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국박)에서 1000일 동안 170만명이 ‘불멍’을 했다. 벌겋게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불씨를 지켜보는 그 불멍이 아니다. 시원한 전시실에서 ‘불상을 멍하니 바라본다’는 뜻의 불멍.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상설 전시 중인 국박 ‘사유의 방’이 지난 8일 개관 1000일을 맞았다. 2021년 11월부터 누적 관람객은 176만여 명(8월 15일 기준). 하루 평균 약 1700명이 ‘불멍’을 한 셈이다. 사유의 방은 인증샷 명소로 꼽히며 국박 최고 흥행 기록을 매일 갈아치우고 있다.

삼국시대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나란히 상설 전시 중인 국박 ‘사유의 방’이 지난 8일 개관 1000일을 맞았다. 2021년 11월부터 누적 관람객은 176만여 명(8월 15일 기준)에 이른다. /남강호 기자

역사상 가장 덥다는 이 여름에는 물멍, 파도멍, 폭포멍도 인기다. 소셜미디어에는 강변에서 물멍을 하거나 바닷가에서 파도멍을 하거나 폭포 앞에서 폭포멍을 한다는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올라온다. 멍에도 제철이 있구나. 불쾌지수가 치솟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멍, 멍, 멍이 각광받는 시대다.

“템플스테이 입소로 연락이 안 됩니다. 속세 잠시 안녕~.” 박창흠 트로이목마 대표는 최근 강원 양양 낙산사로 템플스테이를 떠난다며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일출을 보고 108배를 하고 염주를 꿰고 파도멍을 했다고 한다. 템플스테이는 스마트폰을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전자기기와 단절된 2박 3일. 집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출판인은 “무엇보다 파도멍을 하면서 잡념을 바다로 떠나보냈다”며 “일터로 돌아와 세파를 헤쳐 나갈 힘을 비축한 시간”이라고 했다.

지난 17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홍제폭포 앞 야외 테라스. 수직으로 홍제천에 떨어지는 시원한 폭포를 바라보며 100여 명이 폭포멍을 즐기고 있었다. 한낮의 땡볕은 고가도로(내부순환로)가 막아준다. 창밖으로 폭포가 보이는 ‘카페 폭포’와 ‘폭포 책방’도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북적였다. 음료나 독서를 즐기면서 홍제폭포를 감상할 수 있는 명당.

홍제천 인공폭포는 서울 서대문구가 자랑하는 글로벌 '폭포멍' 명소다. 야외 테라스에는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는 외국인이 많다. /박돈규 기자

놀라지 마시라. 높이 26m, 폭 60m 규모의 이 인공 폭포는 서대문구가 자랑하는 글로벌 관광 명소다. 이날 야외 테라스에는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는 외국인이 많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메이린 파커씨는 “틱톡에 ‘독특한 K피서법’이라는 제목으로 뜬 영상을 보고 여행 코스로 잡았다”며 “대도시 서울의 오아시스로 유명하다”고 했다. 히잡을 쓴 여인들이 보였고 중국어, 스페인어도 들려왔다.

서울시와 서대문구는 주차장 일부와 창고를 없애고 카페·책방을 만들어 폭포멍을 즐길 수 있게 했다. 하천가에서는 카페나 식당을 운영할 수 없었지만 식품위생법이 개정되며 길이 트였다. 홍제폭포는 소박한 사이즈지만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로 화제가 되면서 폭포멍을 할 수 있는 글로벌 관광지가 됐다. 조회 수 10만회가 넘는 영상만 30개.

지난 20일 오후 5시 국박 사유의 방은 한산한 편이었다. 입구에 적힌 문구처럼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국박은 1400여 년 된 반가사유상 두 점을 전시하자는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면서 건축가, 미디어 아티스트와 함께 공간을 디자인했다. 평일에는 오후 6시에 문을 닫지만 수요일 밤엔 9시까지 야간 개장을 한다. 국박 관계자는 “주말에는 5000~6000명이 온다”며 “수요일 밤엔 운이 좋다면 방해받지 않고 반가사유상을 5~10분간 독대할 수도 있다”고 했다.

'사유의 방' 입구에 적힌 문구. 금속활자처럼 만들었다.

사유의 방은 국박 전시실 중 유일하게 소극장 무대처럼 경사(1도)가 있다. 시야의 소실점에 반가사유상이 보인다. 관람객들은 극적인 오르막을 체감하며 두 주인공에게 다가가는 셈이다. 반가사유상들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가볍게 얹고 오른손을 살짝 뺨에 기댄 채,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단순한 호기심부터 근심이나 불안, 또는 희망을 품고 이곳에 온 사람들은 반가사유상 주변에 모여 저마다 불멍에 잠긴다.

프랑스 문명 비평가 기 소르망은 이 반가사유상에 대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1000여 년 앞서 예고한 한국의 상징”이라고 한 적이 있다. 수녀들도 보고 갈 만큼 종교를 초월한다. “1400년을 견딘 반가사유상의 온화한 미소를 보며 위안을 받았다” “언짢은 일을 겪고 갔는데 ‘두 분’을 뵙고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사람도 하나하나가 보물”이라는 관람 후기가 있었다.

스마트폰 터치 하나로 실시간 검색되는 불필요한 정보의 홍수 속에 현대인들은 지쳐간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광고 카피가 공감을 이끈다. ‘멍 때리기’는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려는 자구책과 같다. 불멍이나 물멍, 파도멍이나 폭포멍을 하면서 근심과 함께 뇌를 청소한다.

바닷가에서 지구의 역사와 함께한 파도를 보며 근심을 떠나 보내는 '파도멍'도 인기다. /SNS

멍은 무용한 시간 낭비가 아니다. 홍제폭포의 경우 1년 동안 방문객 30만명, 카페 매출 10억원이 넘자 서대문구는 지난 5월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 1억원을 나눠줬다. “지역 상권을 죽인다”는 민원을 의식해 커피 가격도 구청 직영 카페로는 비싼 4000~5000원이다. 바리스타 등 점원은 지역 청년들. 서대문구는 10월에도 장학금 1억원을 전달할 계획이다.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는 2020년 12월부터 시즌3까지 다양한 종류가 제작됐다. 누적 판매량은 약 3만5000개. 당근에서 중고 거래도 활발하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관계자는 “출시된 이후 꾸준히 사랑받아 온 베스트셀러”라며 “반가사유상 토우 시리즈, 사유의 방 입체카드와 자석도 인기”라고 했다. 그렇게 집에서도 불멍을 한다.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국립박물관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