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안에… 너 있다.”(드라마 ‘파리의 연인’)

달콤한 배경 음악이 흐른다. 이하 시적 허용. ‘너를 사흐랑해도~ 되겠니히~ 우리 시작해도 되겠니히~.’ 최고 시청률 57.6%, 대한민국 두 집 중 한 집은 이 드라마 때문에 주말마다 심장을 쥐어뜯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이상형의 상대가 “애기야, 가자!”(여자가 해도 멋있다)를 외치며 내 손을 잡아끄는 상상, 민망하다고? 속으로는 설렐 것이다.

로맨틱을 앞세우는 이런 여행사 중 일부는 출발할 때 성별과 나이, MBTI까지 고려해 조를 짜 준다. /온라인커뮤니티

드라마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된다. MZ가 로맨틱 연인 찾기 여행에 나섰다. 배낭 여행하듯 혼자 덜렁 가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듯 상대가 있어야 추파를 던져 보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그래서 간다, 해외 ‘패키지 여행’. 웬 패키지냐고? 중장년층이 가는 여행이 아니다. 해외에서 일반인들이 펼쳐 나가는 본격 연애 리얼리티 쇼가 시작되고 있다.

◇남녀 두 자리씩 남았다

솔로 1년 6개월 차 직장인 이모(32)씨는 연차를 박박 긁어 오는 추석 연휴 파리와 영국 런던으로 8박 9일 패키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신청한 패키지는 조금 특별하다. 모집 대상은 2005년생부터 1986년생까지. 20~30대만 신청할 수 있는 데다 남녀 인원을 동일하게 맞춰 가는 일명 짝 찾기. ‘로맨틱 패키지 여행’이다.

그가 신청한 여행사는 심지어 실패(?)한 사람을 위한 할인도 해 준다. 2회 차 이용 시 10만원 할인, 3회 차 또는 그 이상 이용 시 매 20만원을 깎아준다. 실패를 예감했기 때문일까. 이씨는 홀린 듯 250여 만원을 주고 신청했다. 그는 “미팅이나 소개팅은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직장인이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하기엔 기회가 없지 않느냐”며 “2회, 3회까지 가지 않도록 절치부심해서 솔로 탈출을 하고야 말겠다”고 했다.

세대별 유럽 여행을 내세우는 A업체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9월 15일) 스페인 및 안달루시아’ ‘(9월 21일) 프랑스 및 스위스’ 등 100% 출발 확정이라는 문구와 함께 날짜와 여행 국가가 뜨는 건 여느 여행사와 같았다. 하지만 ‘남2 여2′ ‘남4 여3′ 같은 생소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여행별로 남녀 각각 두 자리, 혹은 남자 네 자리와 여자 세 자리 등이 남아 있다는 의미. 성비를 맞추는 것이다.

일러스트=송윤혜

◇MBTI는 왜 묻나요?

“즐거운 여행을 위해 MBTI를 적어 주세요.” 패키지 여행 가는데 MBTI는 왜 묻는 걸까. 분위기 띄우는 외향형 ‘E’면 합격이고 내향형 ‘I’는 탈락인 걸까. 아니, 이게 다~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 로맨틱을 앞세우는 여행사 중 일부는 출발할 때 성별과 나이, MBTI까지 고려해 조를 짠다. 계획적 ‘J’와 즉흥적 ‘P’는 여행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성격이 맞으면 사랑에 빠지기 쉽다.

이런 패키지 여행 대부분은 관광 버스 타고 우르르 이동하는 낮 시간 시티 투어가 없다. 인솔자는 야경 투어 등 동행이 필요할 때만 함께한다. 낮에는 같은 조 사람끼리 삼삼오오 자유 여행을 하고, 쉬고 싶을 땐 쉰다. 안전을 보장하면서도 기상 시간이나 방문 장소 등은 원하는 대로 구성해 자유 여행을 바라는 젊은 층 수요를 기가 막히게 공략한 것.

‘NO 쇼핑, NO 옵션.’ 관광지 입장이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가격도 유럽 기준 10박 내외에 200만~300만원 선으로 저렴한 편이다. 입장료가 필요한 관광지는 본인이 따로 챙겨간 돈으로 해결한다. 물론, 안 가도 된다. 그러니 호텔 수영장에서 오전 시간을 느긋하게 보내고 싶은 이와 박물관·유적지 등을 돌아보고 싶은 이가 모두 만족할 수밖에.

잠깐, 40대는 없냐고? 40대 패키지 여행도 있다. 구태여 짝을 찾으려고가 아니라 친구를 만들기 위해 가는 경우도 있다고. B업체 홈페이지 후기란에는 “스페인 가서 한국 친구 19명 만들고 왔다” “낯선 장소에서 경험을 공유하다 보니 속 깊은 이야기를 터놓게 되더라” 같은 후기가 가득. 친구끼리 신청하기도 하지만, 혼자 가는 경우가 더 많다. 저가 여행인 만큼 모르는 사람과 2인 1실을 쓸 수 있지만, 그것도 재미 아닐까. 청춘이잖아? 40대도!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랜덤~ 게임! 술이 들어간다, 쭉~ 쭉쭉쭉~. 로맨틱 여행지에서 술이 빠질 수 없다. 밤이면 파리 에펠탑이나 이탈리아 콜로세움 앞에서 MT의 성지 대성리 못지않은 술 게임이 펼쳐진다. 젊음을 격렬하게 불태우며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시간. 20대는 MT 생각나서 좋고, 30대는 대학생 시절 생각나서 좋고, 40대는… 그냥 놀아서 좋고. 이러다 은근한 눈빛 교환이 일어나면 다음 날 자유 여행 시간에 둘만의 데이트 시간을 가지거나 말거나.

MZ가 로맨틱 연인 찾기 여행에 나섰다. /온라인커뮤니티

인기가 많다 보니 업계 1·2위를 다투는 여행사들도 중장년층 대신 청년층을 겨냥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세계 60국 이상의 해외 지점을 보유하며 업계 1위로 손꼽히는 C업체는 최근 ‘30대 버킷리스트’ 패키지 상품을 내놨다. 국내 5000여 개 오프라인 대리점을 두고 있는 D업체도 테니스나 축구, 위스키, 트레킹 등 관심사가 같은 청춘을 위해 ‘콘셉트 투어’ 상품을 쏟아내는 중.

모두투어가 만든 미국 패키지 여행 상품은 출시 한 주 만에 완판됐는데, 예약자의 80%가 20~30대다. 하나투어가 내놓은 ‘밍글링 투어 몽골 로드 트립’은 오픈 3분 만에 마감됐다. 예약자는 모두 20~30대.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행지 선택부터 취향이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겠느냐”며 “며칠간 여행지에서 함께 생활하며 서로 관찰할 수 있는 만큼 1~2시간 대화를 나누는 소개팅보다 깊은 만남을 추구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