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처음 쓴 책이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에 아내가 먼저 다니던 출판사에서 나와 프리랜서가 되었기 때문에 꼼짝없이 ‘부부가 둘 다 노는’ 상황이 된 것이다. 책 제목이 이렇게 정해졌다고 알렸더니 주변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 제목이 왜 그 모양이야?” “그래서 어디 책이 팔리겠어?” 하지만 그보다 더 억울한 건 “애가 없으니까 철도 없네. 속 편하게 둘 다 논다고 자랑질이나 하고”라거나 “돈 많이 벌어놓은 모양이구나” 등등의 비아냥거림이었다. 회사는 그만두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거 아니라고, 노는 것과 쉬는 것은 다른 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책이 열흘 만에 2쇄를 찍고 드라마로 제작하자는 제의도 오는 등 걱정하던 것에 비해 잘 풀리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변명을 하지 않고 다음 책을 쓸 수 있었다.
광고대행사에 들어간 첫날은 잊을 수가 없다. 16층에 책상을 배치받은 날 점심을 먹고 17층에 있는 선배한테 잠깐 놀러 갔다가 그 층에 있는 모 국장님과 마주쳤는데 그가 느닷없이 내 운동화를 보고 시비를 걸었다. “이름이 뭐? 편성준...? 그래, 편성준씨는 회사에 놀러 왔나? 직장인이 구두는 못 신어도 랜드로버(당시 유행하던 캐주얼화) 정도는 신어줘야지. 운동화가 뭐야, 운동화가?” 하룻강아지보다도 못한 신입 사원이었던 나는 얼굴이 온통 홍당무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어, 하고 서 있다가 선배가 와서 등을 밀어주는 바람에 겨우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용기를 내서 “아니, 국장님. 광고 회사는 복장부터 자유로워야 아이디어도 팍팍 나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꽉 막힌 사고방식을 가지고 도대체 무슨 크리에이티브를 한다는 겁니까?”라고 시원하게 받아쳤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런 용기는 늘 당시가 아니라 다음 날 아침이나 상상 속에서만 찾아오지 않던가.
그래서 ‘이불킥’이라 부르는 걸까 궁금해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맞다. 네이버사전엔 ‘자려고 누웠을 때, 부끄럽거나 창피스러운 일이 불현듯 생각나 이불을 걷어차는 일’이라 쓰여 있고 나무위키엔 ‘이불+킥(Kick)의 합성어. 이불 속에서 발길질을 하는 행위를 말하며, 2013년경 웹상에서 퍼지기 시작한 신조어다’라는 설명이었다. 사전까지 찾아보며 흥분하는 걸 보니 나도 어지간히 이불킥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자각이 와서 나의 이불킥 역사를 살펴보기로 했다.
잡지사에 들어갔다가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잠깐 놀 때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선배와 홍대 앞 술집에서 만났는데 여자 후배도 하나 있었다. 선배와 여자 후배는 일본 유학 시절 공통으로 알던 어떤 여자 얘기를 했는데 그 여자랑 술을 마셨네, 잠을 잤네 어쩌고 하는 부분부터 둘이 일어로 언어를 바꾸었고 일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멀뚱멀뚱 두 사람의 얼굴만 쳐다보아야 했다. 지금 같으면 “저 먼저 일어날게요. 재수가 없어서요”라고 했겠지만(진짜?) 그때는 돈도 없고 자존감도 없어서 그대로 앉아서 술을 마셨다.
아, 나는 어쩌자고 첫 칼럼부터 이런 창피한 얘기를 털어놓는 걸까. ‘부부가 둘 다 놀고 먹고 씁니다’라는 코너명에 대해 설명하려다가 엉뚱하게 이불킥 애기만 늘어놓는다. 내가 쓴 ‘시작은 정직이었습니다’라는 기업 홍보 영화 카피를 보고 “우리 회사는 지금도 정직한데 왜 과거형이에요?”라고 따지는 광고주에게 ‘그건 과거형이 아니고, 광고주도 맞춤법 공부 좀 해야 한다’라고 왜 야단을 치지 못했을까. 거짓말을 일삼던 회사 대표에게 왜 그렇게 입만 열면 거짓말이냐고 따지지 못했을까. 칼럼을 시작하며 이번만큼은 쓰고 싶은 얘기는 뭐든지 다 쓰겠다는 다짐이 이불킥 이야기를 불러낸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좋은 이불킥도 있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어떤 젊은 여성이 트렁크를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는 걸 보고 “제가 들어 드릴게요!”라고 소리치고는 트렁크를 빼앗아 맨 위까지 올라가서 세워 주었다. 그녀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하길래 얼른 도망쳤다. 아마 그때 망설이기만 하고 도와주지 못했다면 분명히 집에 와서 이불킥을 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참 잘했어’라고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이불을 툭툭 차고는 아주 달게 잤다.
♦윤혜자·편성준 부부는?
남편은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작가가 되었고 아내는 기자 출신 출판기획자다. 뒤늦게 만나 결혼했는데 둘 다 책과 술,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한량이다. 최근 충남 보령으로 이사를 갔으나 일주일의 반은 서울에서 놀고 먹고 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