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눈에 안경’이 아니라 제주에 안경이다. 대형마트, 영화관, 패스트푸드점이 모여 있는 제주 노형오거리. 천혜의 자연이 보존된 섬이지만, 이곳은 유독 네온사인이 강렬해 ‘시내’라 부른다. 반경 2km 이내에 안경점이 무려 15곳. 읽을 글씨 많은 도시에선 좋은 시력이 필요하다.
노형오거리에서 5km 떨어진 곳에 제주시청이 있다. 시청·법원 등과 접한 중앙로 3km 구간에는 안경점이 11곳이다. 아무렴, 공무를 하려면 서류를 꼼꼼히 살필 돋보기도 필요하지.
제주보건소에 따르면 작년 3월 기준으로 안경점은 도 전체에 총 99곳이라고 한다. 제주공항 근처에 사는 조은별(31)씨는 “공항 근처 시내에 최근 새 안경점이 부쩍 늘었다”며 “브랜드를 달고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곳이 많다”고 했다.
◇안경 팔러 남(南)으로, 남으로
지방에서 안경점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8~2022년) 전국 안경원 수는 9787곳에서 1만242곳으로 4.7% 늘어났다. 서울은 오히려 0.2% 감소했고 인천은 3.0% 증가에 그쳤다. 반면 증가율이 높은 지역은 세종 35.9%, 제주 14.3%, 경기 11.5%, 전남 9.0%, 강원 8.7% 순이었다. 세종은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같은 기간에 인구가 30만명에서 38만명으로 급증하며 안경점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은 대체 무슨 일인가.
전국에서 해마다 신입 안경사 약 1000명이 배출된다. 안경점을 열고 운영하려면 국가에서 공인한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2~4년제 대학에서 안경광학과를 졸업하고 면허 시험에서 합격해야 받을 수 있다. 생각해 보라. 해마다 안경 전문가가 이렇게 많이 늘어난다면, 치열한 경쟁과 비싼 임차료를 피해 수도권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갈 수밖에.
지방은 젊은 안경사가 노장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장소다. 숙련된 터줏대감들도 그런 변화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에서 35년째 안경점을 운영하는 천영호(57)씨는 “처음에는 우리 가게뿐이었는데 이제 5곳으로 늘어났다”고 했다. 그는 “중·고교생처럼 젊은 고객들은 안경 디자인이 최신 트렌드에서 뒤처진 오래된 안경원을 꺼린다”며 “그런 곳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독립해 화려한 외관을 지닌 안경원을 차리는 일이 많다”고 했다.
◇한번 생기면 40% 더 오래 생존
지방 거주자들도 고령화되면서 노안 등으로 안경이 필요해지는 추세에 따른 현상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신선우 경북과학대 안경광학과 교수는 “100세 시대에 안경 수요가 증가하면서 안경사 일거리가 늘어나고 있다”면서도 “지방 인구 자체는 줄어드는데 우후죽순 갑자기 늘어난 안경점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안경사와 소비자 모두 피해를 입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브랜드 전략이기도 하다. 다비치안경 프랜차이즈는 제주에서 점포 8개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 내 안경점의 10%에 가까운 숫자다. 이렇게 인접한 이유에 대해 프랜차이즈 업계 관계자는 “기존에 안경점이 적었던 지역에서 전략적으로 확장하면 브랜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경 소매업은 미래가 불안한 불경기에 안정적인 사업으로 여겨지는 측면도 있다. 국세청이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100개 업종에 대해 최근 5년(2018년~2022년)간 사업자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안경점은 한번 개업하면 평균 12년 1개월 동안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업종 평균인 8년 9개월보다 훨씬 오래 가는 업종이다.
덕분에 이번 휴가철에 제주도나 강원도 등지로 국내 여행 가면 눈 걱정은 덜겠다. 안경테가 부러지거나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려도 얼마든지 근처에서 살 수 있으니. 하지만 휴가 기간마저 눈 부릅뜨고 지내야 하나. 너그러이 눈 감아주고 쉬는 여유를 찾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