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의 한 마트 주류 코너에 진열된 RTD 하이볼 제품들. /김지호 기자

하이볼을 몹시 좋아하는 여의도 직장인 A씨. 그는 모든 증류주에 탄산수를 부어 마셔본다. 30년 고숙성 스카치부터 고급 버번까지 가릴 것 없다. 맛없는 술도 음용 가능할 때까지 비율을 조절해서 어떻게든 마시는 편이다. 이쯤 되면 하이볼 중독이다. 주변에서 비싼 술 그렇게 낭비할 거면 마시지 말라고 질타하기도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그런 그에게 ‘RTD 하이볼’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과제였다. 하지만 그가 맛본 제품은 대부분 처참하게 싱크대로 흘려보내야 했다. 너무 달거나, 맛을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위적인 풍미 때문이었다.

RTD란 ‘Ready to Drink’의 약자. 즉석으로 마실 수 있는 사전 혼합 음료를 말한다. RTD 하이볼은 위스키, 보드카, 럼 같은 증류주에 탄산수나 주스 등을 섞어 캔에 넣은 알코올 음료인 셈이다. 평균 알코올 도수는 4~9%. 얼음만 있으면 번거로운 제조 과정 없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마실 수 있는 게 최고 장점이다. 물론 몰트 바에서 바텐더가 직접 제조한 하이볼 맛에 비할 바는 아니다.

최근 편의점 ‘골든 존’에 수많은 RTD 하이볼이 자리하고 있다. 하이볼 시장이 커지면서 여러 주류 업체가 RTD 하이볼 제품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에서 유통되는 제품에는 대부분 실제 위스키가 아닌 유사 위스키가 들어간다는 점이다.

양주의 탈을 쓴 ‘캡틴큐’를 들어봤을 것이다. 1980년대 출시 이후 수많은 사람의 일상과 소중한 기억을 앗아간 유사 위스키의 대명사다. 주정에 감미료, 당분, 합성 향료 등을 혼합해 만든 제품이 캡틴큐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RTD 하이볼 제품 대부분은 캡틴큐와 제조법이 일맥상통한다. 캔 뒷면 성분표에서 주원료가 위스키가 아닌 주정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주정은 쌀, 보리, 사탕수수 등을 연속식 증류기로 증류한 것이다. 알코올 도수는 보통 85도 이상. 원료 본연의 맛은 찾기 어려운 무색투명한 에탄올 상태다. 주정에 감미료를 넣어 맛을 내면 소주가 된다. RTD 하이볼에서 주정은 위스키 풍미를 내는 인위적 혼합물인 셈이다.

위스키 원액은 대부분 외국산이다. 국내 주세법상 ‘진짜 위스키’를 넣는 순간 하이볼 한 캔 값은 만원이 훌쩍 넘는 구조다. 위스키의 수입가를 만원이라고 치자. 여기에 주세 72%, 교육세 30%, 부가가치세 10%가 붙으면 최소 판매 원가는 2만원이 넘는다. ‘4캔 만원’에 익숙한 소비자들에게 값비싼 증류주를 넣는 순간 단가 맞추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주세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전통 하이볼에 대한 소비자들의 갈증을 해소하기 어려워 보인다.

국내에서 제품명에 하이볼이라는 단어를 쓰는 조건이나 법령은 없다. 저가형 주정을 사용한 유사 하이볼 제품이 양산되는 이유다. 무작정 하이볼이라는 단어를 앞세우기 전에 칵테일이라고 밝히는 게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최근 일본에서는 산토리 100주년을 기념해 하쿠슈 원액이 들어간 RTD 하이볼을 600엔에 팔고 있다. 실제 하쿠슈로 하이볼을 만들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맛있다. 하이볼에서 하이볼 맛이 안 났을 때, 그 당혹스러움과 배신감은 오롯이 소비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