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이주형 안타! 짝짝~ 짝짝짝, 이주형 안타!” 안타(安打)가 그냥 공이 뜬 건 줄 알았던 사람? ‘도루’가 뭔지 몰라 “이대호 도루”를 “이데올로기”로 알아들은 사람? 그 무식한 ‘야알못(야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야구장에서 “안~타!”를 부르짖고 있다. 관중석도 아닌 응원단 단상에서 팔목이 떨어져라 응원용 수술을 흔들고, 타석을 가리키면서!
흥분해서 단상에 난입한 진상 기자? 아니고 야구도 모르면서 키움 히어로즈 응원단 일일 치어리더가 된 (무식해서) 용감한 기자, 바로 나다. 관중석을 마주하느라 보진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1회 말 선두 타자인 그가 안타를 쳤다는 사실을. 눈 앞의 관중이 들썩이고 누군가는 짐승처럼 포효했으며 또 다른 이는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앗싸, 다 같이 어깨 춤~ 추는데~ 어라, 나만 또~ 이상한~ 방향으로 간다~. 하지만~ 신난다~ 히! 어! 로! 즈!
지난 13일 키움 대 기아의 경기에 다녀왔다. 이날 서울 낮 최고기온은 36.4도까지 치솟았고, 폭우로 잠실 경기는 취소됐다. 물불 가리지 않는 지옥에서도 끄떡없는 곳이 있으니, 바로 실내 구장인 고척돔. 경기 전 “에어컨이 있어 다행이네요” 했다가 경기 후 “에어컨 없으면 죽었겠는데?” 했던 곳. 그 뜨거운 현장 속으로.
◇가냘픈 몸에서 이런 파워가
경기 5일 전인 지난 8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을 찾았다. 율동을 배우기 위해서. 키움 응원단은 단장과 부단장, MC를 포함해 총 10명. 이 중 이날 경기 응원에 나서는 4명이 나를 맞았다. 경력 2년 차 치어리더 이예빈(22)씨가 세상 시름 다 떠안은 내 표정을 보고 “기자님, 괜찮으세요?” 물었다. 마음씨도 곱다. 그의 해맑은 표정을 보면서 “아니요”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를 꽉 깨물고 답했다. “네… 괘자흡미다(괜찮습니다).”
“선수 응원가부터 해 볼게요. 키움, 김태진~ 워어어. 안타, 김태진!” 치어리더 팀장 김하나(26)씨가 동작을 선보이며 말했다. 경력 6년 차로, 키움에 온 지 3년째. 농구와 배구 치어리더 경력도 있다. 치어리더들은 야구 시즌이 끝나면 겨울에 농구장·배구장에서 일한다.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춤추는 모습이 상큼했다. 호리호리했지만, 절도와 강단이 있는 몸짓. 표정도 야무지다. 이 가냘픈 몸에서 어찌 그런 파워가 나올꼬? 실례인 줄 알지만 슬쩍 몸무게를 물었다. “비밀”이라는 답이 수줍게 돌아왔다. 경기 때마다 약 3시간 넘게 몸을 쓰는 셈이라, 따로 운동은 하지 않는다고. 귀여움에 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이들은 상큼한 소녀, 소녀. 난 마감, 마감~.
뼛속에 키움의 DNA를 새길 차례. 40여 분짜리 ‘키움 히어로즈 응원가 모음집’을 연속 재생해 듣기 시작했다. “꼴찌여도 좋다. 다른 팀이 우리 팀 무시하고 승점 자판기 취급하는 게 너무 싫다. 끝까지 응원하는 팬이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내겐 이 노래가 거의 애국가” “시험 공부 하다가 이걸 들으니 눈물이 난다”. 애국가라니? 눈물까지 난다니!
이날 기준 키움은 10위, ‘꼴등’. 하필 내가 응원 가는 날 붙는 상대는 1위 기아였다. 그 어떤 스포츠의 그 어떤 팀도 응원해 본 적 없는 나는 성적이 좋지 않은 팀을 응원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지는 거 아닌가….’
◇사흘 뒤
아닌데? 지는 거 아닌데? 키움 이길 건데? 누가 진다고 생각했지? 순위가 중요한가, 승률이 중요하지. 순위 따지는 사람이 진정한 ‘야알못’ 아닌가? 승률 4할 4푼 4리인데? 꽤 잘하고 있는데? 꼴찌라고 부르지 마라, 강한 10위라고 불러라. 불과 사흘 뒤 난 키움 팬이 되기 일보 직전인 상태가 됐다.
‘나의 키움’은 주말에 한화를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하며 수많은 부상 공백에도 힘을 내고 있었다. 간판 스타 김혜성 선수는 목의 담 증세로 5경기 연속 결장. 컨디션은 괜찮을까, 목구멍도 목에 있으니 담 증세로 밥을 잘 못 먹는 건 아닐까…? 이 청년을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절절한 사랑 고백이 담긴 응원가 댓글창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팀장님, 그만 뛰고 싶어요
취재를 앞두고 도망친 기자가 있을까. 당일, 경기 시작 4시간 30분 전. 교실 칠판 두 개를 이어 붙인 크기의 단상에서 1시간가량 연습을 이어가다 생각했다. 내가 서는 건 고작 1회뿐이었지만, 동작이 쉼 없이 이어져 땀이 나고 숨이 찼다. 선발이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선수 응원가 대부분을 연습해야 한다.
율동은 어렵지 않았지만 헷갈렸다. “콩, 콩, 콩, 뛰세요!” “팔 높이~ 콩, 콩” “손 흔드세요!” 경쾌한 뜀뛰기. 치어리더의 동작은 요정 같았다. 난 약간 강시처럼 보였을 것이다. 팔만 들고 있느냐, 수술도 들고 있느냐 정도의 차이랄까. 에너지가 고갈되며 관짝을 열고 나온 시체처럼 얼굴도 허옇게 질려갔다. 팀장님, 그만 뛰고 싶어요. 이걸 9회까지 어떻게? 강철이세요? 감탄.
연습이 끝나면 약 1시간 30분 휴식한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간단한 저녁을 배달시켜 먹는다. 이날 저녁은 ‘그릭 요거트’. 개인마다 다르지만, 통상 경기 4~5시간 전 연습실에 모여 리허설을 한 뒤 도구 등을 점검하고 응원에 임한다.
치어리더를 고른 계기는 각기 달랐다. 경력 5년 차 박혜인(27)씨는 치위생을 전공했지만, 국가고시 준비를 하다가 우연히 소셜미디어에서 본 치어리더 모습에 반해 이 길을 택했다. 반면 키움 응원 경력 7년 차인 치어리더 김소윤(29)씨는 ‘스트리트 댄스’를 전공, 스무 살 때 들어간 치어리더팀에서 적성을 찾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을까. “보여지는 직업이라 연령을 무시할 수 없는 건 사실”이라며 “몸을 많이 쓰기 때문에 단순히 ‘하고 싶다’고 계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는 대답. 앉아 있을 때도 긴장하기 때문에 한 번 경기를 뛰고 나면 몸살에 걸린 느낌이라고.
관중을 응원하는 직업이지만, 되레 관중에게 에너지를 받기도 한다. 김소윤씨는 “올해 키움이 약팀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상황에서 키움이 점수를 잘 낸 최근 경기가 있었다”며 “팀 응원가를 부르는데 관중석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반주도 안 들리고 육성만 들렸다. ‘우리는 약팀이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아 단상에서 눈물을 보일 뻔했다”고 했다.
◇노래와 춤으로 안타를 기원하고
드디어 경기 시작. 1만6000석이 모두 매진이었다. 원정팀 기아의 선공. 반대편 단상에서 응원가가 들렸다. 치어리더들이 힘차게 팔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기아 없으면 못 산다” 응원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흥. 난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의 마음가짐으로 상대팀 단상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기아에 딱히 유감은 없지만, 오늘은 거참 유감일세.
“히어로즈의 승리를 위해! 가즈아!” 마침내 키움의 공격, 응원 시작. ‘에라, 모르겠다’ 열심히 팔을 휘둘렀다. 고백하건대 이렇게 떨렸던 취재는 처음.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우(杞憂)였다. “넌 누군데 거기 올라갔느냐” “춤을 왜 이렇게 틀리느냐” 하면서 물병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키움 팬들은 대부분 응원가의 춤을 알고 있었다. 연습한 나보다 (당연히) 더 잘 췄다. 노래도 (당연히) 더 잘 알았다. 날 따라 할 필요가 없었다. 나한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노래와 춤으로 안타를 기원하고, 시선은 하염없이 ‘타석에’. 춤을 틀릴 땐, 간혹 ‘조금 모자라지만 열심히는 하는 친구’라는 갸륵한 눈빛으로 안쓰럽게 나를 쳐다봤다. 감사했다.
“1번~ 타자, 이주형! 2번~ 타자, 김혜성! 3번~ 타자, 송성문!…” ‘선발 라인업 송’에서는 1~9번 타자와 선발투수 이름을 같은 리듬에 맞춰 순서대로 모두 외친다. 이때 치어리더는 타석을 향해 두 팔을 쭉 치켜들고, 문을 열었다가 닫는 것과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여기에 라인업이 뜬 화면을 가리키며 오른팔을 다시 힘차게 쭉 뻗는 동작까지 추가하면 팔동작만 총 30번. 이게 응원의 기본이다. 거짓말 아니고 라인업송만 끝내도 팔이 후들거린다.
다리라고 멀쩡한 게 아니다. 9㎝ 키높이 운동화(일명 ‘치어리더화’) 때문. 치어리더와 키를 맞추기 위해 3만2000원 주고 샀는데, 다리 역시 쭉쭉 뻗는 동작이 많기 때문에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문득 아까 대화를 나눈 두 치어리더의 말이 생각났다. “이런 동작 때문에 어깨에 심한 무리가 오거나, 발목을 접질리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쉬는 날 병원에 가는 동료도 많고요.”
1회 끝. 내게 맡겨진 임무는 끝났지만, 경기는 끝까지 봤다. 기아가 키움에 2대0 승리. 아쉽다. 키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한 남성은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자”고 했다. 성적이 바닥인 팀을 무슨 재미로 응원하느냐고? 이들은 ‘10등’ ‘꼴등’ ‘꼴찌’ 팀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키움 자체를 응원한다. 유 노 ‘찐팬’?
치어리더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잠깐 주춤하지만, 히어로즈가 약팀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치고 올라갈 수 있다.” 단상 위에서 풍기는 이들의 상큼한 에너지는 팀의 선전을 진심으로 믿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난 진짜 ‘입덕’해서 유니폼을 샀다. 앞으로 키움 응원가를 들을 때마다, 유령처럼 이날의 강시춤이 떠오를 것 같다. “콩, 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