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한복을 안 입어본 사람은 꽤 있다. 하지만 매일 한복을 입는 사람은 몇 없다. 스무 살에 한복이란 새로운 세계를 만나 한 우물만 판 한복 디자이너 황이슬(37)씨는 1년 365일 한복 차림이다.
“한번은 어떤 꼬마가 ‘엄마, 저 언니는 진짜 이상해. 추석도 아닌데 한복을 입었어’ 이러는 거예요. 이게 보통의 인식이구나 했죠. 그때 생각했어요. 매일 입어도 좋은 한복을 만들어야겠다고. 저는 날마다 명절이에요, 하하.”
그렇게 18년이 지났다. 처음엔 패션 디자인 쪽으로는 배움이 전무했기에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처음엔 한복이 그저 예뻐서 좋았어요. 우리 전통의 것을 알리겠다고 호기롭게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 페어(박람회)까지 갔죠. 결과가 어땠냐고요? 50만원짜리 오더(주문) 한 건 받았어요. 그런데 또 가고 또 갔어요. 수억원을 썼습니다. 번 돈을 다 까먹으니까 직원들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물었어요. 세 번째 가니까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한복은 예쁘다, 그런데 입을 만하진 않다는 것을요. 관심은 높았지만 패션 시장에선 먹히질 않았어요.”
황씨는 모던 한복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치렁치렁한 치마를 걷어 올리지 않고도 맘 편히 화장실에 갈 수 있고, 소매를 걷지 않고도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고, 막 빨아서 입을 수 있는, 그런 한복을 만들었다. 방탄소년단(BTS)도 그가 만든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역동적인 춤을 췄다. ‘제발 와서 패션쇼 한번 해달라’는 곳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골라서 갈 정도다.
“목표요? 그저 살아남는 거예요. 한복이 청바지처럼 아무나 쉽게 입을 수 있는 옷이 되는 그날까지요. 한복도 섹시할 수 있고 펑키할 수 있고 스트릿할 수 있고 자유분방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농대생이 한복 디자이너가 된 이유
대학은 한복과 전혀 상관없는 농대를 다녔다. 산림청 공무원이 되길 바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만화 동아리에서 코스프레 축제에 참여했던 게 한복을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만화 ‘궁’의 여자 주인공이 입은 짧은 기장의 한복을 따라 만들었는데 반응이 뜨거웠던 것. “옷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받으니까 이 길이다 싶었어요. 바로 창업을 했죠.”
2006년 대학 1학년 때 일이었다. “한복에 빠진 뒤로는 도서관에서 살았어요. 아는 게 없으니까 책으로 배웠죠. 의류학과, 미술학과, 경영학과 수업에 들어갔고요. 한복은커녕 옷을 만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자’는 심정이었죠. 지금 돌아보면 제가 완전히 미쳐 있었어요.”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한복을 만들었나요?
“엄마가 저를 낳기 전까지 한복 바느질 기술자였대요. 아버지는 평생 이불집을 했고요. 그 DNA를 받았나 봐요. ‘궁’ 속 퓨전 한복을 만들 때 저는 사실 감독이었고, 엄마한테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했고요.”
-한번 만들어봤다고 창업까지 하다니요.
“원래 성격이 소극적이었어요. 그때 그 한복을 입고 칭찬 세례를 받으니 자신감이 쭉쭉 올라간 거예요. 나도 이렇게 주목 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했죠. 그날부터 한복은 저에게 자긍심을 주는 옷이 됐어요. 나를 더 돋보이게 하는 옷 말이에요.”
-한마디로 겁이 없었군요.
“덕후 기절이 있어 한번 꽂히면 엄청 파고들어요. 한복을 또 만들려니까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만든 그 퓨전 한복을 팔아보자 했는데 거짓말처럼 그게 팔리는 거예요!”
-누가 사갔나요?
“인터넷에 올렸는데 5만원에 사갔어요. 너무 신기했지요. ‘도대체 이런 옷을 왜 사냐’고 물었어요. 희한하잖아요. 저도 궁금했죠. 미국으로 유학 가는 학생이었는데 파티용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전통 한복은 파티 무드에 안 맞고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네가 만든 옷이 나왔다고 하는 거죠. 그분이 제 첫 고객이었죠(웃음).”
-장사가 잘됐나요?
“잘됐겠어요? 하하. 처음엔 손지갑 등 잡동사니를 죄다 팔았어요. 그런데도 한 달에 20만원이나 팔았나. 아버지가 ‘내가 너 이런 거나 하라고 공부시킨 줄 아느냐’고 눈치를 줬죠. 창업하고 몇 년은 아버지 이불집 한편을 썼거든요. 그러다가 매출이 확 뛰는 터닝 포인트를 만났어요.”
-어떤 거죠?
“어느 아기 엄마가 ‘돌잔치 때 한복을 입긴 해야겠다, 전통 한복은 싫다, 네가 만든 한복이 현대적이고 드레스 같아서 마음에 든다’며 연락한 거예요. 그런데 사봤자 한번 입고 말거니까 빌려달라고요. 판매가의 3분의 1만 받고 대여를 해줬는데 그분이 맘카페에 후기를 남긴 뒤 문의가 폭주했어요. 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꽤 됐죠. 아버지도 ‘오늘은 택배 몇 개 나가냐. 내가 좀 도와주랴?’ 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뀌더라고요.”
-그러다가 한계를 느꼈다고요?
“제가 하는 게 패션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대여 한복은 코스튬일 뿐이니까요. 제 꿈은 특별한 날 입는 한복이 아니라 한복의 대중화였거든요. 내가 이토록 좋아하는 한복을 더 많은 사람이 입었으면 좋겠다, 이거였는데 다른 길로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2014년 과감하게 대여 한복을 끝내고 생활 한복으로 전환했습니다. 간판도 제 이름을 딴 ‘리슬’로 바꾸고요.”
-하기야 경복궁 같은 관광지나 가야 한복 한번 입어보죠.
“제가 만드는 한복과는 달라요. 그것도 하나의 문화예요. 여행지에서 특별한 경험을 위한 대여용 한복은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요. 제가 김치찌개 만든다고 해서 ‘파스타는 다 사라져라’ 이건 아니에요. 저는 출근할 때 입는 한복을 만드는 것뿐이죠. 그래서 매장이 전주 한옥마을이 아닌 아중리에 있고 경복궁이 아닌 홍대에 있는 거고요.”
◇냉대받던 한복, 이제 오픈 런해서 산다
그에게도 한복은 좋지만 불편한 옷이었다. 20대 때 ‘1년에 100번 한복 입기 프로젝트’를 하다 실패한 경험도 귀한 자산이 됐다. “3일에 한 번꼴로 입으면 됐으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매번 옷고름 묶는 것도 지치고 빨래통에 한복을 넣어놨다가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도 맞아보고요. 그게 현실이었어요. 그래서 매일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만든 거죠.”
여러 차례 나간 해외 패션 페어에서의 무관심도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전통 한복의 고유함으로 승부하려 했는데 가고 또 가도 반응이 싸늘한 거예요. ‘한복이 예쁜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입고 돌아다니라는 거냐’였죠. 완전한 인식 전환이 필요했어요.” 십수년간 매년 100벌 이상씩 수천벌의 한복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최근엔 오픈 런 사태도 일어났다. 서울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었는데 줄이 50m가량 늘어섰다. “깜짝 놀랐어요. 에르메스, 샤넬 사려고 줄 선다는 기사를 봤을 때 ‘저런 욕망의 대상이 됐으면 좋겠다’ 했는데 어느새 한복도 ‘핫’해진 거예요.”
-해외 패션 위크에 참여하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누가 오라고 해서 간 건 아니고요, 하하. 그냥 막연하게 도전했어요.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 이렇게 대표적인 곳 중 처음엔 가장 콧대가 높은 밀라노를 갔죠. 직감적으로 여기서 인정받으면 다른 데서도 인정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요. 2016년엔 서류 심사에서 뚝 떨어졌고요. 준비가 미흡했던 거죠.”
-그 다음 해에 갔어요?
“한복의 세계화를 외치러 갔다가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페어 부스비만 2000만원에 통역 등 체재비까지 5000만원 이상 들어갔어요. 비용 아낀다고 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호텔에서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도 수주가 없었어요. 50만원짜리인가 하나 받고요.”
-그런데 또 갔잖아요.
“속으론 씁쓸했는데 두 번째, 세 번째는 나아지겠지란 심정으로요. 파리, 뉴욕까지 갔죠. 그렇게 몇억원을 까먹었어요. 회사가 휘청일 정도였고 팀원들도 회의적이었지요. 꿈은 원대했지만 결과는 비참했죠.”
-왜 그랬을까요?
“바이어들이 와서 코리아? 하면서 다 알아봐요. 그런데 주문은 안 해요. 이유는 딱 하나였죠. 상품성이 부족하다는 것. 저는 한국을 알리고자 전통적인 걸 가져갔는데 그곳은 냉정한 비즈니스의 세계였어요. 멕시코 놀러 가서 멕시코 전통 옷을 사오진 않잖아요. 그 문양이 새겨진 티셔츠는 사와도요. 한마디로 ‘한복 이뻐, 그런데 이걸 어떻게 입고 다녀’ 이런 분위기였죠.”
-칼을 갈았겠네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생각했어요. 수많은 바이어의 외면과 냉대로 모던 한복의 방향성에 더 강한 확신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연구도 많이 했고요.”
-2022년에 또 갔죠?
“다시 밀라노로요. 이번엔 12개 착장을 패션쇼로 무대에 올렸어요. 목표는 딱 하나였어요. ‘이거는 사 입을 수 있겠다’는 평가를 듣는 것. 좌석이 꽉 찼어요. 엘르, 보그, 바자 등에서 기자들이 와서 기사를 써줬고요. 유럽의 한 패션 잡지사 회장은 ‘영, 트래디셔널. 이 두 글자로 패션쇼를 정의할 수 있겠다. 당장 팔아도 손색이 없다’고 극찬했어요.”
-대단한 열정이네요.
“저는 확신이 있어요. 한국 사람만 한복을 입어선 안 된다,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확신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K팝 가수가 있어요. 저만 알면 되겠어요? 세계 모든 사람이 이 오빠의 멋짐을 알았으면 좋겠어서 막 알리게 되잖아요. 저도 그런 마음으로 한복을 널리 알리고 싶었죠.”
-BTS도 리슬을 입었어요.
“아주 비밀리에 스타일리스트가 연락이 왔어요. 굉장히 동작이 잘되는 한복을 찾고 있다고요. 누구라고 안 밝히고요. 저희도 ‘누군지 모르면 협찬은 못 해준다’고 했더니 나중에야 BTS라고 하는 거죠. BTS의 레전드 무대로 꼽히는 MMA에서 저희 한복을 입고 ‘Idol’이란 곡을 불렀더군요.”
◇명성만큼 악플 세례도
명성이 생기자 욕도 많이 먹었다. ‘저게 무슨 한복이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수준의 디자인이다’ 같은 지적은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익숙해졌다. “패션은 경계가 없잖아요. 한복도 어떤 틀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복은 단아해야 한다는 이미지에 국한하지 않았으면 해요. 깃이, 또는 고름이 없어도 한복일 수 있고요. 저고리를 카디건처럼 풀어헤치고 입을 수도 있고요. 치마를 가슴 위까지 올려서 원피스처럼 입어도 되는 거예요.”
-한복에 꼭 들어가야 하는 요소가 있나요?
“단골 질문이에요. 마치 ‘어디까지가 한식인 거죠?’와 비슷한 거죠. 한복의 정의는 한국인의 옷이에요. 통상 조선 시대 후기의 옷을 말하는데, 저는 그 시대를 초월해 한국인의 얼이 담겨 있는 형태의 옷이라면 죄다 한복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엔 정부에서도 한복 입기 활성화를 추진하잖아요.
“토론회나 포럼 초청 연사로 가보잖아요. 교수, 공무원 전부 양복을 입고 앉아 있어요. 속으로 ‘한복 입기 활성화라며 입는 시늉이라도 하던가’ 해요. 코미디죠. 법제화를 하자, 유명인에게 입혀서 홍보하자, 소상공인 지원하자 등 내용은 좋아요. 그런데 전 또 그러죠. ‘그냥 이 자리에 입고나 오지. 그럼 될 일인데.’ 이게 현실이니 안타깝죠.”
-그래도 한복 만들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언제 하나요?
“BTS가 입었을 때요, 하하. 농담이고요. 길 가다 우연치 않게 제가 만든 한복을 입은 사람과 마주칠 때죠. 지하철 플랫폼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왕왕 봐요. 일상 속에서 내 꿈이 실현되고 있구나 하죠.”
-남편도 한복을 입고 다니나요?
“연애 시절에 제가 한복만 입는 것도 유니크해서 좋다고 했어요. 남편이 건축 일을 하는데 미팅하러 갈 때면 제가 만든 한복 재킷을 입어요. 상대방이 옷에 관심을 보이면서 회의 분위기가 유연해진다고 좋아해요. 보통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하면서 한복에 중독되거든요.”
-후회한 적은?
“당연히 없죠. 여기가 제 본진인데요. 다만 시장이 너무 작아서 답답할 때는 있어요. 우리나라 한복 업계 규모가 연 7000억원 정도 돼요. 아파트 하나 만드는 값이죠. 한편으론 내가 이걸 처음으로 깨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황이슬로 인해 없던 길이 생겼어, 이 말이 듣고 싶어요.”
모던 한복 세계화의 최전선에 선 황이슬씨는 지금 미국 또는 중동 쪽에 한복 가게를 열 궁리를 하고 있다. 만약에 연다면 해외 최초의 한복점이다. “한복의 위상도 우리나라처럼 완전히 달라졌어요. 배고팠던 시절과는 판이해요. 이젠 해외에서 제발 좀 와달라고 할 정도예요.” 초청받아 외국에 나가면 “너 한복 만드는 사람이지? 내가 네 인스타그램 팔로하잖아”라며 반기는 팬들을 거리에서 마주친다. “유럽에서 제가 만든 한복을 입은 신혼부부 사진을 찍어주면서 물어물어 저를 찾아왔다는 외국인도 있었어요. 너무 신기한 현상이죠. 한복은 저에게 밥 같은 존재예요. 자는 시간을 빼면 머릿속이 온통 한복으로 가득 차 있어요. 한복이 당당하게 일상 패션의 한 장르가 되는 그날까지 뛰어야죠, 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