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지난달 2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조순 박사 서거 2주기 추모식장에서 ‘경제학 원론’ 최신판을 펼쳐 보이고 있다.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제자들은 이날 개정판을 고인 영전에 헌정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조순(1928~2022) 전 경제부총리가 ‘경제학원론’을 처음 펴낸 것은 1974년, 50년 전이다. 당시 책값은 3000원. 780쪽 두께를 감안해도 싼 편은 아니었다. 짜장면 한 그릇이 150원, 그해 개통한 지하철 1호선 기본 요금이 30원인 시절이었다. 하지만 책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우리말로 제대로 된 경제학 교과서의 등장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을 공부하려면 선택의 여지없이 존 힉스의 ‘경제학입문’,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 원서로 시작했어야 할 때 조순의 ‘경제학원론’이 나왔다. 경제학도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나 공학도에게도 널리 읽혔다. 다 읽지는 않더라도 책꽂이에 한 권쯤 있어야 하는 책이었다.

헌책방 거리를 르포한 기사에서 이 책의 인기는 이렇게 묘사된다. “조순 전 서울대 교수의 ‘경제학원론’은 헌책방 골목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복사기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여겨지던 이 책을 확보하기 위해 헌책방 주인들 사이에서 피말리는 경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조순은 생전에 ‘경제학원론을 왜 썼냐’는 질문을 받았다. “기존 책들은 경제는 뭐다, 화폐는 뭐다, 이런 걸 단순히 설명하고 짜깁기하는 수준이었다고 할까. 논리적인 체계도 없었고, 내용을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마르크스 사상을 경제학의 핵심으로 아는 사람도 많았다. 현대 경제학이 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정성껏 한 권만 공부하면 경제학 전반을 개관할 수 있는 책이 꼭 필요했다.”

왼쪽부터 조순 경제학원론 초판,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공동저자가 된 4판, 전성인 홍익대 교수와 김영식 서울대 교수가 각각 합류한 7판과 8판, 그리고 최근 나온 12판.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우리말로 된 최초 입문서

그는 2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조순 경제학원론’의 개정 12판이 지난달 새로 나왔다. 타계한 저자의 책이 개정판으로 세상에 다시 나오는 것은 이례적이다. ‘경제학원론’에 차례로 공동 저자로 합류한 그의 제자들이 책을 새로 써 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동 저자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한 조순의 제자들이 지난달 2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 모여 ‘경제학원론’ 최신 개정판을 스승의 영전에 바쳤다. 정 전 총리는 “사은지심(師恩之心)을 담았다”고 했다. 그에게 50살이 된 책 이야기를 물었다.

-경제학원론은 어떤 책입니까.

“학부 때 조순 교수님의 4학점짜리 ‘경제학 특강’을 들으면서 적은 노트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은 선택에 관한 학문이다’ ‘경제사회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는 것 또한 경제정책이다’ 같은 말들이 적혀 있어요. 평생 남는 그런 강의들이 ‘경제학원론’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이 책이 왜 필요했을까요.

“1960년대 후반에는 우리말로 된 추천할 만한 경제학 입문서가 없었어요. 기껏해야 일본 책을 우리말로 옮긴 것들이었죠. 번역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어떤 책은 우리끼리 ‘일본 책 그냥 그대로 베끼기는 미안해서 이리저리 잘라서 이어 붙이다가 풀칠을 영 잘못한 것 같다’고 놀리곤 했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60년을 바라본다. 1967년 가을, 조순 교수는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로 부임했다. 정운찬은 서울대 상대 2학년. 그는 “영어 독일어 한문으로, 칠판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빼곡하게 판서를 채우던 선생의 열정에 단박에 반했다”고 말했다.

연속 2시간 강의 후 쉬는 시간에 칠판을 지우곤 했던 학생이 정운찬이었다. 어느 날 칠판 지우던 그를 스승이 발견했다. 조순 교수는 그 순간을 ‘정운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으로 꼽는다. 정운찬이 대학 졸업 후 한국은행에 들어가도록 추천서를 써 준 이도, 유학길에 오르도록 권유한 이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과정을 끝내고 컬럼비아대 교수로 있던 그를 서울대 교수로 불러들인 이도 조순이었다. 그리고 조순은 정운찬을 ‘경제학원론’의 공동저자로 참여시켰다.

-스승의 책에 손을 대기가 쉽던가요.

“제가 1986년에 경제학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순 경제학원론에 따른 경제학 스터디 가이드’라는 책을 냈어요. 초학자들이 경제학원론을 더 쉽게 배울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죠. 2년 뒤엔가 경제부총리로 가면서 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경제학원론’을 개정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며 도와 달라고 하셨죠. 경제학의 새 흐름을 참고해 1년여 동안 작업해 가져다 드렸더니 ‘책이 너무 많이 수정됐다’며 저를 공동저자로 영입했습니다.”

'경제학원론' 출간 50년 기념행사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세대간 단절이 없는 책”

나중에 정운찬 교수는 서울대 총장이 된 후 ‘경제학원론’ 개정 작업에 자신의 서울대 첫 제자인 전성인 홍익대 교수를 영입했다. 후에 또 다른 제자인 김영식 서울대 교수가 합류해 4인 공동저자 체제가 됐다. 전성인 교수는 “조순 교수님이 ‘3대가 이어졌는데도 세대 간 단절이 없는 책이 됐다’고 좋아하셨다”고 했다.

50년 동안 책은 많이 변했다. 초판 1장은 ‘태고의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수많은 경제문제에 간단없이 부딪혀 왔다’로 시작한다. 50년 뒤 나온 최신판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생활은 물질적 수단 없이는 지탱될 수 없다’가 첫 문장이다. 한층 읽기 편해졌고, 한자는 거의 사라졌다. 초판에는 없던 새로운 경제이론도 많이 포함됐다. 김영식 교수는 “읽기 쉬우면서도, 무게감을 잃지 않게 고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책이 예전만큼 많이 팔리지는 않는다. 그동안 경쟁 도서가 많이 나왔다. 벽돌 교과서보다는 유튜브 영상이 대학 교재의 대세가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학의 위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조순 교수는 생전에 “경제학은 당면한 현안 문제와 관련(relevance)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엔 경제학이 있으나마나 사회는 잘 돌아갑니다. 경제학이 너무 정밀함만을 추구한 대가지요”라며 안타까워했다. 제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경제학이 위기라는 말이 많습니다.

“요즘 대학 교수들이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역사의식도 있고, 제도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경제학 하는 사람들이 경제를 잘못 풀어내요.”

-우리 경제도 위기에 빠진 것 아닌가요.

“성장과 분배가 조화로워야 합니다. 한국 경제라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데, 한국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요. 고등학교 때 스코필드(1889-1970) 박사는 저에게 ‘소득 격차 등 각종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하면서 살라’고 했습니다. 제가 동반성장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만들자고 이명박 대통령을 설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스승을 떠올릴 때는 언제인가요.

“요즘은 매일 생각납니다. 사회가 많이 분열됐어요. 사회에서 조화와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그래도 한소리 하셨을 텐데, 그러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요즘 보면 사회의 조화와 균형이 너무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경제학원론 공동저자인 전성인 홍익대 교수, 정운찬 전 국무총리, 김영식 서울대 교수(사진 왼쪽부터).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조화와 균형 강조한 스승

정 전 총장은 “한학에 정통했던 조순 교수님은 평소 조화와 균형을 강조했고, 중용(中庸)을 자주 인용했다”고 말했다. 교수인 제자에게 “학생들에게 항상 가르쳐 주세요. 넓게 지식을 배워야 하고(博學之·박학지), 자세하게 의문을 제기해야 하고(審問之·심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愼思之·신사지),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변론할 수 있어야 하며(明辯之·명변지), 독실하게 실행해야 한다(篤行之·독행지)고 일러 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중용 20장의 한 부분이다.

정 전 총리를 비롯한 조순 ‘경제학원론’의 남은 공동 저자들은 이번에 나온 최신판에 ‘경제학자와 아이디어’라는 코너를 만들었다. 조순 교수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등에 대해 생전에 쓴 글을 거기 수록했다. 제자들은 스승이 타계한 지 2년이 지난 후에도 스승과 함께 책을 새로 쓰고 있는 셈이다.

그 코너에서 조순 선생은 애덤 스미스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기심이 순조롭게 공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분권적 사회제도와 공평한 법규, 독과점이 배제된 경쟁체계와 민주적인 사회질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 양상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적지 않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정 전 총리를 비롯한 조순 ‘경제학원론’의 남은 공동 저자들은 이번에 나온 최신판에 ‘경제학자와 아이디어’라는 코너를 만들었다. 제자들은 스승이 타계한 지 2년이 지난 후에도 스승과 함께 책을 새로 쓰고 있는 셈이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