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르노(Livorno)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여행객에게 가장 외면당하는 도시다. 해마다 관광객 2500만명이 토스카나를 찾지만 리보르노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토스카나 최대 항구로 지중해 크루즈의 주요 기항지지만, 크루즈 탑승객들은 피렌체·피사·산지미냐노 등 토스카나의 세계적 관광지로 직항할 뿐 리보르노는 둘러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리보르노, 무시할 도시가 아니다. 메디치 가문이 통치를 시작한 16세기부터 400여 년간 리보르노는 지중해에서 가장 번성한 무역항이었다. 적대국 선박들이 교대로 부두에 배를 댔고, 그리스·스페인·영국·네덜란드·스웨덴·아랍·유대인 등 모든 사람이 인종·종교·국적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 코스모폴리스였다.

정치·종교적 관용과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리보르노는 유럽의 상업·지식·문화·예술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제정 러시아 시인 예브게니 바라틴스키는 서정시 ‘증기선’에서 “내일 나는 리보르노를 볼 것이다/ 내일 나는 지상의 극락을 볼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상륙 직전의 들뜬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과거 리보르노는 이탈리아 대표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학자·문인의 고향이자, 모차르트의 미완성 오페라 ‘속은 신랑’의 배경이며, ‘그랜드 투어’에 나선 영국·독일 귀족들이 빠지지 않고 찾는 목적지였다. 오늘날 리보르노는 시끌벅적한 이른바 오버투어리즘으로 제 모습을 잃은 피렌체나 피사와 달리, 토스카나 사람들의 일상을 고요하게 엿볼 수 있는 여행지다.

메디치 가문이 리보르노 방어를 위해 세운 ‘포르테차 누오바’ 요새./리보르노 관광사무소

◇메디치가 만든 ‘지중해의 뉴욕’

리보르노의 출발은 작은 요새였다. 20여km 북쪽에 있는 피사를 방어할 목적으로 1017년 토스카나 해안에 세워졌고, 수백 년간 피사의 지배를 받았다. 1404년 해전에서 피사 함대를 전멸시킨 제노바에 넘겨진 리보르노는 잠시 밀라노 소유였다가 1421년 피렌체에 매각됐다.

리보르노의 전성기는 메디치 덕분이다. 피렌체를 넘어 토스카나 전체를 거머쥔 메디치 가문은 리보르노를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했다. 리보르노로 들여오는 모든 상품은 세금이 면제됐다. 1590년 페르디난도 1세 메치디 대공(大公)은 무역과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레지 리보르니네(Leggi Livornine)’라는 법을 선포했다. 레지 리보르니네는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 국제무역법으로 인정받았다.

페르디난도 대공은 종교의 자유도 허락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많은 유대인 이민자가 몰려들었다. 종교적 관용은 오래 유지됐다. 이탈리아 영토에서 유대인 게토(강제 거주 지역)가 끝까지 세워지지 않은 도시는 리보르노가 유일하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에서 박해받던 개신교도,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도 몰려왔다. 이들이 가져온 부와 지식으로 리보르노는 유럽에서 가장 계몽된 도시이자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 급성장했다. 리보르노 주민들은 “과거 리보르노는 오늘날의 뉴욕과 같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리보르노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대표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 리보르노 시립미술관 모딜리아니 컬렉션이 볼 만하다.

리보르노의 몰락은 나폴레옹이 촉발했다. 나폴레옹은 숙적 영국을 꺾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영국과의 교역 금지는 리보르노 경제를 심각하게 타격했다. 1868년 도시·지역 국가로 쪼개져 있던 이탈리아가 통일에 성공했다. 통일은 리보르노에는 재앙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리보르노의 자유무역항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은 치명타였다. 지금도 이탈리아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리보르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주요 군항(軍港)이었다. 연합군은 본토 침공에 앞서 리보르노를 집중 폭격했다. 역사적 건물들과 유서 깊은 지역들이 파괴됐다. 리보르노 시민들은 “신중한 계획 없이 빠른 전후 재건을 목표로 지역과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급하게 신축됐다”며 “리보르노가 과거의 우아한 모습을 영영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베네치아 누오바’ 지역 운하를 누비는 보트 투어./리보르노 관광사무소

◇‘새로운 베네치아’ 운하 누비는 보트 투어

항구 도시 리보르노를 이해하기에 이상적인 눈높이는 배 위에 있다. 운하가 씨줄과 날줄로 도시 전체를 촘촘하게 관통한다. 20여 명이 탈 수 있는 작은 배로 이 운하를 돌면서 리보르노를 둘러보는 보트 투어가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영어 가이드는 있지만 아쉽게도 한국어는 아직 없다.

보트 투어는 대개 리보르노항 중심 ‘콰트로 모리(Quattro Mori)’ 조각상 앞 정박장에서 출발한다. ‘네 무어인(Four Moors)’이란 뜻이다. 과거 지중해에는 해적이 들끓었다. 해적들은 북아프리카 출신 이슬람교도를 뜻하는 무어인이 많았다. 페르디난도 1세 메디치 대공이 기독교도 무역선을 약탈하던 해적단 소탕 성공을 기리기 위해 1587년 세워졌다.

그래픽=송윤혜

눈부시게 흰 카라라 대리석을 깎아 만든 페르디난도 대공이 가운데 우뚝 서 있고, 그 아래 쇠사슬에 묶여 무릎 꿇은 무어인 넷은 청동으로 주조됐다. 주인공은 대공이건만 어찌된 건지 리보르노 사람들은 콰트로 모리라고 부른다. 조각상 앞에서 만난 리보르노 주민은 “조각상 주위를 돌다 보면 네 무어인의 코가 모두 보이는 지점이 딱 하나”라며 “이 지점을 찾으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다”고 했다. “대체 그 지점이 어디냐”고 묻자 알려주지도 않고 씩 웃더니 갈 길을 갔다. 그도 모른다에 500원을 걸겠다.

리보르노 항구 중심에 서 있는 '콰트로 모리' 조각상./리보르노 관광사무소

정박장을 출발한 보트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운하 입구로 향했다. 눈앞에 ‘포르테차 베키아(Fortezza Vecchia)’가 나타났다. ‘옛 요새’란 뜻이다. 메디치 가문이 리보르노를 지키는 동시에 감시하려고 건설한 첫 군사시설이다. 별다른 장식 없이 붉은 벽돌을 투박하게 쌓아 올려 굳건해 보였다.

운하가 차츰 좁아지면서 ‘베네치아 누오바(Venezia Nuova)’ 지역에 들어섰다. ‘새 베네치아’란 뜻. 리보르노 시민들은 그저 ‘베네치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국 상인이 몰려들자 상업과 거주할 공간이 부족해졌다. 메디치 가문은 베네치아처럼 인공적으로 땅을 늘리기로 했다. 스카우트해 온 베네치아 기술자들은 바다에 나무 말뚝 수천 개를 박아 섬을 만들었다.

이 인공 섬에 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 가톨릭 교도와 영국·네덜란드·독일 개신교,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 유대인, 오토만제국 출신 무슬림 상인들이 모여 창고와 사무실을 갖춘 커다란 무역 상사 건물을 지었다. 각자 신앙에 따라 성당, 교회, 시나고그, 모스크도 세웠다. 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많은 건물이 파괴됐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운하가 촘촘하게 꿰고 있는 베네치아 누오바 지역./리보르노 관광사무소

다행히 리보르노 바로크 양식을 잘 보여주는 ‘산페르디난도 교회’, 팔각 돔 지붕이 인상적인 ‘산타카테리나 교회’, 독일 함부르크 출신 무역상 안토니오 후이겐스(Huigens)가 주도해 세운 ‘팔라초 후이겐스’, 몰락한 리보르노 시민들이 찾던 전당포 ‘몬테 디 피에타 팔라초’, 어시장에 이어 창고로 사용됐던 ‘페셰리아 누오바’ 등은 남아 있다. 전성기 리보르노의 영광을 엿볼 수 있다. 테마파크처럼 관광객만 북적대는 베네치아와 달리 주민들의 예전 생활 모습을 만나게 된다.

보트가 베네치아 누오바를 빠져나오면 ‘포르테차 누오바(Fortezza Nuova)’가 모습을 드러낸다. 리보르노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이 포르테차 베키아에 이어 추가로 쌓은 ‘새로운 요새’. 위에서 내려다보면 오각형의 인공 섬이다. 창고, 병참 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모두 파괴되고 성곽만 남았다. 성곽 안쪽으로 잔디가 자라면서 지금은 공원이 됐다. 리보르노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는 곳이자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장으로 쓰인다고.

19세기 재건축된 ‘메르카토 베토발리에’ 외관./리보르노 관광사무소

◇중앙 시장에서 맛보는 카추코·체치·폰체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 아래를 관통하는 운하인 ‘카날레 소토(Canale Sotto)’를 빠져나오자 리보르노에서 가장 큰 시장인 ‘메르카토 베토발리에(Mercato delle Vettovaglie)’가 보였다. 베토발리에는 ‘군 보급 물자’라는 뜻으로, 토스카나 대공국 군대를 먹일 보급품 납품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메르카토 첸트랄레(중앙 시장)’로도 불린다. 현재 시장은 19세기에 재건축된 모습이다. 당시 최첨단 건축 소재였던 주철을 활용해 조화롭게 융합된 신고전주의와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졌다.

시장에 들어서자 해산물과 육류, 채소, 향신료 냄새로 가득했다. 리보르노 전통 음식도 맛볼 수 있다. 다양한 인종·종교·국적의 공동체가 평화롭게 공존한 역사가 음식에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세기 튀르키예 이민자가 만든 리보르노 대표 음식 '카추코'./리보르노 관광사무소

자타가 인정하는 리보르노 대표 음식인 ‘카추코(cacciucco)’는 튀르키예 출신 아흐메트(Ahmet)가 개발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600년대 리보르노에 정착해 식당을 연 아흐메트는 어머니의 레시피에서 케이퍼를 빼는 대신 아메리카에서 새롭게 들여온 토마토를 추가한 해산물 요리를 팔았다.

카추코는 ‘작다’는 뜻의 튀르키예 말 ‘쿠추크’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아흐메트는 음식 값을 최대한 낮추려고 값싼 작은 생선만 썼다. “큰 생선도 좀 사라”는 생선 장수들을 향해 아흐메트는 “쿠추크, 쿠추크”를 반복했다고 한다.

리보르노에는 “카추코라는 단어에 있는 C의 숫자만큼 다양한 생선이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는 말이 있다. 식당과 가정마다 레시피가 다르지만 붉은쏨뱅이, 노랑씬뱅이, 대구, 아귀 등 각종 생선에 문어, 새우, 홍합이 더해진다. 여기에 토마토와 마늘, 세이지, 고춧가루, 와인으로 양념해 졸이듯 푹 끓인다. 우묵한 접시에 빵 여러 조각을 깔고 카추코를 얹어 낸다. 프랑스 부야베스와 비슷하지만 훨씬 진하고 강렬한 풍미다. 한국의 아귀찜이 연상되는 맛이다.

병아리콩을 오븐에 구운 ‘토르타 디 체치’를 빵에 끼운 ‘친케 에 친케’ 샌드위치./리보르노 관광사무소

‘토르타 디 체치(torta di ceci)’는 병아리콩 가루를 물과 올리브오일로 반죽해 화덕에 얇게 구워낸 음식이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구수하다. 우리 빈대떡과 비슷한 맛이다. 제노바 선원들에 의해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리보르노항에 들어오던 제노바 선박을 커다란 파도가 덮쳤다. 푸대에 담겨 있던 병아리콩 가루가 바닷물에 젖었다. 그 위로 기름통이 엎어졌다. 선원들은 바닷물과 기름에 흠뻑 젖은 병아리콩 가루를 버리기 아까워 갑판에 펼쳐놓았다. 다음 날 아침, 햇볕에 바싹 마른 병아리콩을 배고픈 선원들이 먹었다. 예상 외로 맛이 괜찮았다. 이것이 리보르노에 퍼지면서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빵 사이에 끼워 샌드위치로 먹기도 한다. ‘친케 에 친케(5e5)’라고 부른다. 체치와 빵이 각각 50센트, 즉 0.5유로(약 750원)로, 값싸게 허기를 때울 수 있는 간식이란 소리다. 맛은 가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폰체(ponce)’는 영국 선원들이 마시던 펀치(punch)를 리보르노식으로 변형한 음료다. 에스프레소와 럼주를 섞는다. 1890년 문 연 유서 깊은 카페 ‘바 치빌리(Bar Civili)’에서 처음 만들었다. 모딜리아니는 이 카페에서 폰체를 홀짝이곤 했다고 한다.

‘프라테(frate)’는 고리 모양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겨 설탕을 묻힌 도넛으로, 한국 꽈배기와 비슷한 가볍고 쫄깃한 맛이다. 리보르노 거리 어디서나 쉽게 사 먹을 수 있다.

한국 꽈배기와 비슷한 튀김 도넛 '프라테'./리보르노 관광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