국 사회는 나아진다.
권력, 돈, 명예를 각자 영역에 머물게 하는 제도를 갖춘 후엔 우리네 ‘마음의 습관’이 중요하다. 출세나 성공을 측정하는 사회적 잣대를 최대한 넓혀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왔다. 돈·권력·명예에 더해 건강·재능·열정·우정 등도 모두 고귀한 가치다. 이 다종다양한 가치 중 하나만 얻을 수 있어도 ‘좋은 삶’이다.
출세와 성공은 궁극적으로 다른 삶의 지평을 가리킨다. 출세는 바깥에서 오고 진정한 성공은 내 안에서 나온다. 마음의 근육은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데서부터 길러진다. 생업에 힘쓰면서 흘리는 땀은 깊은 자기 충족감을 준다.
신비한 정신 수련을 통해서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거대한 망상이다. 참된 깨달음은 저잣거리 생활 속에서 탄생한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든 항산(恒産)과 동행한 항심(恒心)에 가까이 간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평범한 이들이 한 땀 한 땀 직조(織造)해 나가는 삶이야말로 비범한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