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관광주민증’을 아시는지? 인구 소멸 지역에 속하는 소도시를 여행할 때 일부 관광지나 카페, 식당, 숙박업소, 체험장 등에서 디지털관광주민증을 발급받아 제시할 경우 지역 주민처럼 할인 혜택을 준다. 일종의 ‘명예 주민증’이다. 슬슬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는 시기, 평창과 함께 디지털관광주민증 추진 우수 기관으로 꼽히는 충북 옥천군을 여행했다. 디지털관광주민증을 들고.
◇11만여 명 발급한 ‘옥천군 관광주민증’
증명사진? 도장? 필요 없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여행지 방문 전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대한민국 구석구석’ 앱에 들어가 디지털 관광주민증 ‘발급받기’를 클릭한다. 실명과 전화번호 인증 후 안내에 따라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해 발급받으면 된다. 발급 지역엔 제한이 없으며 참여 지역 전체를 발급받아도 무방하다. 여행할 지역의 참여 업체별 ‘혜택 보기’ 를 확인 후 여행 코스를 짜면 된다.
한국관광공사 지역균형관광팀에 따르면 이미 188만명(7월 2일 기준)이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받았다. 발급자가 늘면서 전국 34개 지역 800여 업체에서 소지자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10% 이용 요금 할인’을 내세운 곳이 많고, 지역 주민과 동등한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옥천군 디지털 관광주민증은 7월 2일 기준 11만2241명이 발급받았다. 2022년부터 시범 운영을 시작해 누적 발급자가 평창군(12만8478명)에 이어 둘째로 많다. 수생식물학습원을 비롯해 옥천군 내 업체 16곳이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1순위 꼽힌 수생식물학습원
옥천군 관광주민증 인기 여행지는 수생식물학습원, 화인산림욕장, 옥천전통문화체험관 등이다. 수생식물학습원은 2023년기준 20만명이 찾은 옥천의 대표 여행지. 예약 경쟁이 치열한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은 최소 하루 전 홈페이지 예약 후 방문 당일 매표소에 비치된 디지털 관광주민증 QR코드를 찍으면 성인 입장료 1500원을 할인받아 6500원에 관람할 수 있다. 지난달 24일 매표소 앞에서 만난 이규원(55)씨는 “평소 여행을 많이 다니니 아들이 추천해서 발급받았는데, 사용처마다 QR코드를 찍어야 해 번거롭긴 해도 할인과 함께 우대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수생식물학습원은 금강과 이별하고 대청호와 만나는 방아실 마을 안쪽에 자리한다. 언덕을 몇 번 넘어야 마주할 수 있는 수생식물학습원은 코로나 사태 때 전국구 여행지로 ‘등판’했다. 짙푸른 대청호와 맞닿은 절벽에 초록색 담쟁이가 뒤덮은 유럽풍 건물이 이국적 풍경을 연출한다. ‘좁은 문’이라 이름 붙은 정문은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자연 앞에서 저절로 겸손해지고, 인사하게 되는 자세. 좁은 문을 지나면 좁은 길이 나온다. 20여 m 걸어가면 정원에 입장한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 연상되는 수련이 핀 연못을 지나면 대청호가 눈앞에 펼쳐진다. 절벽 둘레를 따라 난 산책로와 테라스는 대청호를 원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 하늘과 산, 호수의 색 대비에 시야가 환해진다. 호숫가 절벽을 살려 낸 산책로를 따라 좌우로 전망대가 있다. 조용히 묵상하고 싶다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당’을 찾아갈 것. 유리창 너머 대청호의 푸른 물을 배경 삼은 십자가 앞에선 경건해진다.
수생식물학습원이 옥천 명소로 더 유명해진 건 최근이지만, 조성된 건 2003년이다. 원장인 주서택 목사를 중심으로 5가구의 주민들이 6만여 ㎡의 땅에 수생식물을 재배하고 번식·보급한 것이 시작. 수련 농장, 수생식물 농장, 온대 수련 연못, 잔디 광장, 산책로 등을 걷다 보면 가꾼 이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산책로마다 ‘침묵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꽃과 나무들의 소곤거림을’ 등의 문구가 조용히 사색으로 안내한다. 수련, 가시연, 연꽃, 부레옥잠화, 물양귀비, 파피루스 등 제철 맞은 수생식물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에도 제법 운치 있다. 주 원장은 “비 오는 날에 일부러 찾는 이들이 많다”며 “대청호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산에 운무가 낀 날 더욱 싱그러움을 뽐내는 수생식물들을 만나보라”고 했다. 산책로에 나무 덱, 야자 매트 등이 깔려 있어 우천 시에도 관람이 불편하지 않다.
◇최대 메타세쿼이아 군락지 ‘화인산림욕장’
다음 코스는 ‘화인산림욕장’이다. 드라마·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매표소에선 숲지기를 자처하는 이곳 정홍용(81) 대표가 탐방객들에게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발급받았는지 묻고 현장 발급을 권하기도 한다. 입장료 1000원을 할인받아 3000원에 입장했다.
화인산림욕장은 나무 전문가인 정 대표가 고향 땅에 반세기 동안 천천히 가꿔온 숲이다. 1976년 일본 와세다대학원을 수료하고 일본 종합무역상사 서울 지점장을 거쳐 1985년 목재 가공기계 수입업체인 ‘홍일상사’를 창업해 운영해 온 그는 ‘발로 뛴 나무 이야기’ 등의 저자다. “1978년 아내가 아들을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나무를 한 그루씩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는 숲은 시간의 두께만큼 울창하다. 20만㎡ 땅에 메타세쿼이아, 낙엽송, 잣나무, 편백나무, 재래종 조선솔 등 10만여 그루의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주종인 메타세쿼이아는 대량의 피톤치드를 방출한다. 메타세쿼이아가 도열한 산책로에 들어서면 나무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힐링하기 좋다는 길이 4.2km에 이르는 산책로엔 나무 덱도 없다. 다녀간 이들의 발자국에 자연스레 넓혀진 오솔길을 따라 숲을 탐험하는 기분. 인공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했다는 일부 구간에선 밀림에 들어선 착각도 든다. “초입에 날파리가 유난히 많은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탐방객에게 정 대표가 말했다. “당연합니다. 살충을 하지 않는 천연 숲이니까요.” 참고로 해충 기피제는 산책로 입구에 있다. 정 대표는 “각 나무 특유의 향과 맛을 즐기는 것이 진정한 산림욕”이라며 “한 그루 한 그루 의미 있게 심은 나무들이 하모니를 이루는 숲을 천천히 둘러보라”고 했다.
◇한옥 체험, 정지용 생가… 구읍 산책도 ‘주민처럼’
디지털 관광주민증은 관광지뿐 아니라 체험이나 식음료 이용 시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업체도 다수 참여하고 있다. 2020년 개관한 ‘옥천전통문화체험관’에선 공예·음악·음식·예절과 다도 등을 체험하며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한복 체험, 강정 만들기 체험뿐 아니라 숙박도 30% 할인. 예약 후 입실 전까지 디지털관광주민증을 발급받았을 경우 주말 4인 기준 정상가 9만원인 한옥 체험 숙박을 6만3000원에, 주중엔 4만9000원에 이용할 수 있다.
옥천 구읍엔 옥천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히는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 육영수 생가, 옥천 향교 등이 있다. 모두 도보 5분 이내 거리. 시인 정지용과 육영수 여사의 생가는 교동 마을 길을 따라 이어져있다. 두 사람은 500여 m에 거리에 생가를 두고 있지만, 생애를 살펴보면 만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향수’를 지은 정지용 시인의 생가에 들어서면 저절로 시의 한 구절이 입안에 맴돈다. 평화롭고 아름다워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노래한 시처럼 정지용의 고향 옥천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산줄기와 금강의 물줄기가 만나는 물 좋고 산 좋은 곳.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1996년 복원했다. 마당엔 ‘향수’ 속 ‘얼룩백이 황소’를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한 평온한 표정의 황소 조형물이, 생가 안방엔 시인의 초상화가 탐방객을 맞이한다. 실개천 교각 청사초롱에도 시구가 새겨져 있다. 생가 옆 ‘정지용 문학관’은 정지용의 시 세계로 안내한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정지용 시인의 모교인 일본 도시샤대학 교정에 세워진 ‘압천’ 시비 이야기를 시작으로 시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친 옥천에 대해 두루 설명해준다.
육영수 생가는 옥천전통문화체험관 부근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를 기리는 발걸음이 꾸준하다.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직원이자 마을 주민 홍성복씨는 “예전엔 50대 이상 탐방객이 많았는데 요즘 들어 20~30대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며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생가는 육영수 여사가 태어났을 때부터 결혼 전까지 살던 곳이다. 터를 채웠던 건물들은 사라지고 지금의 모습은 2004년부터 안채 복원 공사를 시작해 2010년에 복원을 마무리한 것이다.
연잎이 포근하게 덮은 ‘연당’을 곁에 두고 안채 뒤편으로 가면 ‘육영수 여사의 방’이 나온다. ‘德不孤必有隣'(덕유고필유린⋅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이웃이 있다) ‘중용지덕’이라 쓰인 글귀 아래 고향 이웃들에게 월남치마를 만들어 입으라고 기증했다는 꽃무늬 천이 놓여 있다. 생가 주변 골목마다 담벼락에 핀 능소화, 빛 바랜 벽화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맛집·카페도 디지털관광주민증 들고
옥천 구석구석 비경이 손짓하지만 부소담악, 둔주봉 한반도 지형 유람도 식후경. 스마트폰 속 옥천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열고 ‘식음료’ 참여 업체를 검색하니 카페와 음식점 목록이 ‘촤르르’ 뜬다. 디지털 관광주민증 혜택을 제공하는 유일한 식당은 월~금요일 오후 3시까지만 영업한다는 슬픈 소식. 가까이 있는 40여 년 전통의 읍내 맛집 ‘풍미당’에서 ‘물쫄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일부 커피에 한해 20%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는 ‘라운드커피’로 갔다. 옥천 식음료 주요 사용처 중 가장 많은 이들이 다녀갔다는 곳이다.
통유리창 너머 교동 저수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에 분위기는 합격. 점장은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활용하는 손님들이 차츰 늘고 있다”고 했다. 메뉴 가격은 아메리카노 5500원부터 스무디 8000원까지로 가격대가 있는 편. 디지털 관광주민증 할인 혜택은 아메리카노·라떼·디카페인 커피에만 적용된다.
7월 3일 기준 옥천군 내 디지털관광주민증 참여 업체는 16곳이다. 대청호가 보이는 홍차 맛집도, 생선국수 맛집도 있지만, 할인 혜택을 생각하면 선택의 폭이 넓지는 않다. 옥천을 포함해 인구가 적은 소도시는 특성상 오후 6시면 문을 닫는 곳도 다수다. 옥천구읍 주요 관광지는 월요일 휴무, 식당이나 카페는 월·화요일 휴무인 곳이 많다. 사전에 예약해야 하는 곳도 있으니 헛걸음 하지 않으려면 문의 후 방문하는 게 현명하다.
[ ‘디지털 관광주민증’ 들고 어디까지 가봤니? ]
디지털 관광주민증 활용 깨알 팁
디지털 관광주민증은 인구 감소 위기를 겪는 지역의 관광 활성화를 위한 사업이다. 이번 여름휴가에 인구 소멸, 감소 지역인 소도시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이용해볼 만하다. 가랑비에 옷 젖고, 티끌 모아 태산인 법.
수도권과 가까운 경기 가평·연천, 인천 강화를 비롯해 강원 삼척·양양·영월, 충남 예산, 충북 괴산·제천·단양, 전북 남원, 부산 서구·영도구 등 34개 지방자치단체가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발급한다. 여행 전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나 앱으로 발급받거나, 참여 업체에 비치된 디지털 관광주민증 QR을 스마트폰으로 스캔해 발급받을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 디지털 관광주민증 발급 현황(7월 2일 기준)에 따르면 강원권에선 2022년 9월부터 시범 운영을 시작한 선발 주자 평창이 12만8000여 명으로 발급자가 가장 많고, 정선이 8만9289여 명으로 뒤를 잇는다. 충북 단양도 9만 명을 넘겼다. 참여 지역별 주요 사용처를 보면 디지털 관광주민증 인기 여행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단, 혜택을 제공하는 곳은 대부분 유료 시설이기에 무료 여행지와 시설은 포함되지 않는다. 평창은 ‘이효석문학관·효석달빛언덕’을 많이 찾았다.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활용하면 통합 관람료(4500원)가 2000원으로 내려간다. 바캉스 명소인 알펜시아 리조트의 ‘오션700 워터파크’도 방문 시기별 35~40% 할인해준다. 숲을 가로지르며 하강하는 체험 시설 알파인코스터의 할인율은 25%. 정선은 ‘가리왕산 케이블카’가 인기다. 디지털 관광주민증 소지 시 30%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충북 단양은 ‘다누리 아쿠아리움’ 반값 할인을 비롯해 사용처가 다양하다. 패러글라이딩 등 체험 업체만 13곳이 참여한다. 부산 영도구도 디지털 관광주민증 발급 대상 지역이다. ‘태종대 다누비열차’, ‘태종대 오션 플라잉 테마파크’ 등을 각각 25%, 12~15% 할인해준다. 전남 신안군의 주요 사용처인 ‘라마다호텔프라자&씨원 리조트’는 시기와 요일에 따라 최대 59% 숙박 할인을 제공한다. 무료 혜택을 내세우는 곳도 있다. 충북 제천 의림지 역사박물관은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활용하면 입장료(2000원)가 무료다. 예약 필수인 곳도 있으니 디지털 관광주민증 내 사용처별 방문 깨알 팁도 확인하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