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택에서 만난 작가 김홍신. 코로나 때 죽음과 마주했다는 그는 “유언을 쓰면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던 자신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고백했다. 김홍신은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더라”며 “공포감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살아 있는 한 즐겁고 재밌게 사시라. 그게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걸/ 잃어보면 안다, 그것이 참 소중한 걸/ 지나보면 안다, 고통이 추억인 걸/ 죽음이 닥치면 안다, 내가 세상의 주인인 걸….”

작가 김홍신(77)이 쓴 짧은 글 ‘겪어보면 안다’의 몇 구절이다. 2020년 TV 프로그램에 나와 읊은 이 시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명언’으로 수년째 인터넷에서 회자된다. 일흔을 넘긴 백발 남자는 그때만 해도 겪어보니 알겠더라고 썼다. 1980년대 소설 ‘인간시장’이 100만부를 돌파하며 한국 최초 밀리언셀러 작가로 이름을 알렸고, 방송 프로그램 MC, 재선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별일을 다 겪었으니까. 글을 쓰다가 정권에 밉보여 보안대에 끌려가기도 하고, 온 국민이 다 듣는 라디오에서 현직 대통령을 비판했다가 쫓겨나는가 하면,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모욕죄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또 끔찍하게 아낀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다.

하지만 코로나로 세상과 단절돼 20여 일간 사경을 헤매면서 또 세상을 배웠다. “평소 글이나 강연에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유언을 쓰든, 죽음 체험을 하든, 면벽 수행을 하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요. 그런데 제가 완전히 거짓말을 했더라고요. 막상 죽음이 닥치니까 그 공포 탓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머릿속이 온통 ‘나는 어디로 갈까’로 가득해 생각이 엉키고 엉키더군요. 다 됐고, 그냥 즐겁게 재미있게 사세요. 그게 죽음에 대한 준비였어요.”

평생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한 적 없는 그였지만 그땐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다. 기적처럼 퇴원해 집에 와서도 근육이 다 빠져 펜을 한동안 잡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3년간 집에 틀어박혀 대하 역사소설 ‘대발해’를 썼잖아요. 그때가 지옥인 줄 알았어요. 제가 또 거짓말을 했더라고요. 죽음 코앞까지 갔다 와 보니 집도 절도 없어도 살고 싶었어요. 살아 있는 한 행복하게 사십시오. 건강하다면 더없이 좋고요.”

◇쓰고 또 썼더니 139권

김홍신은 최근 생각지 못한 인기를 얻은 시 ‘겪어보면 안다’를 계기로 에세이를 펴냈다. 139번째 책이다. 매일 새벽 1시쯤 잠들고 아침 10시쯤 눈을 떠 온종일 글과 씨름해 왔다. 그런 아버지에게 딸은 “그러다 또 아프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며 핀잔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소용없다. “읽고 쓰는 게 좋은데 어떡하나.”

-책을 139권이나 냈네요.

“1년에 3권씩 쓴 셈이더라고요. 많이 쓸 때는 7~8권. 심하면 10권까지 썼어요. 매달 원고지 1000장씩 썼죠. 그런 시절엔 몽환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하하. 사람은 미칠 때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인생이 풍요로워요.”

김홍신은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죽을 때 이 두 개만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139권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자식이라면.

“무엇보다 ‘인간시장’과 ‘대발해’죠. ‘인간시장’은 김홍신의 존재 가치를 오늘날까지 이어줬고요. ‘대발해’는 아내의 죽음을 견디기 위해 쓴 거였거든요. 그때는 무엇인가를 해야 했어요. 정치를 그만둔 직후였고. 제가 문학을 할 때 정치 비판을 굉장히 심하게 했는데 결국 정치를 했잖아요. 문학 밭으로 돌아가려면 남이 인정할 만한 작품이 필요했어요. ‘대발해’는 3년을 틀어박혀 쓴 작품이죠.”

-팔에 마비가 올 정도로 쓴다고요?

“저는 해봐서 잘되면 해요. 안되면 바로 때려치우고요. 그래서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걸 못 해요. 지금도 원고지에 쓰죠. ‘대발해’ 쓸 때는 원고지 1만2000장을 썼는데 만년필 3개가 닳았어요. 만년필도 바꾸잖아요? 그럼 마비가 오고 힘들어요.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석 달 정도 버텨서 쓰죠.”

-그 무시무시한 동력은 뭔가요.

“음, 뭐랄까. 중독 같은 거예요. 밖에 나갔다 오면 잘 써지지도 읽어지지도 않아요. 그래서 가능하면 약속을 안 잡으려고 하죠. 책 속에 스승도 있고 친구도 있으니까요.”

-코로나로 병원 신세를 지고 집에 와서도 바로 책을 들었다고요?

“그러니 좀 살겠더구먼요.”

김홍신이 1981년 발표한 장편 소설 '인간시장'은 부조리한 시대에 홍길동과 같은 주인공 장총찬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이야기다.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 나중에 드라마, 영화, 웹툰으로도 제작됐다.

◇절대 권력은 피폐해질 수밖에

김홍신은 TV, 라디오에서 MC로 잘나가다 김영삼 정부를 비판한 뒤 방송을 그만뒀다. 그러고 1996년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됐다. 정치를 안 하겠노라 했는데 그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당시 시민사회, 종교계 원로의 요청이 많았어요.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그때도 국민은 정치하는 걸 안 좋아했거든요. 당선되니까 그렇게 잘 팔리던 ‘인간시장’ 판매가 딱 끊기는 거예요. 그때 알았죠. 진짜 국민이 대단하구나! 한편으론 소신대로 정치해 달라는 기대가 있어서 그렇게 정치를 시작한 거죠.”

-정계 은퇴 후 정치와는 완전히 거리를 뒀는데.

“상임 고문 같은 자리를 맡는 거 싫어해요. 물러났으면 깨끗하게 물러나야지, 거기다가 한 발 걸치는 건 정말 싫어요.”

-요즘 정치는 어떤가요?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고 민주주의의 위기죠.”

-스스로를 진보라 칭하잖아요. 그럼 지금의 민주당은 진보인가요?

“변형된 진보죠. 절대 권력은 피폐해지게 돼 있어요. 지금 민주당은 그쪽으로 가고 있고요.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정치란 건 공통분모를 가져야 해요. 민주당만의 문제는 아니죠. 그런데 비판도 힘들어요. 비판해서 변한다면 하겠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니까요.”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요?

“결국 국민이 이길 겁니다. 시간이 걸릴 뿐이죠. 저는 국민을 믿어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바른말 하는 측근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의 선비주의를 생각해 봐야 해요. 양반 중 무반은 전쟁에 나가 나라를 지키다 죽죠. 문반은 바른말을 하다가 죽어요. 간쟁, 간언을 하죠. 임금이 잘못된 길을 가면 목을 내놓고라도 그걸 막아야죠. 후배에게도, 제자에게도 배우는 게 선비주의입니다. 권력과 서열로 찍어누르지 않아요. 이게 민본주의의 상징이에요. 간신은 비겁한 자로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정치할 때 상습적 당론 거부자였잖아요. 이재명 대표는 이번 총선 당선자들에게 ‘개인적 이유로 당론 거부를 말라’고 했는데요.

“당론에도 온당한 당론이 있고 부당한 당론이 있는 거예요. 그 당으로 국회의원이 됐으니까 온당한 건 따라줘야겠죠. 그게 소속감이란 거죠. 하지만 자기 양심에 어긋나는 당론이라면 따르면 안 되죠.”

-미움도 많이 받았죠?

“국회의원 임기가 5월 30일에 시작하잖아요. 5월에 딱 이틀만 일했는데 월급을 주더라고요. 당시에 300만원이 넘었던 거 같은데요. 그래서 ‘세비를 반납하자’고 했어요. 알고 보니 저 혼자 했더라고요. 그러니 처음부터 욕을 먹었죠. 국회의원 연봉이 현재 1억5000만원 정도 할 거예요. 이것도 많아요.”

-그런가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아주 좋은 직업 중 하나예요. 왜냐면 감사 기관이 없잖아요. 정부 부처 과장급 월급은 400여 만원 정도가 적당해요. 국회의원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리예요. 권력이 있잖아요. 그럼 권위를 가지면 돼요. 돈까지 가지려면 사업을 해야죠. 특권을 누리는 건 비겁한 짓이에요. 출마할 때는 국민 앞에 무릎 꿇겠다고 약속해 놓고 당선되면 국민의 주인 행세를 해요. 국민을 노예로 생각하는 게 특권 의식이에요. 진짜 국민을 위한다면 내려놔야죠.”

-책을 139권이나 썼는데 출판 기념회는 안 했다고요?

“정치인들이 국민 눈치를 보느라 세비는 못 올리고 다른 거로 찾아 먹는 게 출판 기념회 같은 거예요. 그렇게 돈 벌면 안 돼요. 신세를 지는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갚아요? 누구는 평생 해도 못 갚을 돈을 내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저는 책을 쓰는 사람이지만 자의로 출판 기념회는 한 번도 안 했어요.”

-국회의원마다 보좌진이 9명인데 이 숫자는 어떤가요?

“열심히 일하는 정치인한테는 턱없이 부족할 수 있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 국회에 몇이나 될까요? 제가 볼 때 손에 꼽을 정도.”

-요즘 정치는 국회의원 특권 논쟁을 할 만한 여유조차 없는 듯해요.

“지금도 국회 본청 정문으로는 국민이 다닐 수가 없어요. 다 뒷길로 가죠. 그래서 국회의원 8년간 저도 쪽문으로만 다녔어요. 국회의원 배지도 안 달았어요. 한번은 이회창 총재가 그걸로 막 뭐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 안 달겠다’고 했죠. 저와 절친한 제정구 형이 옆에 있다가 ‘말대꾸 좀 하지 마’ 하면서 욕을 해요. 배지도 사 줬죠. 그래도 안 달았어요. 국회의원은 특권이 아니에요.”

◇비판받고도 내 어깨 두드린 YS, JP

김홍신은 지금 정치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없다고 했다. 그때는 날카롭게 싸웠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선 한 나라를 위한 동지도 될 수 있었다고. “제가 YS(김영삼 대통령)를 참 많이 비판했어요. 그런데 사실 총재 시절 그 댁에 가서 여러 번 밥도 먹고 여의도 구보도 함께한 사이였습니다. 국회의원 되고서 청와대에서 만났죠. 저를 보더니 ‘으이쿠’ 하면서 어깨를 툭툭 쳐요. 그러면서 ‘이제 여기 자주 놀러와야지’ 해요. JP(김종필 전 총리)도 똑같았어요. 제가 총리 지명됐을 때 국회 단상에서 앞장서 비판했잖아요. ‘총리 한 번 하지 않았느냐. 하려면 대통령을 해야지’ 하면서요. 그러고 본청 문을 나서잖아요. JP가 거기 딱 서 있어요. ‘으이그, 밥이나 먹으러 가지’ 하면서 끌어안아요. 지금 생각하면 다 미안하죠. 그때는 서로 다름을 인정해 준 거예요.”

김홍신은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정치를 하면서 그들을 세게 비판했다. “그랬어도 그분들은 저를 보면 ‘어이쿠’ 하면서 인정해줬어요. 그때는 저만 옳은 줄 알았어요. 지나고 보니 그분들도 옳은 게 있어요. 미안하죠. 미안합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정치할 때 비판을 많이 했잖아요.

“미안하죠. 그때는 저만 옳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분도 옳은 게 있잖아요. 51 대 49의 싸움일망정.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누가 더 옳은지도 잘 몰라요.”

-지금 정치엔 화해가 없어요.

“그때도 여야가 싸움꾼들을 막 앞에 세웠어요. 둘이 원수로 보일 만큼 싸워요. 그런데 저녁에 국회 앞 식당에 가잖아요? 둘이 이미 술을 마시고 있어요.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하면서요. 심한 말을 한 걸 서로 사과하면서요. 당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푸념도 하고요.”

-여야 의원들이 원색적으로 싸우고 카메라가 없어도 서로 인사조차 안 해요.

“여야가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으로 싸울 때였어요. 저쪽 당 의원들이 우리만 보면 ‘김정일 2중대 지나간다’ 이래요. 당시 김원웅 의원이 막 덤벼들면서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쳤어요. 제가 말리면서 그랬죠. ‘형, 조용히 해. 우익이 있어야 진보도 있는 거야.’ 그러고는 저 당 김용갑 의원한테 가서 정중하게 말했어요. ‘선배님, 저는 선배님을 인정합니다. 그러니 선배님도 저희를 좀 인정해 주세요.’ 그날 저녁에 그분이 방으로 찾아오셨더군요. 오늘 술 한잔 하자면서. ‘나도 이제 자네를 인정하겠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그 뒤로 친해졌죠.”

◇잘못했다면 자식에게도 용서 구해야

김홍신은 미움의 노예로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한때 소설가 최인호를 미워했노라고 고백했다. “너무 잘나가고 잘 쓰니까 부러워서 시기, 질투했어요. 동료끼리 모여 험담을 했죠. 그런데 어느 자리에서 선배님을 마주한 거예요. 마음이 너무 괴롭더군요.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털어놨어요. 용서해 달라고.” 최인호는 그런 김홍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서 나를 용서해 달라고 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네.” 그날로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사이가 됐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의 노예로 사는 거예요. 한번 탁 털고 나니까 마음이 아주 편해요. 저는 사랑은 잘 못 해요. 그런데 용서는 잘해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죠.”

-용서는 쉽지만 또 쉽지 않습니다.

“저도 멀쩡한 사람인데 화가 없겠어요? 저를 해코지하거나 모함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의 노예로 사는 거예요. 주인으로 살아도 인생이 짧은데 왜 노예로 살겠어요?”

-어떤 용서까지 해봤나요.

“한번은 딸이 말을 않고 차를 한 대 산 걸 뒤늦게 알았어요.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서 오빠와 상의 끝에 그런 모양이에요. 혼을 냈죠. 그랬더니 딸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해요. ‘평생 아빠 이름에, 체면에 누가 안 되려고 얼마나 조심조심 산 줄 아느냐’고요. 그 얘길 듣고 ‘아빠가 미안하다. 잘못했다’ 했어요. 평생을 바쁘게 산 탓에 아이들과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본 일이 없어요. 제가 글을 쓴다고 하면 아이들은 집에서도 조용히 있어야 했죠. 자식한테도 잘못했다면 용서를 구해야 해요.”

-또 있나요?

“계엄 때 글 때문에 저를 잡아간 분이 돌아가셨을 때요. 좋은 곳으로 가라고 108배를 했어요. 그분은 모르겠죠. 그런데 저는 제가 행복해지려고 했어요.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때 도청 지시한 분 선거운동도 도왔어요. 절 보더니 딱 그래요. ‘그 일은 혜량해 달라’고. 그 말 한마디에 ‘네, 이미 없던 일입니다. 저는 다 잊었습니다’ 했어요.”

◇먼저 떠난 아내에겐 지금도 미안해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 종로에 출마, 선거운동을 하던 중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 선거에서 떨어진 뒤 김홍신은 정계는 떠났다. 10년 넘게 병상에 있었지만 미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럴까. 20년이 지났지만 아픈 아내를 위해 마련한 서울 서초동 집을 홀로 지키고 있다. “편해요. 삼시 세끼 잘 먹고 불편한 것 없고.”

-그때 당선됐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까요?

“아니요. 하늘이 나를 도왔다고 생각해요. 문학 밭으로 돌려보내 줬잖아요. 그러나 정치를 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상처하고 1년 후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고요.

“미안한 게 많아요. 병상에 있을 때 너무 고통스러워하니까 ‘저러느니 차라리 떠나는 게 낫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나중에 너무 부끄러워서 중환자실 가기 전에 고백했어요. 미안하다고요. 그랬더니 아내가 막 울면서 그래요. ‘나도 당신을 위해서 빨리 가고 싶어. 나 가면 건강한 여자랑 살아.’ 그게 유언처럼 남았어요.(눈물) 못다 한 말이 많아서 뻔히 알면서도 납골당에 휴대전화가 있으니 한번 걸어봤어요.”

-건강한 여자는 안 만났네요.

“혼자서도 건뎌지더라고요. 후회도 안 하고요. 지금은 이 생활이 편해요.”

그는 계속 쓰고 싶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이 꼭 행복한 건 아니에요. 쓸 때는 천재인 줄 알거든요? 끝나서 다시 보면 바보예요. 그래서 또 쓰게 돼요. 150권은 채우고 싶네요.” 김홍신은 죽을 때 손에는 만년필을, 머리맡엔 원고지를 놔달라고 했다. “제 장례식엔 제발 검은 옷은 입지 마세요. 예쁜 옷 입고 오시고 조의금은 안 받습니다. 맛있는 술 대접할게요.”

"글을 쓰는 일이 꼭 행복한 건 아니에요. 쓸 때는 천재인 줄 알거든요? 끝나서 다시 보면 바보예요. 그래서 또 쓰게 돼요. 150권은 채우고 싶네요." /장은주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