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에게는 추억의 맛, 젊은이에게는 신선한 맛. 평양냉면은 겨울 음식으로 출발했지만 이젠 여름 음식의 대명사다. 면발에는 메밀을 수확하는 늦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배어 있다. 냉면 사발을 손으로 들고 차가운 육수부터 한 모금 마시면 온몸이 시원해진다. 폭염에도 유명 냉면집 앞에 길게 줄을 서는 수고를 감당하는 이유다.
평양냉면은 한때 실향민들의 솔푸드였다. 잘한다는 냉면집에는 강건한 관서(평안·황해도) 지방 사투리를 쓰는 나이 지긋한 이북 어르신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북적였다. 이남 사람들은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밍밍하고 심심한 음식” “행주 빤 듯한 물에 담근 국수”라고 폄하했다.
격변의 시대를 견디고 평양냉면은 더 번성했다. 무미한 듯한 육수와 면발에 숨겨진 풍미를 즐기는 젊은 층이 차츰 늘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평양냉면에 국민적 관심이 커졌다. 이 무렵 업계에 신흥 강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노포들과 패권을 다투는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2024년 7월 현재 최고 냉면집은 어디일까? ‘아무튼, 주말’이 음식·외식 업계 전문가 10명에게 물었다.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평양냉면집을 10곳씩 꼽아달라고. 본인과 관련된 곳은 배제했다. 1등부터 10등까지 10점부터 1점까지 매겨 합산했다. 그렇게 뽑아낸 ‘평양냉면 베스트 10′을 공개한다.
◇평양냉면의 정점 보여주는 우래옥
냉면집 베스트10을 보면 관록 있는 노포들과 새로운 평냉 맛집들이 치열하게 맞서는 모양새다. 상호에 ‘옥(屋)’ 자가 붙는 ‘1세대’ 냉면집이 다섯, 신흥 ‘2세대’ ‘3세대’ 냉면집이 다섯이다. 1세대 냉면집은 이북 출신 실향민과 그 자손이 창업·운영하는 곳이다. 1세대 평냉집에서 배워 그 맛을 제대로 재현·계승한 곳을 2세대, 완전히 다른 혁신을 추구하는 곳은 3세대로 부른다.
1위는 ‘우래옥’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집. 평양에서 ‘명월관’을 운영하던 장원일씨가 1946년 서울에 ‘서북관’을 차렸다. 6·25가 터지자 피란 갔다가 1953년 서울로 다시(又) 돌아와(來) 연 게 우래옥(又來屋)이다. 선정 패널들은 “한우만으로 우린 육수과 메밀 향 짙은 면발의 완벽한 조화가 평양냉면 맛의 정점을 보여준다” “감칠맛 진한 국물이 평양냉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좋아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다” “불고기, 우설 등 각종 소고기 구이, 김치말이국수 등 다른 메뉴도 훌륭해 외식의 만족감을 올려준다”고 평가했다.
2위에 오른 ‘필동면옥’은 3위 ‘을지면옥’, 공동 6위 ‘평양면옥(의정부)’과 더불어 의정부 계열에 속한다. 평안도 대동군 출신 홍영남·김경필 부부가 1969년부터 경기도 전곡 ‘평양면옥’에서 냉면을 만들어 팔다 소문이 나면서 1987년 의정부로 이전했다. 장남 홍진권씨가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1985년 문 연 서울 을지면옥은 홍영남씨의 둘째 딸 홍정숙씨가, 필동면옥은 맏딸 홍순자씨가, 서초구 잠원동 ‘의정부 평양면옥(옛 본가 평양면옥)’은 막내딸 홍명숙씨가 경영한다.
의정부 계열 냉면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섞는 육수가 무미할 정도로 심심하지만 먹을수록 특유의 감칠맛이 올라온다. 곱게 빻은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 내는 게 특징. 필동면옥 냉면은 의정부 계열 중에서는 “달다”고 할 정도로 육수 감칠맛이 도드라진다. “국물이 맑고 청량하면서도 육향·감칠맛·염도 등 균형이 뛰어나다. 너무 매끄럽지 않고 적당한 식감으로 잘 삶은 탱글탱글한 면발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과거 필동면옥은 냉면 맛이 다소 들쑥날쑥했지만, 근년 들어서는 언제 먹어도 좋을 정도로 편차가 없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을지면옥은 의정부 계열 중에서 특히 심심하다. 평냉 입문자에게 가장 난도 높은 냉면으로 지목된다. 대신 중독성도 강하다. 을지면옥을 1등으로 꼽은 선정 패널은 “같이 갔던 외국인이 ‘차가운 콘소메(맑은 프랑스 소고기 수프)’라며 감탄했을 정도로 육향이 과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맛을 꾸준히 낸다”고 했다. 돼지고기를 삶아서 식힌 뒤 얇게 저민 ‘편육’이 냉면만큼 인기. 마니아들은 “소주 안주로 이만한 게 없다”고 격찬한다. 세운지구 재개발로 문을 닫았다가 지난 4월 낙원동에서 2년 만에 영업을 재개했다. 또 다른 패널은 “2년 공백 때문인지 예전보다 맛이 다소 떨어졌다”고 했다.
◇전통 명가 위협하는 신흥 강자들
이번 평가에서는 신흥 강자들의 약진이 눈에 띈다. 4·5·6위로 치고 올라온 ‘광평’ ‘서령’ ‘율평’이 대표적이다. 밀가루나 전분을 섞지 않고 100% 메밀로만 반죽해 뽑는 ‘순메밀면’, 들기름 등을 활용한 새로운 맛의 냉면을 스테인리스보다 고급스러운 유기 사발에 담아 내며 평냉 애호가와 젊은 층, 미식가들을 끌어 모은다.
서울 삼성동에 본점이 있는 광평은 이 집에서 쓰는 메밀 산지인 제주도 광평리에서 딴 상호. 종래 냉면집이 메밀과 전분·밀가루 비율을 조절해 식감을 차별화했다면, 김인복 셰프는 일반 메밀과 제주산 쓴 메밀을 섞어 새로운 맛을 찾았다. 쓴 메밀을 껍질째 갈아 넣어 다른 집보다 풍미와 감칠맛이 강하지만, 매끈한 면발을 선호한다면 좀 실망할 수 있다. 육수는 한우 암소 고기로 뽑는다. “육향이 풍부하게 올라오고 고명 조리가 섬세해 투박한 맛이 적다”는 평. 미역취나물, 무채, 표고버섯, 참깨, 들깨, 백김치, 배, 소 양지 등 고명을 들기름, 간장 양념에 비벼 먹는 ‘골동면’도 인기다.
‘서령’과 ‘율평’은 막국수에서 평냉으로 전환하고 장소를 이전한 곳이다. 지난 5월 서울 숭례문 앞 단암빌딩에 문 연 서령은 강원도 홍천 유명 맛집 ‘장원막국수’ 창업자가 2021년 강화도에서 평양냉면으로 업종을 바꿔 서령을 열었다가 3년 만에 서울로 진출했다. 그래서 그런지 맛과 서비스에 흔들림이 없다. 100% 메밀로만 반죽해 뽑은 순메밀면과 양지·사태·채소로 뽑은 육수를 조합한 냉면 맛에 대해서는 “섬세하다”와 “2% 부족하다”로 호불호가 갈린다. “분위기, 인테리어, 서비스에서는 어떤 냉면집보다 훌륭하다” “소고기 수육, 돼지 항정살 수육, 만두 등 냉면 외 다른 메뉴들이 나무랄 데 없다”는 평가.
경기도 분당 율평은 강원도 철원에서 막국숫집을 운영하던 주인이 서울 ‘서관면옥’ 냉면을 맛보고는 냉면집 ‘철평’으로 업종을 바꿨고, 지난 4월 경기도 분당으로 이전하며 ‘율평’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금방 제분한 두 가지 메밀을 섞어 식감과 향이 좋고 육수와 이루는 균형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메밀 손만두, 콩국수도 인기다.
의정부 계열 맏형 평양면옥(의정부)은 율평과 함께 6위에 올랐다. “병립하기 어려운 정통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다. 8위 ‘진미평양냉면’은 장충동 계열로 분류되지만 의정부 계열로 보기도 한다. 대표 임세권씨가 의정부 평양면옥에서 3년, 장충동 평양면옥에서 17년간 주방장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맑고 투명하면서도 진한 육향의 국물, 메밀향이 피어 오르는 가늘고 매끄러운 면발이 “의정부와 장충동 계열의 장점을 합쳐놓았다”는 평이다.
9위 장충동 평양면옥은 평양에서 대동면옥을 운영하던 김면섭씨와 며느리 변정숙씨가 1985년 개업했다. 본점은 변씨의 큰아들 김대성씨가, 논현점은 둘째 아들 김호성씨가 맡았다. 대성씨 둘째 딸 유정씨와 사위 서상원씨는 2014년 도곡점을 개점했다. 신세계백화점에 문 연 평양면옥은 호성씨 둘째 딸 은성씨가 이끈다. 만두, 어복쟁반, 빈대떡 등 이북 음식을 두루 잘한다.
10위 ‘봉피양’은 우래옥 계열로 분류된다. 우래옥 출신 평양냉면 장인 김태원씨가 기틀을 잡았기 때문이다. 우래옥 냉면을 기본으로 하되 소고기 육수에 돼지·닭·채소 육수를 섞어 봉피양만의 냉면을 개발했다. 벽제갈비에서 운영하는 곳답게 갈비·등심·떡갈비 등 최상급 한우도 맛볼 수 있다. 냉면에 ‘돼지목심본갈비’를 곁들이는 손님이 많다.
※선정 패널: 김성화 다이어리알 기자, 김영광 낙원의 소바 대표(면요리 전문가), 김인복 광평 대표, 박정배 음식작가(‘음식강산’ 저자), 박찬우 파브란트 총괄셰프(한국조리협회 상임이사), 배순탁 방송작가(평양냉면 마니아), 백현석 이엘TV 대표(넷플릭스 다큐 ‘냉면랩소디’ 제작자), 이윤화 쿠켄네트 다이어리알 대표, 정동현 음식작가(롯데백화점 F&B기획팀장), 김성윤 조선일보 음식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