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찍힌 영상 하나가 삽시간에 퍼졌다. BTS의 아버지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미국 LA에서 두 명의 20대 여성과 길을 건너는 장면이었다. 그는 포즈를 취하는 그 여성의 사진을 무릎을 굽혀가면서 정성 들여 찍어줬다.
굉장히 오랜만에 방 의장이 카메라에 포착된 것만으로도 관심을 끌 만했지만 사람들은 옆 여성의 정체를 더 궁금해했다. 톱스타도, 그렇다고 BTS에서 키우고 있는 연습생도 아니었다. 그녀의 직업은 BJ. 세상을 시끄럽게 한 민희진 사태 때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방 의장이 미국에서, 그것도 400억원짜리 자택이 있는 베벌리힐스 근처에서, 그것도 BJ를 만나고 다닌다니. 오 마이 갓일 수밖에. 인터넷에선 별 얘기가 다 나왔다.
신비주의를 이어가던 방 의장 사생활이 노출되자 하이브는 서둘러 해명했다. “지인이 여행 와서 도와줬을 뿐.” 도대체 BJ가 뭐길래. 아무나 쉽게 만나지 못하는 BTS의 아버지와 식사를 하고, 그의 에스코트까지 받는단 말인가. 하지만 BJ 세계에선 이런 말도 나왔다. “1티어(1등급이란 의미의 인터넷 용어) BJ니까 방시혁 정도는 만날 수 있지.”
◇화려한 삶
일반인들은 BJ의 세계를 잘 모른다. 하루에 1억을 벌었네, 한 달에 10억을 벌었네, 일 년에 100억을 벌었네란 뉴스를 보긴 하지만, 딴 나라 얘긴가 보다 하고 귀를 닫는다. “돈을 버는 쪽이나 돈을 퍼주는 쪽이나 진짜 특이하다, 특이해”라고 생각하며.
BJ란 단어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한마디로 콩글리시. ‘Broadcasting Jockey(방송 자키)’ 아프리카TV라는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처음엔 방장(房長·Bang Jang)의 줄인 말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외국에선 크리에이터, 스트리머 같은 단어로 통칭되는데, 한국에선 유튜브와 함께 큰 시장으로 꼽히는 아프리카TV 영향력이 큰 만큼 그곳에서 시작된 BJ를 계속 쓰고 있다.
BJ 시장은 어마어마한 규모다. 과거처럼 ‘할 일도 없는데 방송 한번 해볼까?’로 시작했다가는 큰코다친다. BJ 데뷔를 위한 학원도 있고 매니지먼트도 따로 있다. 아프리카TV뿐 아니라 개인 방송 플랫폼도 넘쳐난다. 각 플랫폼에선 여성 BJ, 여캠의 노출 수위도 다르다. 작년 말 논란이 된 벗방(벗는 방송)을 한 7급 공무원은 P플랫폼에서 활동, 얼굴을 드러내고 주요 신체 부위를 노출했다. 이 BJ는 당시 정직 3개월 징계를 받았다.
BJ가 활개 치는 이유는 결국 돈이다. 각종 논란에 휘말린 연예인이 돈벌이가 쉽지 않자 BJ로 전직해 하루 수백, 수천만 원을 번다는 얘기도 공개된다. 이병헌 협박녀로 알려진 걸그룹 출신은 개명하고 BJ로 데뷔, 1년에 별풍선만으로 24억원을 벌었다. 연 10억원 넘게 버는 BJ는 수두룩하다. 잘나가는 BJ들은 보여주기라도 하듯 명품을 플렉스하고, 수퍼카를 타고, 수백·수천만 원짜리 선물을 주고받는다.
이번에 방시혁 의장과 포착된 ‘BJ과즙세연’도 작년에 30억원을 벌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옷을 입고 섹시 댄스를 추면서다. 방 의장과 함께 있던 과즙세연의 친언니도 과거 BJ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즙세연은 미국 여행 직후 첫 방송에서 15만개가 넘는 별풍선이 터졌다. 1650만원을 벌어들였다. 일반 회사원의 몇 달치 월급을 하루에.
작년 별풍선 수익 1위, 300억원을 벌었다는 BJ 커맨더지코는 최근 62억원이 든 주식 계좌를 공개했다. 이 BJ는 볼륨 있는 몸매를 최대한 부각하며 성적으로 어필하는 여캠을 한데 모아놓고 시청자가 별풍선을 후원하는 BJ가 춤을 추게 하는, 이른바 엑셀 방송(별풍선 후원 실시간 순위를 엑셀 문서처럼 정리해 공개한다는 뜻)으로 돈을 벌고 있다. 여캠 팬들 간 경쟁을 부추기는 방식이다. 시청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BJ에게 후원금을 쏘면서 익명의 공간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다. 수억 원씩 쏘는 후원자들은 큰손으로 불리며 이 세계의 왕으로 군림한다.
아프리카TV에서 현금성 아이템인 별풍선은 개당 110원. 인기도에 따라 다르지만 BJ는 20~30% 수수료를 회사에 내고 나머지를 가져간다. 정산 기간도 짧아 BJ 입장에선 빠른 현금화가 장점이라고. 아프리카TV 월 이용자는 평균 200만명이 넘으니 하루에 얼마나 많은 돈이 오갈지 상상에 맡긴다. 다른 플랫폼도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아찔한 수위의 실시간 방송은 프리미엄급 비용을 치러야 한다.
일부 BJ는 아프리카TV 등의 국내 플랫폼에서 활동하다가 이름이 알려진 뒤 유튜브로 옮기기도 하지만,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먹방, 뷰티 BJ의 경우엔 광고, 협찬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유튜브가 유리한 반면, 시청자와 유대를 쌓아가는 토크 위주의 BJ는 신체 노출, 욕설 등이 자유로워 비교적 규제가 약한 국내 플랫폼이 좋은 시장이다. 소수 팬덤으로도 어느 정도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
◇어두운 삶
BJ 시장은 약육강식 생태계다. 소수 후원자들의 마음을 빼앗아야만 살아남는다. 잘나가다가도 한순간에 벼랑 끝에 설 수 있다. 여자 BJ는 활동 수명도 짧다. 후원자도 마찬가지. 계속해서 엄청난 금액을 쏴야만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
2000년대 개인 방송을 시작한 1세대 대표 여성 BJ는 얼마 전 도박에 손을 댄 뒤 팬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아 구속됐다. 10년 전부터 연간 4억원을 벌 정도로 잘나갔다. 생활이 힘들어지자 다른 플랫폼으로 이적, 19금 방송까지 해야 했지만 그 끝은 감옥이었다. 이 BJ 안티팬들은 “쉽게 버니까 쉽게 잃는 것 아니겠냐”고 비아냥거렸다. 좋아하는 BJ에게 하루 5000만원까지 후원할 정도로 큰손이던 30대 남성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BJ에 빠져 빚을 1억5000만원이나 졌다고.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BJ 간 계파, 라인 싸움도 치열하다. 사람과 돈으로 얽혀 있다 보니 극단적 사건도 일어난다. 지난해 한 BJ는 다른 BJ의 모욕에 못 이겨 자살했다. 협박, 사기, 감금 등의 부정적 단어도 자주 등장한다. 작년에는 남편이 감금한 채 성인 방송을 강요해 비극적 선택을 한 BJ의 사연이 알려졌다. 과거 연인이자 전 소속사 대표로부터 긴 시간 폭행을 당해온 먹방 유튜버 쯔양도 돈을 벌기 위해 BJ 일을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번 돈은 갈취당했다. 유튜버 카라큘라는 코인 사기 의혹 BJ를 협박해 3000만원을 뜯어낸 혐의로 얼마 전 구속됐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왜 자꾸 음지 BJ들이 양지로 나오는 건가’란 글이 화제가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극적 콘텐츠를 보여주는 BJ들이 과거와 달리 톱급 연예인이 진행하는 유튜브에 출연하고 넷플릭스 시리즈에 주인공처럼 나오는 현실에 대한 경고였다.
색안경만 끼고 볼 것까진 없다. 아슬아슬한 옷을 입고 노출을 하면서 남성 팬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돈을 버는 직업만으로 특정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아프리카TV BJ 수익으로 따지면 상위권에 남자 BJ 이름이 더 많다. 게임이나 음악, 토크 등으로 돈독한 팬덤을 유지하는 BJ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욕설과 수위 높은 농담이 판을 치긴 한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도 BJ 힘은 여실히 드러났다. 남자 양궁 개인 결승전이 진행된 날 아프리카TV 최고 동시 접속자 수가 45만명에 달했다. BJ 감스트는 이 기간 연일 15만명이 넘는 시청자와 함께 경기 중계를 했다. 내로라하는 전직 선수들에게 출연료를 줘가며 해설을 하는 방송 3사가 새벽 시간에 낯 뜨거운 시청률을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성적. 업계에선 “시청자들이 일방향 정보 전달이 아닌 양방향 소통을 원한다는 게 명백해졌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BJ를 향한 시선이 곱지는 않다. BJ를 양성하는 한 엔터테인먼트사는 홍보 글에 이렇게 썼다. “왜 BJ를 부러워할까요? 그건 노동 대비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성 때문이죠. 연예인은 연습생 등 시간 투자 대비 수익을 장담할 수 없지만 BJ는 도전했다가 안 되면 그만이에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바싹 벌고 다른 일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도전하세요!” 그러나 어두운 이면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조심 또 조심.
☞여캠
포괄적으로는 여성 BJ(방송 자키·Broadcasting Jockey)를 의미하지만, 주로 자신의 몸매를 내세워 섹스 어필을 하는 방식으로 개인 인터넷 방송을 하는 BJ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