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에 본 드라마 ‘인간시장’(송지나 극본·김종학 연출)의 주인공 장총찬(박상원)은 그 시대의 홍길동과 같았다. 스물두 살의 위악적인 법대생. 장총찬은 부패한 개신교 목사, 권력의 손에 좌우되는 법관, 약자를 괴롭히는 조직폭력배 등 불의와 부조리에 맨주먹으로 맞섰다. “하느님, 하느님도 좀 이런 건 제발 알아두쇼. 백문이 불여일견이랬으니 한번 내려와 보시든가!” 같은 배짱까지 마음에 들었다.
장총찬은 서슬 퍼런 시절의 울분을 통쾌하게 날려준 존재였다. 김홍신이 쓴 원작 소설 ‘인간시장(人間市場)’은 1981년에 출간됐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세상은 살벌했고 몰상식이 판을 쳤다. 인신매매, 가짜 휘발유, 사이비 종교의 사기극…. ‘인간시장’은 힘 앞에서는 법도 통하지 않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냈다.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소설은 썩어빠진 기득권자들을 응징하고 조롱했다. 사건을 종횡무진 해결해 나가는 장총찬에게 독자들은 열광했다.
주인공 이름은 원래 ‘권총을 찬다’는 뜻의 권총찬이었다. 장총찬으로 바꾸고 나서야 검열을 통과했다. ‘인간시장’은 나온 지 2년 만에 100만부가 팔렸다.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 대치동 은마아파트 한 채가 2500만원이던 때 김홍신은 2억원을 벌었다. 하지만 이 대성공 후 작가와 가족은 협박과 공갈에 시달렸다. 권력자들을 능멸한 죗값이랄까. 그런데 정권의 간섭이 거세질수록 소설은 인기가 올라갔다. ‘인간시장’은 드라마는 물론 영화, 만화로도 나왔다.
김홍신은 작가, 시민운동가, 정치인 등으로 살아 왔다. 우리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싶어 달려온 인생이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여의도 장총찬’으로 불렸다. 그는 헌정 사상 최초로 8년 연속 의정평가 1등을 했다. “소설 ‘인간시장’을 쓸 때만 해도 세월이 지나면 세상이 한결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더 교묘하게 비뚤어지고 잔혹해졌고, 비겁하고 약삭빠른 자와 음흉한 자들이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출간 후 43년이 지났다. 장총찬이 실제 인물이라면 이제 예순다섯 살. 초로(初老)의 장총찬이 살아가는 2024년 여름에 독자는 묻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받고 있는지, 종교는 세상에 선을 행하고 있는지, 법은 가진 사람의 편이 아니라 없는 사람의 편인지, 김홍신처럼 ‘여의도 장총찬’이어야 할 정치인들은 지금 그곳에서 떳떳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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