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인 지난달 31일 정오 서울 강북의 한 초등 수학 학원.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1~2학년 50여 명이 자기 몸집만 한 책가방을 메고 쏟아져 나왔다. 4단계 레벨로 나뉜 강의실 10여 곳에서. 입구에서 기다리던 부모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다음 주 숙제 받아 왔어?” “수학 경시 대회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자” “엄마, 떡볶이 먹고 싶어” “이제 좀 놀면 안 돼?” 같은 대화가 뒤섞였다.
이곳은 비(非)학군지에 상륙한 대치동 유명 수학 학원 분점으로, 인근 4~5구 학생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아이들은 덧셈 뺄셈 구구단 따위를 배우러 온 게 아니다. 요즘 전국에 유행하는 대치동식 의대 준비반 코스를 밟는 어린이들이다.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 파업으로 의료 대란이 반년째 이어지고 있다. 전국 의대는 동맹 휴학과 교수 사직으로 파행이다. 필수·지방 의료는 초토화되고 있다. 서울 한복판서 응급실 뺑뺑이 끝에 숨진 환자, 수술 못 받고 나앉은 암 환자 이야기가 괴담처럼 돈다. “응급실 갈 일 안 생기게 조심해라” “절대 아프지 마라”가 인사가 됐다.
반면 초·중·고교 학원 가는 의대 진학을 꿈꾸는 예비 의사들로 미어터진다. 남보다 빨리 문제 푸는 기계가 되지 못하면, 안정적 고수익 평생 직장을 놓쳐 하류 인생으로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낳은 ‘의대 오징어 게임’에 아이들이 몰려든다. 의료 대란과 의대 광풍, 모순된 두 풍경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
정규 과정의 14배속 선행까지
초등 의대반은 의대 선호가 본격화된 20여 년 전 사교육 1번지인 강남 대치동에 처음 등장했다. ‘영재반’ ‘SKY반’ ‘아이비리그반’ 등 학원가 최상위권 별칭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난 5~6년 새 부동산 값이 뛰며 저성장·양극화가 심화하고 경기 지표가 악화하자 의대반이 확 늘었다. 그리고 지난해 말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이 거론되면서 “의대 가는 바늘구멍이 조금 커졌다”는 기대감으로 전국에 퍼졌다.
학원가의 공포 마케팅은 요즘 이렇게 진화 중이다. “의사 수가 늘면 개업 경쟁이 치열해져 ‘인 서울’ 명문 의대 간판이 더 중요해진다” “의사 파업이 길어지고 여론이 악화하면 정부가 결국 굴복할 것이다. 2026학년도부터는 의대 증원이 중단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의대 가기는 더 어려워진다” “앞으로 5년간 입시 오리무중이다. 무조건 빨리 시작해라”….
최근 시민 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현재 제주도를 제외한 16시·도에 초등 의대반이 개설된 것으로 나타났다. ‘초등 의대반’ ’초등 메디컬반’ ’초등 M클래스’ 등을 내건 학원이 89곳, 프로그램은 139건이었다. 지방 대도시와 읍·면의 보습 학원까지 ‘의대반’ 간판을 달지 않으면 장사가 안될 정도다. 학부모들이 “의대반 개설 안 하느냐” 채근하고, “18개월 아기 아빠인데, 의대 보내려면 뭐부터 해야 하냐”는 문의도 온다고.
초등 의대반의 특징은 정규 교육과정을 무시한 ‘수학 광속 선행’이다. 초등 의대반을 가려면 4~5세 때 영어 유치원을 다닌 뒤, 초등 3학년까지 대입 수능 영어 1등급 수준을 만들고 독서·한자 등 국어 기본을 다져놓는 게 기본. 그래야 변별력 높은 수학에 10년간 매진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에 따라 6세부터 초 1~2까지 사고력 수학을 떼고, 2~3학년엔 초등 수학 과정을 끝내며, 초등 고학년 땐 중학교 수학을 3번쯤 돌린 뒤 ‘수학의 정석’을 잡는다. 초등생이 미·적분과 기하 벡터, 물리 1 열역학 문제를 푼다. 교육학자들이 아동·청소년 성장 발달 속도에 맞춰 짜놓은 정규 교육과정 대비 통상 5배속, 최고 14배속까지 빠르다는 분석이다.
저성장 시대의 ‘메디컬 몰빵’
한국 의료는 우수하다. 한국 의사의 수입도 국민 소득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다. OECD 평균의 1.3배다. 전공의를 마친 30대 의사의 연봉은 3억~4억원. 최근 5년 새 필수 의료 의사 부족 등으로 두 배 올랐다.
의대 증원으로 이 연봉이 약간 낮아질 수는 있지만, 최소 월 1500만원 선인 페이닥터 초봉이 깨지지는 않을 거라고 의료계는 전망한다. 의사가 독점한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미용 의료 시장과 비급여·실손 보험 시장 거품에 메스를 대지 않는 한, 의사 면허증의 막대한 금전적 가치와 ‘의대 불패’ 신화는 건재하다는 것이다.
서울 서대문구의 워킹맘 김모(39)씨는 7세 아들을 영유-사립초-사고력 수학-초등의대반 등 대치동 코스로 착착 키우고 있다. “나도 괜찮은 대학 나온 화이트칼라지만 직업 안정성이 너무 떨어진다”며 “아이는 어떻게든 의사가 됐으면 한다. 매일 ‘수학 숙제 힘들다’며 울지만, 맛있는 것 사주며 다독이고 있다”고 말했다.
중학생 딸을 의대에 보내려 대치동 아파트와 학원비로 ‘영끌’한 아빠 이모(46)씨도 “대기업 취업이나 어설픈 전문직은 자리 잡을 때까지 부모가 계속 뒷받침해야 하지만, 의사 만들면 평생 편하다”며 “19세까지 바짝 고생하면 아파트 평수와 뷰가 달라지는데 그걸 왜 안 하느냐”고 했다.
주부 강모씨는 “어쨌든 의대반 다니면 공부 열심히 하고 집안 좋고 똑똑한 아이들과 친해질 것이니, 설사 의대를 못 가도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 5월 강남 한 초등학교 졸업 앨범 사진을 장래 희망 콘셉트로 찍게 했더니, 이름을 수놓은 흰 의사 가운에 파란 수술복까지 받쳐입은 아이가 절반이었다고 한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졸업 사진 촬영이나 핼러윈 분장 때도 의사가 늘었다.
사교육, 가붕개는 하지 말라고?
요즘 돌잔치 돌잡이 때는 청진기에만 알록달록한 색깔을 쓰거나 반짝이를 붙인다고 한다. 판사봉·마이크·축구공 등 다른 용품은 무채색으로, 멀리 두는 게 요령이다. 부모의 너지(nudge·유도)에 따라 아기가 마침내 청진기를 잡으면 “어머, 의사 되려나 봐” 웃음꽃이 핀다.
돌 전엔 딸랑이 대신 원목 병원 놀이 세트를 쥐여준다. ‘의대반 대비 유아 오감 놀이’도 등장했다. “이러다 태교 의대반도 나올 판”이란 말, 과언이 아니다.
대치동 한 입시 상담사는 “의대 열풍이 초등·유아까지 내려간 건, 어릴 땐 부모가 끌고 가면 아이가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니 수요가 공급을 만든 측면이 있다”며 “그렇지만 대치동이 전부 ‘기승전 의대’ ’닥치고 선행’은 아니다”고 했다.
실제 강남·고학력 학부모 사이에서도 “초등 의대반은 아동 학대” “부모의 불안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가스라이팅” “의대 정원을 더 늘려 의사 면허증 가치를 더 떨어뜨려야 의대 광풍이 잦아들 것” “20~30년 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왜 부모가 아이 직업을 정하냐”는 말이 나온다.
인재가 의대에 몰리면 우리 의료의 미래는 밝을까. 신경외과 전문의 이경석씨는 “최소 6~7년, 10년을 집중 투자해 의대에 들어갈 순 있겠지만, 좋은 의사는 절대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의사는 굶어 죽는 노숙자도 마약중독자도 치료해야 한다. 세상을 알고 다양한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의대반만 다닌 아이들이 그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은 과도한 선행 사교육을 집중 단속 중이다. 국회엔 ‘초등 의대반 금지법’이 발의돼 있다.
여기서 웃음벨 하나. 이 법을 주도하는 조국혁신당은 딸을 의전원에 부정 입학시켜 나라를 뒤집어놨던 전직 법무장관이 대표다. 그리고 관련 국민 서명운동을 벌이는 친(親)전교조 시민 단체는 유명 소아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간부가 아들을 대치동 대형 학원에서 다년간 단련시켜 영재고에 보내 논란이 된 곳이다. 계급 천장에 먼저 도달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공포를 키워놓고 ‘내로남불 사교육 자제 호소’라니, 먹힐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