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5일,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임정) 요인 30여 명은 중국 장제스 정부가 보내준 군용기 편으로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임정은 미 군정과 환국 조건을 합의하지 못해 한동안 발이 묶였다. 11월 19일, 결국 김구 주석은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편지를 썼다.
“나와 충칭에 주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것과 관련해 공인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입국하여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서약서’를 대신한 이 편지를 받은 후에야 중국 주둔 미군은 임정에 수송기를 제공했다. 수송기가 협소하다는 이유에서 환국은 1, 2진으로 나눠 진행되었다. 11월 23일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1진 15명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아무런 환영 행사도 없이 미군이 제공한 승용차에 탑승해 ‘금광 재벌’ 최창학의 저택 죽첨장으로 이동했다. 임정에 헌납된 죽첨장은 이후 ‘경교장’이라 불렸다.
12월 1일 조소앙, 김원봉, 신익희 등 20여 명의 환국 2진을 태우고 상하이를 출발한 수송기는 폭설 탓에 김포비행장에 착륙할 수 없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찾아 남쪽으로 비행하다가 군산 옥구비행장에 착륙했다. 고령의 임정 요인들은 엄동설한에 미군 트럭을 타고 이동하다가 이튿날 대전 유성비행장에서 군용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1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임정 개선 환영대회’에는 동아일보가 “15만의 군중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도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정파를 초월해 전 민중이 27년 만에 귀국한 김구 주석과 임정 요인을 뜨겁게 환영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물론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인공)’ 어느 쪽도 ‘망명정부’로서 임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 군정 후원하에 정부 수립을 목표로 결성된 독촉은 임정의 ‘합류’를 요청했고, 인공은 임정에 ‘대등한 조건’으로 통합을 제안했다. 두 제안 모두, 임정 주도로 ‘과도 정권’을 구성하고, ‘국민 대표 대회’를 소집해 ‘정식 정권’을 수립하려 한 임정의 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임정 봉대(奉戴)’를 명분으로 조직된 한국민주당(한민당)과는 정치 자금 제공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는 임정 환국에 앞서 ‘환국 지사 후원회(후원회)’를 조직하고 임정에 전달할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임정이 귀국하자 송진우는 1차로 900만원을 전달했다. 하지만 김구는 후원회에 ‘친일 실업인’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이유에서 그 자금을 반려하려 했다. 임정과 후원회 연석회의에서 송진우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임정 요인 양반들, 정부가 받아들이는 세금 속에는 애국자 양민의 돈도 들어 있고, 장사꾼이나 죄인의 돈도 섞여 있는 법이오. 지금은 임정이 정부 행세를 못 하니까, 세금을 거둘 형편도 못 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뜻있는 몇몇 분이 자진해서 성금을 갹출했는데 그걸 가지고 부정이다 뭐다 가릴 여지가 어디 있단 말이오!” 결국 임정은 그 자금을 받기로 했다.
환영 대회를 앞두고 한민당과 임정 요인들이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 양측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비난했다. 장덕수가 “그렇다면 해공(신익희),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항의하자, 신익희는 “어디 설산(장덕수)뿐인가!”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매사에 신중했던 송진우도 그날만큼은 모욕을 참지 않았다. “여보 해공!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 거요? 소위 인공 작자들이 했을 것 같아? 당신들이 중국에서 궁할 때 무엇을 해 먹고 살았는지 여기서 모르는 줄 알아?”
환국 후 한 달 가까이 정국에서 소외되었던 임정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계기로 정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가 알려진 12월 28일부터 정당과 사회 단체의 반탁 성명이 줄을 이었다. 29일, 군정청 한국인 직원 3000여 명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 장군의 요리사까지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하지 장군이 관사에서 식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31일, 서울 시내 경찰서 10곳 중 8곳의 경찰서장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방문해 “앞으로 모든 경찰관은 김구 주석의 지시를 따라 치안 확보의 중임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정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國字 제1호’), “일반 국민은 금후 임정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함”(‘국자 제2호’)이라는 포고문을 공포했다. 사실상 임정이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는 임정이 반탁을 빙자해 미 군정을 접수하고, 미군을 축출하려는 ‘쿠데타’를 획책한 것이라 격분했다. 미 군정은 임정 요인 전원을 체포해 인천 ‘일본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튿날인 1월 1일 오후 2시, 하지와 김구가 반도호텔 미군사령부에서 만났다.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나를 배반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김구는 “집무실 카펫 위에서 당장 자살하겠다”고 맞섰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회담은 “반탁 운동을 계속하되 질서 파괴 행위는 자제한다”는 데 합의하고 끝났다. 그날 밤 8시,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이 라디오 마이크 앞에서 김구의 대국민 선언문을 대독했다.
“나는 질서 정연한 시위 운동에 대하여 십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나는 이것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 있고 결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 우리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서 본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파업을 중지하고 일제히 복업(復業)하기를 바란다.”
김구에 충성을 맹세한 경찰서장 8명은 ‘명령 불복종’을 사유로 1월 4일 전원 파면되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신익희가 CIC(미군방첩대)에 체포돼 이틀 동안 신문을 받고 풀려난 것 외에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임정 요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 만에 ‘진압’된 임정의 무모한 정권 인수 시도는 김구와 임정에 대한 미 군정의 신뢰를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이후 김구와 임정은 해방 정국에서 의미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참고 문헌>
김상구, ‘김구 청문회 2′, 매직하우스, 2014
서중석,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정용욱, ‘편지로 읽는 해방과 점령’, 민음사, 2021
조병옥, ‘나의 회고록’, 민교사, 1959
최선우·박진,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연구’, 경찰학논총 제5-1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