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혀 있었던 솟을대문
고종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서울 운현궁에는 수수께끼 같은 문이 하나 있다. 대원군이 사무실로 쓰던 사랑채 노안당(老安堂) 솟을대문이다. 1993년부터 3년 동안 운현궁 중수 공사를 한 서울시는 1996년 ‘운현궁 중수 공사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에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보인다.
‘노안당 서행각: 중문은 두 짝 판문으로 되어 있는데 특이한 점은 문짝이 열리는 방향이 일반적인 문과는 반대 방향, 즉 문짝이 노안당 쪽 기둥열에 달려 있고 들어서는 방향인 서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앞 보고서, p119)
쉽게 말하면 노안당 출입문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잠그게 돼 있었다는 말이다. 밖에서 문을 잠가버리면 내부에서는 나올 수가 없고 ‘갇힌’ 꼴이 돼 버린다. 아래 ‘노안당 서행각 보수 전 평면도’를 보면 오른쪽 아래에 있는 대문이 바깥으로 열리는 구조로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수 공사를 진행하면서 운현궁 정비 자문위원회에서 심한 논쟁이 있었다. 역사학계에서는 그 자체가 역사이니 거꾸로 놔두자고 했고 고건축학계에서는 바로잡아야 한국미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격론 끝에 노안당 솟을대문은 ‘고유의 한국미를 위해’ 바로 세우기로 결론이 났다.(류시원, ‘풍운의 한말 역사 산책’, 한국문원, 1996, p140) 아래 보수 공사 전후 솟을대문 사진을 비교하면 대문틀 자체를 180도로 돌려서 안팎을 바꿔놓은 문을 확인할 수 있다.
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천하의 대원군 이하응은 갇혀 지내야 했을까. 150년 전 그날로 가본다.
익성군 입궐과 ‘대원위 분부’
음력 1863년 12월 13일(양력 1864년 1월 16일) 서울 운현 고개 아래 살던 전주 이씨 소년 명복(命福)이 익성군에 책봉됐다. 나이는 열두 살이었고, 아버지는 이하응이다. 명복은 이날로 아명을 버리고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12월 18일 재황은 조선 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재황이라는 이름도 버렸다. 새 이름은 형(㷩)이다. 또 닷새가 지난 12월 23일 조대비는 왕실 친족을 관리하는 종친부(宗親府)에 기존 예산에 더해 매년 돈 4000냥과 베와 무명 각각 10동(同: 500필)을 보내라고 담당 부서인 선혜청에 분부했다.(1863년 12월 23일 ‘고종실록’)
이 종친부 수장이 현직 왕의 살아 있는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신분인지라 조정에서는 대원군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왕족 관리 기관이던 종친부는 실질적인 권력자 흥선대원군의 권력 행사 기관으로 바뀌었다.
종친부 관련 문서인 ‘종친부등록’에는 ‘대원위 분부’라는 이름으로 종친부에서 내려간 지시사항들이 기록돼 있다. ‘대원위 분부’ 문서로 내려간 조치는 무단 토호와 서원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김병우, ‘대원군의 종친부 강화와 대원위분부’, 진단학보 96, 진단학회, 2003) 이 같은 법외적 권력을 휘두르는 대원군을 영의정 김병학은 이렇게 평가했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건지려고 고심하여 곳곳을 바로잡았다.’(1869년 6월 8일 ‘일성록’) 이게 훗날 운현궁 사랑채 솟을대문이 뒤집혀버리는 먼 원인이었다.
‘본궁(本宮)’ 운현궁, 경근문과 공근문
고종 등극 이후 그가 태어난 집은 서쪽과 남쪽으로 대규모로 확장됐다. 대원군 집무실인 사랑채 노안당, 안채 노락당, 이로당 등 궐내 건물에 버금가는 건물들이 신축됐다. 1864년 3월 24일 노안당이 완공됐다.(‘노안당 상량문’) 안채인 노락당도 함께 완공됐다. 운현궁은 동쪽으로는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금위영(禁衛營)과 담장이 맞붙어 있었다.
6월 6일 고종은 운현궁 동쪽과 금위영 서쪽 담장에 문을 만들라고 명했다. 명목상 목적은 ‘대궐에서 행차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1864년 6월 6일 ‘고종실록’)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나와서 운현궁으로 가려면 민가 사이에 난 길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고종은 창덕궁 맞은편에 있는 금위영을 가로질러 운현궁으로 직접 통하는 문을 만들라고 명했다.
9월 1일 고종은 ‘외문(外門)’은 ‘경근문(敬覲門)’, ‘내문(內門)’은 ‘공근문(恭覲門)’으로 부르라고 명했다. 금위영 서쪽 담장과 운현궁 동쪽 담장 사이에 문이 건설됐다. 9월 22일 문이 완공되고 이틀 뒤 이 문을 통해 고종과 조대비가 운현궁으로 행차했다.(1864년 9월 22일, 24일 ‘승정원일기’) 고종은 이날 문을 만든 공무원들을 포상헀다.
운현궁은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본궁(本宮)’으로 기록돼 있다. 예컨대 1865년 4월 6일 고종은 ‘창덕궁 돈화문(敦化門)을 나와서 경근문(敬覲門)과 공근문(恭覲門)을 거쳐 ‘본궁(本宮)’ 중문 밖에서 가마에서 내린 뒤 ‘본궁’으로 들어갔다.’(1865년 4월 6일 ‘승정원일기’)
그래서 경근문과 공근문 가운데 ‘경근문’은 ‘본궁의 외문’이고 공근문은 ‘본궁의 내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문 이름의 주체는 고종이 아니라 본궁의 주인, 대원군이다.
두 문은 대대적인 운현궁 신축 공사가 끝난 뒤 신축 지시가 떨어졌다. 완공은 고종 즉위 후 10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그러니까 종친부를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대원군이 남의 눈을 피해 입궐과 퇴궐을 할 때 이용했던 문이다. 경복궁이 완공될 때까지 고종이 본궁으로 행차할 때도 창덕궁 돈화문~금위영 대문~경근문~공근문을 통해 본궁 중문 앞까지 와서 가마에서 내리곤 했다.
고종 집권 8년째인 1871년 1월 대원군은 ‘밤중에’ 대궐에 가서 조대비를 만나 인사 문제를 상담하기도 했다.(1871년 1월 3일 ‘고종실록’)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국왕 생부가 야밤에 대비를 만나려면 군부대를 관통하는 전용 통로를 이용해야 가능했다. 그리고 이 같은 초법적인 행동이 역시 노안당 솟을대문이 뒤집힌 이유이기도 했다.
고종 친정과 권력투쟁
1866년 2월 13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고종의 친정을 선언했다.(1866년 2월 13일 ‘고종실록’) 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여전히 대원군이 가지고 있었다.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고 만동묘를 없애버리고 군비를 강화하고 양반에게 세금을 거두며 권력을 휘둘렀다. 세도정치 시대 모순을 제거하는 그 모습에 긴장한 권력자들은 고종에게 끊임없이 대원군 제거를 요구했다.
1872년 겨울 노론계 중진 최익현이 ‘재정을 파탄시킨 경복궁 공사를 중단하고 만동묘를 복원하고 서원을 복원하라’고 상소문을 올렸다.(1872년 10월 10일, 11월 3일 ‘고종실록’) 대원군의 권력 행사를 금지하라는 공개적인 요구였다. 최익현에게 자극을 받은 고종은 바로 다음 날 심야에 대궐을 찾아온 대신들 앞에서 친정을 선언했다.(1872년 11월 4, 5일 ‘고종실록’) 이미 법적으로 6년 전 이뤄진 친정 체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세간에는 “이날 대원군이 입궐할 때 이용하는 공근문이 폐쇄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해가 바뀌고 1874년 7월 28일 고종은 대원군이 설치했던 강화도 군부대 진무영 축소를 선언했다.(1874년 7월 28일 ‘고종실록’) 대원군은 즉각 대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항의한 뒤 양주(현 의정부) 직곡산장으로 은둔해버렸다. 대원군을 복귀시키라는 친대원군파 상소가 이어졌다. 1875년 6월 18일 영남 유생들이 대원군을 복귀시키라고 집단 상소했다. 고종은 대표 상소자 4명의 목을 베라고 명하고 옥에 가뒀다.(1875년 6월 18일 ‘고종실록’) 나흘 뒤 고종은 이들의 처형 집행을 명했다. 참수령이 떨어진 그날, 대원군은 직곡산장을 출발해 빗속에 대궐로 들어가 아들 고종에게 머리를 숙였다.(박주대, ‘나암수록’ 2, 국사편찬위, p153)
이후 대원군이 입궐했다는 기록은 정사는 물론 야사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들 고종은 이후에도 금위영과 경근문과 공근문을 거쳐 본궁인 운현궁에 가서 할아버지 남연군 사당에 참배하곤 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친정 선언 후 고종이 운현궁을 찾은 횟수는 모두 8회다. 그런데 이 경로에 ‘경근문’은 있지만 ‘공근문’이 포함된 기록은 2회밖에 없다. 맞붙은 문임에도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공근문이 대원군이 입궐할 때 사용했던 내문임을 감안한다면, 대원군의 존재에 대한 의도적 무시가 아닐까.
‘각별한 예우 규정’
1882년 6월 하급 군인들의 반란인 ‘임오군란’이 벌어졌다. 고종 세력은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했고 오장경을 사령관으로 한 청나라군이 왕십리와 이태원에서 이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그 배후 인물이 대원군이라는 고종 측 주장에 따라 대원군을 납치해 청나라로 끌고 갔다.(1882년 7월 13일 ‘고종실록’) 1885년 대원군이 귀국했다. 아들 고종이 남대문까지 나가서 아비를 맞이했다. 고종은 “각별한 분이니 예조에서 예절 절차를 마련하라”고 명했다.(1885년 8월 27일 ‘고종실록’)
바로 다음 날 고종은 임오군란을 주도했던 김춘영과 이영식의 능지처사형을 집행하고 토막 난 시신을 거리에 버렸다.(1885년 8월 28일 ‘일성록’ 등) 당시 조정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는 “충효를 모두 저버리는 소행”이라고 비난했다.(‘청광서조중일교섭사료’ 407-2 ‘원세개가 이홍장에게 보내는 편지’)
9월 10일 예조에서 ‘각별한 예우’ 규정을 발표했다. 첫째, 대문 밖에 하마비(下馬碑·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표지)를 설치할 것. 둘째, 대문에 가로잠금목[橫杠木·횡강목]을 설치할 것. 셋째, 대문에는 24시간 습독관이 숙직할 것. 넷째, 조정 신하들은 사적으로 대원군을 만나지 말 것.(1885년 9월 10일 ‘고종실록’)
저 두번째 ‘예우’ 규정에 따라 탄생한 돌연변이 대문이 복원 전 노안당 솟을대문이다. 아예 대문짝을 통째로 돌려버려 잠금목을 바깥으로 내버린 것이다.
세월 속에 운현궁 영역은 이리저리 팔려나갔다. 현 덕성여대 부지에 있던 경근문과 공근문은 사라졌다. 안국역쪽 벽면에 있는 문 흔적이 이 경근문과 공근문 흔적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아니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경로와 맞지 않는다.(송명희, ‘운현궁의 건축요소와 공간구성의 조영체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학위논문, 2013) 세우라던 하마비 대신 하마석은 남아 있다. 24시간 관리가 숙직하던 수직사도 남아 있다. 20세기 말 대한민국 고건축 전문가들 골치를 썩게 만들었던 그 역사가 대문에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