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고는 남고(男高)다. 그러나 졸업 앨범 사진에는 여자가 적지 않다. 분장하고 찍었기 때문이다. 아이(추사랑)부터 아이유까지. 전설의 시작은 2015년 ‘남자 김소현’이었다. 청순미의 상징, 포카리스웨트 광고 모델 김소현을 똑같이 따라 한 남학생. 그 황당한 패기가 온라인에 퍼지며 전국을 강타했다. 음료 제조사 측에서 “함박 웃음을 선사한 의정부고 김소현군을 찾는다”며 공개 수배령을 내리고, 실제 배우 김소현이 사진을 공유했다. 일반계 공립 고교 의정부고가 전국구로 발돋움한 순간이었다.
이제 이맘때만 되면 모두가 의정부고를 바라본다. 홍상수(불륜)·윌 스미스(폭행)·빈 살만(석유)…. 장르 불문 그해를 뒤흔든 화제의 인물을 코스프레해 졸업 앨범에 남기는 이 문화는 2009년 시작됐다. 졸업식이라는 다소 뻔하고 엄숙한 의식이 축제로 변모했다. 그 역사가 올해로 15년. 대국민 행사가 됐다. 2016년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의정부고 졸업 사진 레展드’ 전시가 열렸고, 2023년 졸업 앨범용으로 축구 선수 이승우의 골 세리머니를 코스프레한 학생은 수원FC 초청으로 시축을 하고 유명 TV 토크쇼에도 출연했다.
준비부터 진행까지 모두 학생들이 주도한다. 올해는 3학년 학생 절반 정도가 코스프레를 했다. “가장 비싼 재료는 가발”이라고 한다. 학생인지라 지갑은 얇지만, 핵심은 오히려 저가(低價)로도 발휘되는 재치다. ‘관종’이라 비하하는 삐딱한 시선도 존재한다. 학교 측의 제지로 전통이 끊길 뻔한 위기도 있었다. 학생회 측은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소재는 자발적으로 피했다”고 했다. 과거 고승덕 전 서울시장 후보의 “딸아 미안하다” 유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논에 물 주는 장면 등의 패러디로 항의가 빗발치고 고발까지 제기됐던 전례 때문이다. 그럼, 올해 앨범을 펴보자.
◇올해 ‘작품’으로 돌아본 상반기 이슈
1월ㅣ경제ㅣ’재드래곤’의 비상
표정만으로도 코스프레가 가능하다. 가장 경제적인 장면. 정확히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이 주요 그룹 총수 등과 부산 전통시장을 방문했을 당시 동행했던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때 “이름 부르지 말아주세요”라며 익살스러운 ‘쉿’ 제스처를 취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의 이례적 ‘꾸러기’ 표정은 곧장 새해의 밈으로 떠올랐다. 다만 이 학생의 경우 가수 이상순을 더 닮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비교할 수 없는 재력, 그러나 사진 한 장의 반전 매력은 위력이 상당했다. ‘재드래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치솟았다. 여론조사 기관 데이터앤리서치가 웹사이트 23만개의 1분기 빅데이터를 분석해 지난 5월 ‘대기업 총수 관심도’를 발표했다. 1위는 총 7만1089건의 온라인 정보량을 기록한 이재용 회장 차지였다.
2월ㅣ영화ㅣ무덤 팠더니 돈 와르르
올해 첫 1000만 영화는 지난 2월 개봉한 공포 영화 ‘파묘’였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파묘’는 관객 1191만명을 모아 상반기 매출 1위(1151억원)도 거머쥐었다. 매출 1100억원(관객 1150만명)을 기록한 ‘범죄도시4′를 2위로 밀어냈다. 무덤을 파내자 ‘험한 것’이 나왔다는 섬뜩한 소재, 무당으로 변신한 미녀 배우 김고은, 온몸을 한문 문신으로 도배한 이도현의 파격 분장은 코스프레를 부추기는 강력한 동기였다.
다만 ‘일제의 쇠말뚝 박기’라는 풍수침략론을 꺼내든 탓에 뜻밖의 ‘반일’ 논란을 낳기도 했다. 민족 감정에 올라타려는 ‘국뽕 영화’라는 꼬리표가 달리기도 했다. 대작의 냄새를 풍기다 종국에는 괴물과 싸우는 격투 영화가 돼버린 비운의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3월ㅣ사회ㅣ푸바오와 강바오
미련한 짐승 한 마리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한국에서 자연 번식으로 태어난 최초의 판다, 네 살짜리 암컷 푸바오. ‘에버랜드’ 스타로 군림하며 모기업 삼성물산 명예 사원증까지 발급받은 최연소 삼성 직원. 지난 3월 3일 일반 공개를 마지막으로 푸바오는 한 달간 격리에 들어갔고, 4월 3일 전세기를 타고 영영 중국으로 떠났다. 푸바오를 배웅하려는 팬 6000여 명이 몰려 흐느끼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푸씨(氏) 옆에는 늘 사육사 강철원, ‘강바오’가 있었다. 반환 전날 갑작스러운 모친상을 치렀음에도 다음 날 푸바오와 중국까지 동행할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푸바오와의 마지막 3개월을 다룬 영화 ‘안녕, 할부지’가 다음 달 개봉한다. 지난달 강바오는 중국으로 건너가 푸바오와 재회했다. 다만 예상했던 드라마는 없었다.
4월ㅣ가요ㅣ전설이 된 기자회견
총선이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던 지난 4월 25일, 서초동에서는 두 시간짜리 짜릿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걸그룹 ‘뉴진스’를 키운 연예기획사 어도어 대표 민희진이 모기업이자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 하이브 대표 방시혁과의 ‘맞다이’를 선언한 날. 요지는 민 대표가 경영권 탈취를 계획했다는 하이브 측의 전날 발표에 대한 전격 부인이었다. 희대의 집안싸움은 여러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됐고 최대 수만 명의 동시 시청자 수를 기록했다.
이날 방 대표가 민 대표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에스파 밟으실 수 있죠?’) 등 희대의 명대사가 속출했는데, 압권은 “××새끼들이 너무 많다” 같은 민 대표의 욕설이었다. 대중은 진실공방보다 이 화법에 열광했고, 잘나가는 여성 CEO의 헐렁한 패션에 더 매료됐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 기현상이었다.
5월ㅣ방송ㅣ선재 업고, 어디까지 튀어?
톱스타의 돌연사, 그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2008년으로 돌아가는 열성팬. 5월 28일 두 달간 방영을 끝낸 웹소설 원작의 로맨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는 스토리만 탄탄하면 톱스타 없이도 뜰 수 있다는 흥행 문법의 재확인이었다. 동남아에서도 신드롬급 인기를 끌었고, 최근 출간된 대본집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오를 정도로 뜨겁다.
코스프레 학생은 여주인공, 등에 업은 등신대가 ‘선재’다. ‘선재’ 역의 배우 변우석(33)은 말 그대로 벼락 스타가 됐다. ‘황제 경호’ 논란까지 벌어졌다. 지난달 홍콩 팬 미팅 참석차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변우석을 경호하던 사설 직원들이 일반 탑승객들의 에스컬레이터 사용을 통제하고 여권·탑승권을 검사하는 유난을 떨더니, 강한 플래시까지 발사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이 사설 경비 업체를 고소했다.
6월ㅣ환경ㅣ러브버그 전국 출몰
‘붉은등우단털파리’는 징그럽지만 ‘러브버그’라 부르면 달라진다. 러브, 그러니까 암수가 엉덩이를 맞붙인 다소 민망한 자세로 날아다니는 벌레. 주로 중국 남부나 대만 등 아열대기후에서 서식하는 이 까만 곤충은 지난해 처음 서울에서 발견됐고, 올해 서울 및 경기·인천까지 확산했다. 한반도 기후가 아열대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사람에게 무해하고 진드기 같은 해충을 잡아먹는다. 유충은 흙바닥에서 낙엽과 유기물을 분해한다. 익충(益蟲)이다. 다만 민원이 급증하자 해충의 범위를 ‘감염병’에서 ‘불편’ 유발 곤충으로 넓히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시의회는 늘어난 러브버그의 방제 작업에 착수할 수 있도록 러브버그를 해충으로 지정하는 조례 정비를 다음 달 진행할 계획이다.
7월ㅣ스포츠ㅣ페이커, 神이 된 사나이
작은 체구, 더벅머리, 동글이 안경, 무표정. 그러나 숭배의 대상이다. 12년 차 프로게이머 페이커(본명 이상혁·28)는 이제 입신의 경지에 들어섰다. E스포츠를 ‘오락’에서 ‘문화’로 끌어올린 주역.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로 10년째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다. 또 하나의 금자탑을 세웠다.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E스포츠 월드컵’에서 중국을 꺾고 초대 우승(팀 ‘T1′)을 차지한 것이다. 초대 MVP도 페이커의 몫이었다. 최근 ‘리그 오브 레전드’ 전설의 전당 1호로 헌액되고, 그의 업적을 되돌아보는 공간 ‘페이커 신전(神殿)’이 서울 중구에서 운영되는 등 그의 신격화는 계속되고 있다.
◇日 수재들의 엉뚱발랄 졸업식
지난 3월 26일, 일본 국립 교토대학교 교정에 나란히 들어선 세 사람이 단박에 시선을 강탈했다. 백발(가발)에 흰 수염을 붙인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그가 3월에 거머쥔 미국 아카데미상 황금색 트로피(쫄쫄이옷), 수상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등장하는 왜가리(가면) 트리오였기 때문이다. 분장이 다소 어설퍼 더 웃기는 외양. 모두 이날 졸업하는 교토대 학생들이었다. 만화영화 ‘미니언즈’,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코스프레를 한 학생 등이 속속 교문을 통과했다. 한 졸업생은 “오늘 TV 화면에 잡히는 것만을 목적으로 졸업식에 왔다”고 말했다.
한국에 의정부고가 있다면, 일본에는 교토대가 있다. ‘졸업식 코스프레’의 원조. 1990년대부터 이 같은 전통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졸업식 의상은 대개 정장이나 기모노지만, 여기서는 얘기가 다르다. 엄숙함 대신 재미를 택한 것이다. 포켓몬스터·도라에몽 등 만화 주인공부터 루브르 박물관의 보물 ‘모나리자’, 성인 용품, 예수,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 등 전 세계 정치인까지 취향도 가지각색. 2017년에는 한국 대통령(박근혜) 코스프레도 등장했다. 한 일본인은 “이런 관습이 공인돼 ‘올해도 벌써 이 시기가 왔구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코스프레’는 유명인 복장을 흉내 내는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일본식 발음이다.
교토대는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를 비롯해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만 8명을 배출한 명문 대학이다. 세계적 석학의 요람에서 학생들이 작정하고 망가지는 이유, 바로 이 대학을 상징하는 ‘자유의 학풍’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교토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대학 기본 이념은 이러하다. “창립 이래 구축해 온 자유의 학풍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다원적 과제 해결에 도전해 지구 사회의 조화로운 공존에 공헌….” 다만 높은 자율성을 추구하는 까닭에 유급률도 높은 편이라고 한다.
교토시립예술대학은 ‘졸업식 코스프레’ 분야의 신흥 강자. 현재 일본 현대미술계를 주름 잡는 조각가 코헤이 나와의 모교이기도 하다. 학위 수여식 단상에 E.T 차림으로 올라온 학생 사진 등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대학 측은 “올해 졸업식과 학위 수여식은 예년과 같이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학생들이 참석한 우리 대학 특유의 화기애애한 행사였으며 장내에 웃음이 넘쳤다”고 소개했다. 지난 3월 1일 국립 가나자와대 졸업식도 화제였다. 직접 제작한 우주복을 입은 채 중력을 거슬러 단상에 오르는 학생은 그나마 얌전한 편. 경건한 장내 분위기와 배치되는 ‘삼각 김밥’이 졸업장을 받으러 걸어나갈 때에는 폭소를 참으려 애쓰는 다른 졸업생들 얼굴이 중계 화면에 잡히기도 했다. 졸업은 새 시작을 의미한다. 웃으면 더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