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태국 방콕으로 간다는 후배에게 말했다. “카오산 로드(Khaosan Road)만 가지 말고 다른 데도 꼭 다녀.”
한국의 인사동처럼 방콕에 온 외국인이라면 꼭 들르는 카오산 로드는 밤낮으로 좌판이 열리고 싼 음식들이 널려 있다. 동남아를 대표하는 음식 강국 중 하나인 태국은 각종 시판 조미료와 공산품이 한국보다 낫다. 국가 주도로 음식 문화를 개발한 역사와 현재 시가 총액이 80조원을 넘는 CP 그룹과 같은 식품 대기업의 존재,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자영업을 선택한 영세한 가장들 덕분이다. 주방에 화구 하나 덜렁 갖다 놓고 장사를 하는 그들의 품을 덜어주기 위한 각종 제품들의 존재로 관광객을 상대하는 카오산 로드 같은 곳에 가도 실망할 확률은 적다. 그러나 저렴한 가격에 적당한 맛이 태국 음식의 전부는 아니다. 접시 위에 인생을 걸고 매번 손님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장인들이 저 남국(南國) 곳곳에 숨 쉬고 있다. 이 말은 꼭 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택한 태국 사람들 중 상당수가 요리를 업으로 삼았다. 덕분에 한국 어디를 가나 태국 음식점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음식 종류나 맛이 비슷한데 그 이유 또한 본국의 사정과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뜨거운 가스불 앞에서 돌격을 외치는 장교처럼 날카로운 목적의식을 가지고 태국 음식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뽑아내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다면 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
논현동의 ‘영동포차나’다. 설렁탕, 닭 한 마리 같은 익숙한 이름을 가진 간판들이 손을 흔들듯 길가에 몸을 내민 논현동의 오르막길은 사납게 굽이치지 않았다. 그보다는 유유한 한강물을 닮아 느슨하게 경사를 만들며 행인들의 얼굴에 작은 땀방울만 맺히게 할 뿐이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영동포차나’는 크지 않은 간판에 외관도 수수하여 길눈이 어두운 이가 놓치게 딱 쉬워 보였다.
가게에 들어서니 흔히 보던 태국 음식점과는 결이 달랐다. 초여름 잔디처럼 짙은 연둣빛을 띤 좌석과 흡사 일식집에 온 듯 반듯하게 구획된 테이블은 앉기도 전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미색지에 인쇄된 메뉴판에는 발음하기 어려운 본토 태국 이름과 이해하기 쉽게 푼 메뉴 설명이 함께 적혀 있었다.
시작은 닭 연골 튀김이었다. 찹쌀가루 반죽을 한 닭 연골을 동백나무 잎사귀를 닮은 라임(lime) 잎과 같이 튀겼다. 튀김옷은 바삭하고 가벼웠으며 안에서 씹히는 닭 연골은 또 쫄깃한 맛이 있었다. 튀김옷에 밴 라임향은 눅눅한 느낌 없이 산뜻하게 뒷맛을 마무리하여 한 접시를 다 먹어도 배가 부른지 몰랐다. 보통 불린 녹두 당면에 새콤한 소스와 양파, 토마토 등을 버무려 내는 ‘얌 훈 센’은 특이하게 스지를 삶아 같이 냈다. ‘크리스피 포크 쏨땀 세트’도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메뉴였다. 파파야 열매를 얇게 채 썰어 무생채처럼 버무린 쏨땀은 시고 달고 매운 태국 음식의 알파요 오메가다. 여기에 마치 중국 광동요리에서 그러하듯 살코기는 부드럽게 남기고 껍질만 바삭하게 튀긴 돼지 삼겹살을 곁들였다. 바삭한 삼겹살의 껍질이 씹히고 나면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속살이 이에 박혔다. 오페라 ‘마술피리’ 속 밤의 여왕이 분노하여 내지르는 찌를 듯한 고음처럼 예리하게 공기를 가르는 쏨땀의 신맛은 돼지고기에서 비롯된 기름기를 말끔하게 없앴다.
‘사과 샐러드를 올린 우럭 튀김’은 그런 맛의 정점에 있었다. 튀긴 우럭은 살이 많아서 생선 자체로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자칫 둔할 수 있는 튀김에 곁들인 사과 샐러드는 아삭한 식감과 은근한 단맛, 신맛이 입체적으로 맛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 구조는 탄탄하여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고 그 안정감은 찌고 굽고 튀기는 어떤 조리법도 부족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받치고 있었다. 자신감의 근원은 홀과 작은 경계를 두고 펼쳐진 주방에 있었다. 뜨거운 땀을 흘리며 불 앞에 선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그을리고 상처 난 굵은 팔뚝으로 커다란 냄비를 붙잡고 있었다.
#영동포차나: 스지 얌운센 1만7000원, 크리스피 포크와 쏨땀 세트 3만2000원, 우럭튀김과 사과 샐러드 4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