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는 맛보다 목 넘김이 중요하던 1990년대 초. 밸런타인 30년과 조니워커 블루는 최고급 위스키의 대명사였다. 당시 병당 가격은 약 50만원대. 직장인 평균 월급은 60만원 미만. 밥 굶고, 한 달 월급을 고스란히 녹여야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고위 공직자나 재벌가 상류층 아니면 구경조차 힘들었을.
위스키 종류도 적었다. 대부분 정체 모를 밀주와 유사 위스키 정도. 이마저도 군인이나 외국을 다녀온 친지, 지인이 큰맘 먹고 사다 준 선물이었다. 오죽하면 밸런타인 30년은 ‘주인이 30번 바뀌어야 마실 수 있었다’고. 특별한 날 꺼내기 위해 고이 아껴둔 술은 결국 선물에 선물로 이어지던 시절이다. 조니 워커의 행보도 비슷했다. 국내 주류 수입이 개방되면서 비로소 위스키가 전성기를 맞았다.
오늘날 조니 워커와 밸런타인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위스키다. 2023년 기준 조니 워커는 2210만 상자가 팔렸고 그 뒤를 밸런타인이 820만 상자. 국내에서 특별한 날, 명절 선물용으로 가장 많이 오가는 위스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조니 워커 블루와 밸런타인 30년, 둘 중 맛은 어떤 게 더 좋을까?
두 제품 모두 블렌디드 위스키다. 즉, 싱글 몰트와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서 만든 것. 위스키 제조에 쓰이는 원료가 보리면 몰트 위스키, 호밀·옥수수 등 곡물을 사용하면 그레인 위스키로 분류한다. 싱글 몰트는 대량 생산이 어렵고 증류 과정에서 맛과 향 등 원재료의 손실이 적어 생산 단가가 비싸다. 그레인 위스키는 연속식 증류를 통해 대량 생산과 경제성에 초점을 둔다. 문제는 반복적인 증류 과정에서 원료가 가진 고유의 맛이 점점 옅어져, 위스키의 풍미가 떨어진다는 점.
블렌디드 위스키는 싱글 몰트에 비해 개성은 약하지만, 목 넘김이 부드러워서 마시기가 편한 게 특징이다. 원래는 19세기 중반, 품질이 고르지 않던 싱글 몰트를 섞어 균일화된 품질의 위스키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두 브랜드 모두 당시 식료품점으로 시작해 여러 위스키를 섞어 팔면서 사업을 시작한 게 우연은 아니다. 보통 30~40, 많게는 100가지 넘는 위스키를 혼합해 평균적인 맛을 낸다.
조니 워커의 가장 고급 라인인 블루는 1992년 마스터 블렌더인 짐 베버리지에 의해 탄생했다. 비록 숙성 연수 표기가 없는 나스(None Age Statement) 제품이지만, 한때 15년에서 60년 이상 숙성된 원액이 들어가 있었다. 스카치 규정상 숙성 연수가 가장 낮은 원액을 기준으로 연도를 표시한다. 15년 된 원액과 60년 된 원액을 섞어 만들었다면 15년으로 출시해야 한다.
맛은 말린 과일과 꽃, 바닐라 풍미가 중심을 이루고 끝에서 신사적인 훈연 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린다. 위스키 애호가들에게는 피트, 즉 훈연 향이 감초 같은 역할을 하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감점 요인이 될 수 있다.
밸런타인 30년은 최소 30년 이상 숙성된 원액이 섞여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잔에 코를 대면 가벼운 우디함과 먼지 쌓인 책방 사이로 과일 향이 코끝을 스치는 듯하다. 입에서는 잘 익은 청사과와 꿀 같은 초콜릿 풍미가 기분 좋게 나타난다. 목 넘김은 과장 좀 보태서 물보다 부드럽다.
정리하자면, 평소 싱글 몰트나 훈연 처리된 위스키가 익숙하다면 조니 워커 블루가, 위스키 경험이 적고 높은 도수가 부담스럽다면 밸런타인 30년이 올바른 선택이다. 평소 위스키에서 발견하지 못한 꽃과 과실 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어렵다면 술잔에 큼지막한 얼음을 하나 넣어보자. 블렌디드 위스키 특유의 쓴맛은 온데간데없고 달콤함만 남아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블렌디드는 온더록이 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