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외국에 나오면 무슨 수가 생기겠니. 예술이 또한 무어 대단한 거겠니. 나도 모를 일이다. 그저 가슴에 무슨 원한 같은 게 맺혀 있을 뿐이다. 뭐니 뭐니 해도, 끼니를 거르고 죽을 먹더라도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 화가 김환기가 뉴욕에 있을 때, 고국의 딸에게 보낸 편지다. 그가 한국 미술로 승부를 걸어 보겠다고 파리와 뉴욕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는 노모와 어린 세 딸이 있었다. 자책의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외국에서 성공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이 세대 예술가들. 우리 역사와 문화가 무시받고 짓밟힌 시대를 경험한 세대. 이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고 싶다는 열망은, 나 그리고 나라의 자존심 문제였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짊어진 소명을 안고, 전쟁 후 수많은 화가가 파리로 몰려갔다. 성공을 거둔 이는 많지 않았다. 심지어 김환기조차도. 파리를 떠나며 김환기가 “자네는 파리에서 뼈를 묻게”라고 당부한 화가가 있었다. 남관(1911~1990)이다. 파리에서 14년을 체류하며, 결국 성공해 돌아온 화가. 그러나 실로 파란만장했던 화가.

◇호류지 금당벽화의 감동

화실에서 작업 중인 생전의 남관. /현대화랑

남관은 1911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청송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고보(현 경북고)로 진학하려 했으나 1920년대 학생 동맹휴학 사건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중학에 입학했다. 학교 성적은 좋았으나 사람들과 어울려 하는 대부분의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반 고흐의 화집을 보고 감명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광기에 가까운 고흐의 예술적 도취는 남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녔고, 일본인 교수 화실에서 사숙하며 인정받는 화가로 성장했다.

일본 체류기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호류지(法隆寺) 금당벽화였다.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고 알려진 벽화 말이다. 현재 그 학설은 의문시되고 있고, 벽화 원본도 1949년 화재로 거의 사라졌지만, 남관이 금당벽화를 봤을 때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고구려인이 건너가 그렸다는, 1000년 넘는 세월의 생생한 흔적은 남관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겼다. 그림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지닌다는 것, 훌륭한 회화는 표피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일종의 ‘정신성’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깊이 품었다.

◇파리 생활의 명암

1955년작 '파리 야경'. /개인소장

2차 대전의 참화를 목격하고 해방 후 귀국한 남관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1947년 개인전을 열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 흑석동에 개인 화실을 마련해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또 전쟁. 남관은 피란지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김환기와도 2인전을 열 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1952년, 도쿄에서 프랑스 ‘살롱 드 메’ 도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작정 도쿄로 갔다. 프랑스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충격을 받고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다. 그 꿈은 1954년 말 실행에 옮겨졌다.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혼자 떠난 파리행. 계획대로라면 한국에 있을 때 연 도불기념전 수익이 파리로 송금돼야 했으나, 돈이 오지 않았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아시아재단으로부터 받기로 한 장학금도 오지 않았다. 남관은 몽파르나스 뒤 허름한 반지하 방에 숙소 겸 화실을 얻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 접시 닦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 판이었으나, 그러기엔 차마 체면이 서질 않았다고. “굶기를 연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그림을 팔아가며 빵과 감자로만 연명하던 시절, 1956년 파리에 온 김환기가 그를 보고는 말문이 막혔다. 침대까지 물이 찬 축축한 방에서 추위에 떨며 그림을 그리던 남관. 그런 그를 보면서도 “파리에 뼈를 묻으라”고 했던 김환기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김환기는 파리에서 성공해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관은 버텼다. 1958년 ‘살롱 드 메’ 초청을 시작으로 점차 프랑스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1952년 도쿄에서 본 그 ‘살롱 드 메’에 어떻게든 입성한 것은 ‘집념의 사나이’에게 주어진 정당한 보상이었다. 자크 뷔스(Jacques Busse)라는 ‘살롱 드 메’ 위원이 남관을 높이 평가했다. 남관은 ‘살롱 드 메’에 거의 매년 초청되더니, 1960년대 런던·함부르크 등 유럽 유수의 화랑에서 초대전을 갖게 됐다. 급기야 1966년 남프랑스 멍통에서 열린 국제 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언론도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고, 이를 기념한 남관 개인전이 한국에서 열렸다. 그는 1968년 짐을 싸 귀국하며 신문기자에게 말했다. “나는 할 일을 하고 돌아왔다.”

◇동서양을 융합한 大家

1966년 멍통 비엔날레 대상작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멍통 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은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이다. 놀랍게도 이 역사적 작품이 고(故)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으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와 있다. 처음 남관은 파리에서 자신의 처참한 생활을 반영하듯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어두운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점차 태양을 받은 환한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작품이 탄생했다. 고적(古跡)은 오랜 세월 어둠에 파묻혀 있던 어떤 거대하고 고귀한 존재를 의미한다. 가치 있지만 가려져 있던 것, 그것이 빛을 받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남관은 감춰진 의미, 다시 말해 비의(秘義)를 내비치는 게 예술의 힘이자 역할이라 생각했다. 예술은 정신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내포한다. 말하자면 ‘신비한’ 영역이다. 호류지 금당벽화가 전하는 감동과 같은 것이다.

이 생각이 프랑스인의 눈에는 더욱 신비하게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이들은 남관의 작품이 현대 문명에 동참하면서도 한국 전통문화의 정신적 뿌리로 돌아가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서양의 도구와 형식을 취하지만, 동양의 정신과 신비를 담은 작품이라는 것.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베르나르 도리발은 남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동·서양 문화의 어느 일부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둘을 융합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大)예술가다.”

◇불우했던 삶

1984년작 '가을 축제'. 남관이 말년에 그린 환상적인 작품. 문자처럼 보이는 여러 형상이 보석의 색을 뿜어낸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으로 전시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그러나 그에게 삶은 참으로 적응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평생 구설이 많았고 싸움도 잦았고 사기도 여러 번 당했다. 가정사도 평탄치 않았다. 파리에 갈 때 남겨진 아내와는 이혼했고, 1960년 파리에서 시인 김광섭의 딸인 소설가 김진옥과 재혼했다. 미시간대학 출신의 재원이었고, 그 역시 독특한 인물이었다. 김진옥이 쓴 영문 소설 ‘우주의 중심’을 보면, 지극히 이성적인 여자와 극도로 감성적인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로의 우주를 넘나들지 못하고 결국 평행선으로 남게 되는 과정.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상대의 우주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자기 부부의 이야기일 것이다.

1968년 귀국 후 남관은 한국 실정에 더욱 적응하지 못했다. 적응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이 됐는데, 심사 도중 퇴장해 버렸다. 그러고는 국전 심사가 ‘담합에 의한 돌려 먹기’라고 폭로했다. 이듬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초라한 모습으로 개관했는데, 개관 사유가 “국전을 잡음 없이 개최하기 위해서”였다. 남관이 심사를 집어 던진 여파가 그래도 국내 첫 국립미술관의 탄생을 가져오긴 했다.

어쨌든 남관은 타협할 줄 몰랐다. 이응로와 ‘문자 추상’ 논쟁을 벌였고, 김흥수와도 신문에서 설전을 벌였다. 김환기를 제외하고는 안 싸운 화가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지독한 에고이스트였고, 외톨이였다. 1984년 영국 테이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자는 꾐에 넘어가 작품을 보냈다가 일부를 되찾지 못했다. 모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려고 가져갔던 작품은 통째 도둑을 맞았다. “인생의 문제에 비하면 예술은 너무나 조그마한 것이었다. 예술은 인생의 역경, 그것을 이기기 위한 무아(無我)의 발버둥이었다”고 그는 말년에 고백했다.

1972년 작 '겨울 풍경'. 어둡고 혼란스러운 땅 위에 내린 흰 눈이 빛난다. /개인소장

남관은 잔혹한 고비를 겪으면서도 악착같이 생을 이어가는 인간상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비참한 인간상에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다고도 했다. 실은 남관 자신이 그런 인간이었다. 어둠과 고독에 파묻혀 있던 인간. 그러나 영원히 빛나는 것을 향해 나아갔던 예술가. 한때 남관과 격렬히 싸웠던 김흥수도 인정했다. 1990년 남관이 죽자 추도사에서 김흥수는 이렇게 밝혔다. “속세의 일일랑 잊으소서. 멀리 떨어져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일 형의 미소를 그리며, 나는 당신이 승리자일 것으로 확신합니다. 세상에서는 외로웠지만, 이제 한 가지를 위해 일생을 바친 형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 것 같습니다.”

남관이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환기, 환기”였다. 남관을 가장 잘 이해했던 유일한 친구. 김환기를 찾아 남관도 그렇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