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이모나 고모도 찾아오기 어려울 지경이다. 요즘 아파트 이름은 더 복잡해졌다. 과거엔 “영어 모르는 시어머니가 오지 못하게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짓는다”고 했는데, 이제는 10대 학생도 외우지 못할 만큼 길다. 뜻을 알려면 외국어 4~5개는 해야 한다. 서울시가 시민 1000명에게 물었더니 77.3%가 “지금 아파트 이름이 길고 복잡해서 불편하다”고 답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아파트 단지명은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빛가람 대방엘리움 로얄카운티 2차’와 ‘초롱꽃마을6단지 GTX운정역 금강펜테리움 센트럴파크’로 25자에 달한다. ‘동탄시범 다은마을 월드메르디앙 반도 유보라’도 19자. 서영춘과 임희춘이 부르던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까지가 18자이다.

◇함부로 부르지 못할 이름

전국 아파트 이름의 평균 자수는 지난 20여 년간 2배 넘게 늘어났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평균 4.2자였던 아파트 이름이 작년엔 9.86자를 기록했다. 다 외우기도 어렵고, 다 부를 수도 없다. 급할 땐 주소 부르다 숨이 넘어갈 지경. 경기도가 경기 북부 분도 명칭을 ‘평화누리특별자치도’로 정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현재 25자인 단지명이 ‘평화누리특별자치도 파주시 동패동 초롱꽃마을 6단지 GTX 운정역 금강 펜테리움 센트럴파크’로 길어지면 40자, 여기에 동·호수까지 붙으면 50자가 넘는다는 조롱까지 나온다. 다행히 새벽 배송은 받을 수 있다. 쿠팡 주소록은 255자까지 입력 가능하기 때문에.

점점 길어지는 아파트 이름에 서울시는 지난 2월 어려운 외국어 사용 자제하기, 펫네임 자제하기, 적정 글자 수 지키기 등을 담은 ‘새로 쓰는 공동 주택 이름 길라잡이’를 내놓았다. 하지만 지켜지진 않는다. 지난달 분양한 ‘양주 옥정 디에트르 프레스티지’(15자)·고덕국제신도시 서한이다음 그레이튼(16자), 7월 분양 예정인 마포자이힐스테이트 라첼스·울산 진하 한양립스 그랑블루(12자) 등 올해 분양 단지들도 대부분 10자를 넘는다. 결국, 줄여 부른다. ‘대방엘리움 2차’나 ‘대방 2차’, ‘초롱꽃 6단지’ ‘다은마을 유보라’ 같은 식으로.

그래픽=송윤혜

◇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까지

길이만 문제인 건 아니다. 단지별 특성을 나타내는 펫네임(별칭)은 영어뿐 아니라 라틴어, 스페인어, 독일어까지 빌린다. 뜻을 알기가 어렵다.

최근 경기도 김포시 재개발 사업지인 ‘북변4구역’ 조합원들은 ‘북변4구역 한양수자인’이란 가칭을 두고 “아예 수자인이라는 한글 브랜드를 빼라”고 반발했다. 시공사는 지난 4월 “단지명을 다시 짓겠다”고 공문까지 보내 조합원을 달랬다. 결국 ‘곁에 두다’는 의미의 라틴어 오브(ob)와 ‘중심’이라는 영어 센트럴(central)을 합성한 펫네임 ‘오브센트’를 넣었다.

삼성물산은 올해 첫 수주 경쟁지로 꼽히는 서울 용산구 남영2구역 재개발 사업지에 ‘래미안 수페루스’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수페루스는 ‘천상’이라는 뜻의 라틴어. 서초구 방배동에 분양할 ‘래미안원페를라’에는 영어 ‘원(One)’과 ‘진주’를 뜻하는 스페인어 ‘페를라(Perla)’가 더해졌다. 현대건설은 올해 하반기 분양하는 ‘디에이치대치에델루이’에 ‘고귀하다’라는 뜻의 독일어 ‘에델(edel)’과 ‘빛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루이(luire)’를 합성한 단어를 만들었다.

◇호재 담아 개명도

작명소는 없다. 재건축·재개발 같은 도시정비사업에서는 사업을 따내야 하는 시공사들이 특화 브랜드나 특이한 단지명을 제안해 조합의 선택을 받는다. 시공사가 여러 곳이면 디에이치(현대건설)· 아이파크(HDC현대산업개발)나 SK뷰(SK건설)·푸르지오(대우건설)처럼 브랜드를 함께 적고, 시공사가 많으면 조합에서 단지명을 정하기도 한다.

개명(改名)도 한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e편한세상 용인역 플랫폼시티’는 올해 단지명을 ‘e편한세상 구성역 플랫폼시티’로 변경했다. 지난달 말 개통한 ‘구성역’이 지역의 호재로 작용하는 만큼 이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유리한’ 행정구역명만 내세우거나 아예 ‘다른’ 행정구역명을 따오기도 한다. 효창동 아파트들은 ‘용산’을 내세우고, 신정동과 신월동 아파트들이 ‘목동’을 붙이는 식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은지구 아파트들은 모두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디지털미디어시티(DMC)를 단지명에 채택했다. 서울 동작구 재개발 사업지인 흑석11구역은 초고가 아파트가 몰려 있는 서초구 반포 지역명을 따와 ‘서반포 써밋 더힐’로 정했다. 권일 부동산인포 팀장은 “지역이나 단지 특성을 드러내는 걸 넘어 사실과 다른 명칭까지 넣는 등 아파트 이름을 둘러싼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추세”라며 “주소 표기 등의 불편함이나 행정구역 불일치 같은 문제는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이 구역의 미친X'에서 집값 상승을 위한 '아파트 네이밍 변경 안건' 회의가 열리는 장면.

◇기능 대신 집값

브랜드는 명품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인지도가 더 높은 브랜드로 단지명을 바꾸면 주변 아파트보다 집 값이 7.8% 오르는 효과가 있다(한국부동산분석학회)는 분석도 있고, 작년 10대 건설사의 브랜드 아파트 청약 경쟁률(18.29대1)은 기타 브랜드 아파트(5.79대1)의 3배(부동산인포)에 달하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명은 결국 자산 증식을 위해 더 길어지고 어려워지는 셈이다.

공공임대주택도 이름을 바꾼다. 임대주택 브랜드에 사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휴거(휴먼시아 거지)나 엘사(LH에 사는 사람) 같은 멸칭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SH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공공임대주택에 ‘방화동 스카이포레’를, LH는 경남 창원 공공 분양 주택에 ‘포엘른’ 브랜드를 적용할 예정이라고.

아파트는 ‘자산’이기도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을 명확히 해주는 ‘주소’이기도 하다. 집값 상승에 대한 ‘욕망’을 담는 대신 주소라는 ‘기능’은 잃은 이름들이 속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