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 본격화된 지난 2일 서울의 광화문 사거리 출근길 풍경. /장련성 기자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온 세상을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중략) 어쩌다 한나절씩 빗발을 긋는 것으로 하늘은 잠시 선심을 쓰는 척했고, 그러면서도 찌무룩한 상태는 여전하여 낮게 뜬 그 철회색 구름으로 억누르는 손의 무게를 더 한층 단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가도 갑자기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이 악의에 찬 빗줄기를 주룩주룩 흘리곤 했다.”

1973년 발표된 윤흥길 소설 ‘장마’의 한 구절이다. 6·25를 배경으로 한 달쯤 비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를 묘사하고 있다. 아, 그 꿉꿉한 계절. 겨울 농한기도 아닌데 불 피운 구들장에 쑤시는 허리나 하릴없이 지져야 했던, 여름 초입의 제5 계절.

그런데 이런 한국형 장마가 옛말이 되고 있다. 기후변화로 동북아시아 장마의 전통적 패턴이 깨지고, 예측하기 어려운 집중·장기 폭우가 잦아지면서 아열대성 우기(雨期)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4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에서 직원들이 수해를 대비해 긴급구호세트를 점검 및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마 예보 포기한 기상청

우선 기상청과 학계가 장마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거의 쓰지 않는다. 기상청은 2009년부터 장마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예보를 중단했다. ‘장마가 언제 끝난다’고 예보했다가 휴가를 가거나 시설물·농경지 관리가 허술해졌을 때 기습 폭우가 닥치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그때그때 호우 예보만 하고 있으며, 6~7월 며칠간 비가 오면 관례대로 ‘장맛비’로 표현하는 정도다.

기상청과 기상학회는 2022년 장마 백서를 내고 “기후 위기로 인해 장마라는 전통적 표현의 수명이 다해 ‘한국형 우기’로 변경을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장마와 아닌 기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장마 기간이 종전 3~4주에서 두 달 이상으로 길어지며, 국지성 폭우 등 불규칙성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부터 등장한 ‘장마’라는 용어를 포기하는 것이 국민 정서상 무리라는 지적 때문에 아직 ‘우기’ 역시 공식화하지 못하고 있다.

장마는 ‘긴 비’란 뜻이지만, 예측 가능함을 전제로 한다. 장마전선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남쪽 북태평양의 고온 다습한 고기압과 북쪽 오호츠크해의 한랭 다습한 고기압 사이에 형성된 뚜렷한 정체 전선이기 때문이다. 이 전선이 제주도에서 북상하며 전국이 동서로 같은 날씨를 띠는 것도 특징이다.

장마는 통상 6월 말 시작해 7월 중·하순이면 끝났다. 이는 한·중·일 등 사계절이 뚜렷하면서도 물이 많이 필요한 쌀을 주식으로 해온 동북아 특유의 자연현상이었다.

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우산 쓴 학생들이 뛰어가고 있다. /뉴스1

◇장마엔 돌도 큰댔는데

곰팡이와 식중독, 불황, 교통 체증과 관절염 이미지가 강한 장마. 사실 농경 시대엔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빗물과 햇빛을 고르게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연중 강수량의 30%가 6~7월 장마철에 집중돼 있지만,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작물이 알아서 잘 자라게 했다. 농부들이 사실상 일손을 놓는데도 ‘음력 오뉴월 장마엔 돌도 큰다’는 속담이 나온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수년 새 8월은 물론 9월까지도 예측 못 한 돌발성 호우가 이어지는 양상이다. 이를 두고 ‘가을 장마’나 ‘2·3차 장마’도 모자라 ‘4차·5차 폭우’란 이름이 붙었다.

올해도 어린이날·부처님오신날에 비가 와 “장마 시작이 5월로 앞당겨진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 데다, 8월까지 최소 5차에 걸친 폭우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현재 기상청이 여름을 5~9월로 늘려 잡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주말 전국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배추 등 농산물 가격이 급등했다. 지난 2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의 모습. 기상청이 올여름 강수량이 평년보다 많을 것으로 예보하면서 올여름 채소류 가격은 더욱 오를 전망이다. /뉴스1

또 요즘 장마는 서울 한쪽에선 물난리, 일부는 불볕더위, 강원도는 가뭄 같은 식으로 종전 장마전선 패턴과는 달리 국소 지역별로 예측 불가하고 흉포한 수준이다. 동남아·남태평양의 우기처럼, 순환이 급격한 대류성 강수로 하루에도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는 날씨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는 지구온난화로 수증기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은 중국발 수증기가 티베트고원에 갇혀 있다가 한반도로 흘러 들어오다 서해를 지나며 ‘대기의 강’을 이룬다. 또 시베리아의 고온 현상 때문에 한반도로 밀려 내려온 찬 공기가 이 중국발 수증기를 만나 폭발적 비구름을 만든다고 한다.

이처럼 폭우와 폭염이 함께 장기화할 경우 대형 복합 재해가 일어날 위험이 커진다. 취약 계층 피해에 교통·산업 분야 안전사고, 감염병 창궐과 농산물 등 식품 가격 폭등 가능성도 크다. 하다 하다, 구식 장마가 그리워질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