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올림픽 양궁 금메달 5개 싹쓸이 쏴리(소리) 질러~! 우리가 누구의 후예인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후예다. ‘삼국사기’는 주몽의 활쏘기 능력을 이렇게 기록했다.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이뿐이랴.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이성계)가 단 한 번 (활을)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고 적혀 있다.
타고난 핏줄에 근성과 노력이 더해졌다. 당기기만 하면 ‘텐, 텐, 텐’. 이우석(26) 선수는 경기 직후 네티즌 전용 사전 나무위키에서 인물 이름이 한때 ‘주몽’으로 바뀌었다. 실력에 감탄한 다수의 네티즌이 그의 이름을 주몽으로 바꿔 입력해댔기 때문이다. 한 외국인은 유튜브 영상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올림픽 양궁은 4년마다 세계 궁사(弓師)가 한자리에 모여 한국인의 금메달 수상을 축하해주는 자리다.”
최근에는 선수가 아닌 평범한 20~30대 젊은이들도 혈관을 타고 흐르는 궁사의 DNA를 주체할 수 없나보다. 우리나라 전통 활쏘기인 국궁(國弓)을 취미 삼아 배우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골프와 테니스는 한물간 지 오래, 전국 약 400곳의 활터(국궁장)에는 “활을 배우고 싶다”는 젊은층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이들이 전통 활쏘기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동네 어르신 놀이터? 아니죠!
지난 6일 오전 11시 서울 강서구의 국궁장 공항정(空港亭). 허리에 궁대를 맨 청년 3명이 한창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탱~.’ 한 청년이 쏜 화살이 145m 떨어진 가로세로 2m가량 과녁을 맞히고 떨어졌다. 성인 키보다 크지만 거리가 있어 손톱만 해 보인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50~60대 중장년들은 “오, 힘 좋은데” “폼 예쁘다”며 감탄했다.
직장인 강윤구(31)씨는 지난 5월부터 국궁을 배우기 시작했다. 직장 동료를 따라 ‘체험 활쏘기’를 하러 갔다가 국궁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살에 줄을 맨 뒤 수련하길 3개월. 드디어 최근 집궁례(執弓禮·정식으로 사대에 서는 날 치르는 예식)를 했다. 강씨는 “우리는 ‘활의 민족’ 아니냐”며 “국궁은 자신을 밀어붙이며 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힐링’ 느낌으로 즐기고 있다”고 했다.
체험을 위해 양해를 구하고 활시위를 당겨봤다. 활을 쏘기는커녕 당겨지지도 않았다. 사대와 과녁 사이에는 수풀이 무성했다. 대나무로 만든 전통 화살의 가격은 개당 4만원. 잃어버릴 것이 뻔해 들었던 활을 슬그머니 내려놨다.
공항정에 등록한 회원 150여 명 중 20~30대는 20명 남짓. 적어 보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동네 어르신 놀이터’ 정도로 인식돼 젊은층은 한 명도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또 다른 국궁장인 서울 중구 장충동 남산 석호정에서 활쏘기를 지도하고 있는 최종택 사범은 “4~5년 전에 비해 최근 특히 젊은층 문의가 2~3배 늘었다”고 했다.
◇경쟁? NO, 나와의 싸움
‘심신황홀불가필중(心神恍惚不可必中)’. 이날 찾은 국궁장 벽면엔 이런 문장이 걸려 있었다. ‘마음과 정신이 흐리멍덩하면 (활을) 맞힐 수 없다’는 뜻이다. 이기고자 하는 욕심이 강하면 맞힐 수 없고(호승지심심불가필중·好勝之心甚不可必中), 겁 먹고 나약한 마음이 생기면 맞힐 수 없다(겁유지심생불가필중·怯懦之心生不可必中)는 문장도 보였다.
젊은층은 국궁의 매력 중 하나로 ‘자신과의 싸움’을 꼽았다. 매 순간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학업과 취업 등의 경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아 나섰다는 것. 그런 만큼 혼자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골프는 4명, 테니스는 2명의 인원을 맞춰야 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친구 찾기 앱’까지 사용하며 함께할 상대를 찾는 이가 많다. 이 과정에서 ‘소개비’ 등의 돈이 들기도 한다.
이에 반해 국궁은 타인과 함께하는 건 물론 짬 날 때 언제든 혼자 활터를 찾아 연습할 수 있다. 역사학을 전공한 대학원생 김경준(32)씨는 “어릴 때부터 ‘주몽’ ‘불멸의 이순신’ 같은 사극을 즐겨 봤기 때문에 활쏘기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며 “일주일에 2~3번씩 짬 날 때 혼자 국궁장을 찾는다”고 했다.
‘고급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지만, 장비나 복장 등의 가격대가 높지 않다는 것도 장점. 입문자용 활은 10만~25만원대면 구매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문턱이 낮다. 정해진 복장이 없어 따로 옷을 살 필요도 없다. 노출이 심하거나 지나친 장식, 반바지, 러닝셔츠, 슬리퍼 차림을 피해 단정하게만 입으면 된다. 한 달에 5만원 안팎만 내면 국궁장 이용은 물론 교육까지 받을 수 있다.
대신 활터에서의 예법(禮法)을 중시한다. ‘국궁 9계훈’에는 ‘예의엄수(禮儀嚴守)’, ‘정심정기(正心正己·몸과 마음을 항상 바르게 한다)’, ‘불원승자(不怨勝者·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등이 있다. 활터에서는 나이가 많건 적건 ‘접장’ 칭호를 붙여가며 상호 존대를 한다. 그야말로 동방예의지국의 스포츠인 셈.
◇서울대·고려대 등 동아리 활동도
인기를 증명하듯 서울대나 고려대 등 전국 19개 대학에 국궁 동아리가 있다. 동아리 활동으로 국궁을 배우고 평생 취미로 삼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그래서 젊은층을 겨냥해 홍보용 소셜미디어 계정을 만드는 국궁장도 생겼다.
정세현(26)씨도 대학 국궁 동아리에서 처음 활쏘기를 배웠다. 정씨는 “동아리 임원을 하며 새내기 지원서를 많이 봤는데, ‘게임 속 궁사 캐릭터가 멋있어서 관심을 갖게 됐다’거나 ‘올림픽 여궁사들이 활 쏘는 모습에 반했다’는 내용이 많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옛것에서 역설적으로 신선함을 느끼는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주말을 호텔 대신 궁궐에서 보내는 ‘궁캉스’(궁+바캉스), 아이돌 굿즈 대신 고궁박물관 등의 기념품을 사 모으는 ‘뮷즈’(뮤지움+굿즈)와 더불어 활쏘기도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 공항정을 관리하는 윤서현 사두(射頭)는 “젊은이들이 국가무형문화재 국궁에 관심을 가져주니 뿌듯한 마음”이라며 “기술적인 측면뿐 아니라 유래 등 우리 고유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힘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