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종(66)씨는 설악산 흔들바위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철제 사다리를 구부려놓은 모양의 알루미늄 지게를 등에 짊어졌다. 파란 박스 4개를 끈으로 묶은 짐이 실려 있었다. 약 60kg이라고 했다.

지난 5일 오전 9시.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 임기종씨는 흔들바위에 있는 한 암자에 제사용 과일과 떡을 운반하는 중이었다. 나무 지팡이로 가볍게 앞을 짚고 왼발을 내디딘 다음 오른발을 옮겼다. 이렇게 한 걸음 걷는 데 2~3초. 신중해 보였다. “지게에 진 짐이 짐이 아니에요. 그동안 나를 밀어주고 띄워준 고마운 존재죠.”

지난 5일 오전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 임기종씨가 짐을 지고 비탈진 산길을 걷는다. 대청봉, 흔들바위, 비룡폭포, 비선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산속 암자로 생필품을 나르며 50년을 살았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타고난 지게꾼으로 50년

강원도 속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이 일을 50년간 해왔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다. 16세부터 설악산을 오르내리며 지게로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엔 100kg이 넘는 냉장고를 거뜬히 짊어졌고,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까지 생수와 라면 등을 나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고 환경 보호가 강조되면서 등산로 노점들은 다 철수했다. 40~50명이던 설악산 지게꾼도 떠나고 지금은 임씨만이 홀로 흔들바위, 금강굴 등 산 중턱의 암자로 묵묵히 생필품을 나른다.

제아무리 베테랑도 체력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그의 왼쪽 다리엔 빨갛게 5cm 길이의 상처가 있었다. 전날 80kg짜리 김치냉장고를 지고 일어서다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다쳤다고 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산 아래 주차장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고강웅(61)씨는 “짐을 지고 일어서면서 두 번이나 넘어지길래 지게를 뒤에서 받쳐드리며 함께 등산했다”며 “(일이) 이제 좀 버거운 것 같다”고 귀띔했다.

등산객들은 지게를 진 임씨에게 인사를 했다. 미국 보스턴에 살다 최근 귀국했다는 윤모(53)씨는 “설악산은 7년 만인데 낯익은 지게꾼을 다시 뵈니 반갑다”고 했다. 광주광역시에서 왔다는 한 중년 여성은 임씨와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설악산의 마지막 지게꾼이자 지게로 번 1억원 이상을 독거 노인 등에게 쾌척한 기부왕. 방송에 여러 번 출연해 설악산의 유명 인사인 그는 “산에서 물병이 없어도 목마를 걱정은 안 한다. 등산객들이 다 나눠준다”며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행복한 직업”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동안 일을 쉬어야 했다. 어느 방송과 인터뷰를 했다가 ‘노동 착취’ 논란이 일어 1년 가까이 산에 오르지 못했다. 걸어서 2㎞, 약 1시간 거리인 흔들바위까지 운반비가 2만원이라고 말했기 때문. 수만 명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국민 청원에 참여했고, 절에서는 그에게 더 이상 일감을 주지 않아 우울증까지 겪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설악산으로 돌아온 것일까.

“집에 가만히 있으려니 천불이 났다”고 임씨는 말했다. 일하지 않는 것을 ‘천불’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20년 전 운반비를 말한 것인데 다들 오해를 한 거예요. 그런데 산속의 절로 짐을 나를 수 있는 지게꾼은 저뿐입니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오해를 풀었어요.” 그는 다시 지게를 졌다. 흔들바위 암자까지 60kg 짐을 나르는 데 5만원, 금강굴 암자까지는 1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임씨는 이날 흔들바위까지 3번 왕복했다. 15만원을 번 셈이다. 암자 관계자는 “양초 같은 제사용품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데 젊은 사람들은 험한 일을 안 하려고 하니 임씨는 ‘대체 불가’”라고 했다.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은 ‘프리랜서’처럼 일감이 있는 날만 일한다. “절에서 월급받고 일하라고 했는데 어디 매이는 건 적성에 안 맞았다”고 했다.

그는 타고난 지게꾼이다. 임씨는 “6남매인 집안 사정이 어려워 국민학교 5학년 때 중퇴를 하기 전, 어른들과 함께 뛰는 2000m 장거리 달리기에서 3등을 했다”며 “선생님이 ‘달리기 선수를 해도 되겠다’고 했지만 훈련을 뒷바라지하며 밀어줄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마라톤 선수가 되는 대신 지게를 진 것이다. 그는 “처음 10년은 요령이 없어 넘어지기도 하고 힘들었지만, 몸에 익고 기분 좋게 일하다 보니 자유자재가 되더라”며 “젊을 땐 새벽 3시까지 밤샘 산행을 하고도 2시간 자고 새벽에 다시 일을 나갔다”고 했다. 당시 같이 간 동료는 며칠을 앓아누웠다고.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 임기종씨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고비를 넘고 또 넘고

그는 기독교인이다. 스스로 지게꾼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도 했다. “(신께서) 이거 하나 재능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내 직업’으로 받아들였어요.” 교회에서 예배 때 연단에 올라 대표로 기도도 올린다고 했다. 임씨는 “뭐 한 가지라도 의지해야겠다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좋더라”며 “일요일에는 새벽일을 마치고 오전 10시 예배도 꼭 참석한다”고 했다.

임씨의 인생은 설악산만큼이나 산세가 험하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부양하고 있다. 아내는 지적장애 2급으로 아이와 같은 지능 수준. 마흔이 넘은 아들은 자폐 증상으로 보호시설에서 따로 산다.

설악산은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키 158cm에 발 크기도 250mm에 불과한 가냘픈 체구. 아침·점심을 김밥 한 줄로 때울 만큼 식사량도 적다. 임씨는 “산에만 오면 살아갈 힘이 난다”고 했다. 그는 스포츠 의류 브랜드들이 마련해준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마지막 지게꾼이라며 TV에 나오고 대통령도 뵙고 마라톤의 이봉주 선수도 만났다”며 “기부를 시작한 것은 처음엔 아들을 잘 돌봐달라는 뜻이었는데 이젠 설악산만큼 영역이 넓어졌다”고 했다. 그는 최근 방송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엄홍길 대장과 춘천의 삼악산에 오르기도 했다. 임씨는 “아내가 아파서 멀리 등산을 다니진 못했다”면서도 “역시 설악산이 최고더라”고 했다.

“고비를 넘고 또 넘으면 고속도로가 나올지 몰라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저한테 가장 큰 고비는 아들 문제였어요. 임대주택에 들어가려는데 아들이 자폐아라고 이웃들이 꺼려해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고비들에 비하면 설악산 대청봉도 별게 아니에요(웃음).”

짐 60kg을 지고도 계단을 가뿐히 오른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남은 삶은 ‘고속도로’

이날 임씨가 마지막 세 번째 짐을 흔들바위 암자에 내려놓은 시각은 오전 11시쯤. 이렇게 일이 있는 날은 속초시 교동의 한 임대 아파트 자택(15평)에서 오전 6시 40분 버스 첫차를 타고 집을 나선다. 오전 8시부터 지게를 진다. 그런데 하산을 앞두고 지게에 또 다른 박스를 올렸다. 임씨는 “절에서 나온 쓰레기인데 이건 무료 서비스”라며 웃었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성큼성큼 과감했다. 그러나 몸과 지게가 나뭇가지나 흙, 돌에 스치지조차 않았다. 정말 ‘자유자재’라 할 만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발걸음은 더 가벼웠다. 그는 “일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일에서 힘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귀가한 임씨는 윤석열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과 찍은 기념 사진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2022년 그가 쓰던 알루미늄 지게를 보존 자료로 받고 나서 “기증한 큰 뜻을 기리겠다”며 수여한 증서도 눈에 띄었다. “기증한 지게가 훨씬 편하긴 했다”고 임씨는 말했다. 아내와 말동무를 해주러 온 사회복지사가 3명이나 됐다. 복지사들은 임씨 부부가 가장 좋아한다는 두부찌개를 끓여줬다.

“짐을 지고 산을 타며 평생을 단순하게 살았다”는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은 앞으로 남은 삶을 ‘고속도로’로 여기고 있었다. 임씨는 “70세쯤 일을 그만두면 아내와 아들과 함께 지낼 것”이라며 “닭이나 돼지를 기르며 살고 싶다”고 했다. 비영리단체 따뜻한하루는 3년째 그에게 매달 50만원씩 후원하고 있다. “1억원 넘게 기부하며 좋은 일을 하신 분의 생계가 곤란해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생활비를 드리고 있다”고 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연금을 받는다. 설악산과 주변 사람들에겐 임씨가 메달리스트였다. 남들이 가지 않는 비탈길에서 자족하며 사는 사람. 그는 “설악산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고 했다.

설악산 마지막 지게꾼 임기종씨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