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삶을 도모하고 죽음을 걱정한다. 흑돌과 백돌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바둑판에도 온갖 감정이 일렁인다. 좌절, 번뇌, 고통, 기쁨, 막막함, 공포, 분노…. 두 대국자 사이의 거리는 45㎝. 불안을 감추는 것도 실력이다. 이윽고 시간은 바닥나고 초읽기가 시작된다. 이럴 때 실수는 치명적이다. 아흔아홉 수를 잘 둔 바둑도 한 수에 그르칠 수 있다.
“엉망진창인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가 차라리 나아요.”
바둑으로 세계를 정복한 스물네 살 청년이 말했다. 프로 통산 1034전 817승 1무 216패(지난 10일 기준)를 거둔 신진서 9단. 올해 초 농심배에서 ‘끝내기 6연승’으로 한국의 우승을 이끌고 지난달 란커배에서도 챔피언에 오른 세계 1인자가 “패배가 승리보다 나을 때가 있다”고 하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는 “실패를 통해 내 단점을 고쳐나갔다”며 “패배에서 깨달음을 얻고 내 바둑은 더 성숙해졌다”고 했다.
신진서가 첫 자서전 ‘대국: 기본에서 최선으로’(휴먼큐브)를 펴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운영하는 바둑 학원에서 상대의 돌을 따먹는 재미에 빠진 그는 1년 만에 학원 형들을 모두 꺾어버렸다. 날마다 인터넷에서 강자들과 싸우고 어린이 대회를 휩쓸자 “부산에 신동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퍼졌다. 그는 LG배에서 첫 메이저 타이틀을 따낸 2020년부터 ‘신진서 전성시대’를 열었다. 바둑돌 대신 펜을 잡은 세계 1인자는 바둑판에서 보낸 20년을 복기해 책에 담았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미생으로 태어나 완생을 꿈꾸기는 사람도 매한가지다. 인공지능(AI)과 일치율이 높아 ‘신공지능’으로 불리는 이 승부사와 지난 12일 마주 앉았다. 궁금했다. 독학으로 어떻게 초일류 기사가 될 수 있었는지,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패배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인간이 이길 수 없는 AI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준비한 포석을 신진서 앞에 펼쳤다.
◇마지막 눈물은 2020년
2000년생 신진서는 또래 중 두드러진 천재성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도장에 보내는 것 이상으로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2009년이 되자 어린이 바둑에선 적수가 없었다. 부모가 부산의 생업을 정리하고 서울로 온 2012년, 신진서는 영재입단대회를 통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책을 쓰면서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나요.
“유년기부터 ‘인간 신진서’에 대해, 바둑에 대해 돌아보게 됐습니다. 새삼 두 가지를 알게 됐어요. 바둑 외적으로는 굉장히 재미없게 살았구나(웃음),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바둑을 했구나. 어릴 땐 정말 날마다 고3 수험생처럼 전쟁하듯 뒀더라고요.”
-2011년 입단대회에서 고배를 마신 날, 집에 돌아와 매일 한 마리씩 먹던 통닭을 반마리만 먹었다고요?
“한 마리를 다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입단한 날은 두세 마리 먹었는지 묻자) 하하. 이론적으론 그래야 하는데 사실 큰 차이 없고요. 입단대회에서 떨어진 날은 살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할 만큼 괴로웠습니다. 많이 운 기억 말고는 다 삭제한 것 같아요.”
-충암중을 자퇴하고 또래와 완전히 다른 10~20대를 보냈는데.
“대학생이 부러운 부분은 당연히 있고요. 기본 지식이나 상식 외에도 사회생활을 학교에서 배운다고 생각해요. 저는 외로웠던 적이 많고 노는 데 대한 갈망도 있었어요. 단점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남들이 진로 고민할 나이에 저는 바둑만 뒀으니 잡생각이 안 드는 게 장점이죠. 다른 쪽은 미숙해도 바둑에선 성숙해졌고요. 이 길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혈기왕성할 때 바둑만 둔다는 것, 멋있기는 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울 것 같습니다.
“일반인 평균에 한참 못 미치죠. 열네 살에 지하철을 처음 탔어요. 그런데 중국으로 시합을 가느라 비행기는 빨리 혼자 탔지요. 부산에 사는 동안 해운대도 안 가봤어요(웃음). 그래도 사회생활이나 지식, 상식이 부족하지만 나중에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는 길이 평범할 순 없고 또 평범해서는 안 되죠.”(그는 책에 ‘내 삶의 어떤 부분은 너무 빨랐고 어떤 부분은 너무 느렸다’고 썼다.)
-한때의 화두는 참을성이었지요?
“바둑에서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고 차분해야 할 때 차분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단점이 꼭 단점만은 아닙니다. 제 과격한 바둑에 잘 녹여내면 폭발력이 생기는 것 같거든요. 너무 어릴 때 아이를 어른들 보기 좋게 가꿔놓으면 스스로 깨닫고 수정하며 성장하는 속도가 느려질 수 있습니다. 저는 단점들을 계속 고쳐나가며 발전한 게 아닌가 싶어요.”
-바둑에 지고 마지막으로 운 것은.
“2020년 중요한 대국에서 지고 눈물을 흘렸어요. 기사들은 어릴 적부터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요. 이겼을 땐 ‘그냥 쉬고 싶다’ ‘침대에 눕고 싶다’ 생각해요. 감격은 뒤늦게 찾아오고요. 결승전은 방송 대국이고 시상식을 바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꾹 참고 있다가 집에 와서 쏟아냅니다.”
-지난해 란커배 결승에서 역전패한 날 아프지 않았나요?
“어릴 적 단점(경솔함)이 튀어나와 망쳤을 뿐, 눈물이 나올 상황은 아니었어요. 울음은 최선을 다하며 집중하고도 졌을 때 터집니다.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패하면 저를 많이 질타해요.”
◇나는 계속 성장하는 기사
지금은 세계 랭킹 1위로 누구보다 ‘성숙한 바둑’을 둔다. 신진서는 “어릴 때와 비교할 수는 없고 아직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계속 성장하는 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책에 “어린 시절 바둑 세계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존재는 아버지와 인터넷”이라고 썼다.
-어릴 적 ‘일일 생활 계획표’도 유명한데.
“그것은 열 살 때쯤 혼자 만든 룰이에요. 매일 다 지켜진 건 아니고 그런 틀로 공부를 한 거죠.”
-바둑이란 무엇인지 묻는다면.
“바둑판에 돌을 놓는 놀이예요. 가장 쉬운 룰 속에 어려움이 있는 게임. 세계 최강 AI라도 완벽하지는 않고 아직 약점이 존재한다고 설명해요.”(추석 때 ‘농로 내비게이션 대란’처럼, AI 믿었다가 발등 찍힐 수 있다.)
-승부는 어떻게 결정되나요. 바둑 기사는 시간에도 굉장히 민감할 것 같은데.
“내 집을 잘 지어야 하고 상대의 집을 잘 부숴야 합니다. 일상에서는 느긋한 편이에요.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웬만해선 서두르지 않아요. 바둑판을 떠나면 반대입니다. 상대의 실수를 ‘기다려야 하는 게임’이고 또 내가 실수를 안 해야 하니까요”
-실수에는 어떻게 대처하나요?
“양궁이나 골프와 비슷해요. 양궁은 한 발 쏘고 나면 자기 실수를 금방 알잖아요. 바둑보다 더 괴로울 것 같은데 그 순간에도 평정심을 되찾고 집중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싶어요. 바둑도 실수를 하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데,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집중하는 게 실력의 일부분입니다.”
-열일곱 살 때까진 누굴 만나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고요?
“자신감이 넘쳤어요. 이창호 사범님이 메이저 대회에서 17번 우승하셨는데, 어린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지요, 하하(신진서는 메이저 7번 우승). 저야 속된 말로 피똥 싸며 이룬 우승이죠. 철없이 기고만장했어요.”
-며칠 전 이창호 9단과 명인전에서 재대국까지 갔는데.
“이창호 사범님은 바둑을 두지 않아도 아우라가 느껴져요. 큰 승부든 작은 승부든 최선을 다해요. 존경할 수밖에 없게 만들죠.”
-격렬한 행마를 즐기는 조치훈 9단은 ‘별명이 폭파 전문가지만 시끄러운 바둑보다 전성기 이창호처럼 조용히 반집만 이기는 바둑을 존경한다’고 했지요.
“존경하는 기사는 이창호 사범, 좋아하는 기풍은 이세돌 사범입니다. 이세돌 사범은 ‘아무리 유리해도 내 수를 믿고, 그 판단이 틀려 역전당한다면 내 실수’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절대 실수할 리 없다는 그 말이 되게 멋있었습니다.”
-요즘엔 이세돌 9단처럼 두지 않더군요.
“빠르게 승기를 잡으려면 이세돌 사범 스타일이 좋죠. 초반에는 그런 전투적 성향이 나와요. 근데 막상 유리해지고 나면 지키는 쪽으로 가는 거죠. 초반 전략, 중반 전략이 달라요. 한쪽으로 치우치진 않으려고 합니다.”
-경기 중에 탁구 신유빈 선수처럼 바나나를 먹는 것은 심리전인가요?
“승부에서는 실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미묘한 것들이 존재해요. 기에서 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쾅쾅 소리 나게 두는 기사들이 있었고 앉아 있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는 기사들도 있었어요. 바나나요? 살기 위해 먹는 거예요(웃음). 대체로 유리할 때 먹게 되긴 하죠.”
-다른 분야의 1인자 스토리에 관심이 간다고 했는데, 안세영이나 손흥민 선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연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진천선수촌에도 들어갈 기회가 있었는데 운동 선수들이 훈련하는 걸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봐도 힘든 걸 알잖아요. 그런 고된 훈련을 이겨내고 국가대표가 된 것도 대단한데 계속 자기관리를 하고요. 또 인터뷰를 보면 직업에 대한 자세도 되게 멋있더라고요. 그런 선수들의 마인드를 배우려고 합니다.”
-안세영 선수와 협회와의 갈등, 알고 있나요?
“그 정도 빅뉴스는 알죠.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저는 솔직히 웬만하면 선수 편이에요. 규모는 다르지만 바둑 쪽에서 세계 1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선수들이 보통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바둑계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저도 그 문제에 대해 깊게 제 의견을 낼 겁니다.”
-화제를 좀 바꾸죠. 지금이 이창호 시대와 다른 점은 AI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세계 챔피언은 굉장한 신비감을 주는 존재였는데.
“저는 AI 시대의 선수이기 때문에, AI의 이점을 먼저 말하면 전에는 프로 바둑을 보는 건 해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AI를 통해 관전하기도 해설하기도 편해졌습니다. 또 AI로 많은 정보를 얻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보다 강한 기사를 상대로 또 하루이틀 공부로도 자신감과 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AI란 존재가 결국은 일상 많은 곳에 퍼질 거잖아요, 바둑은 AI가 기술력을 입증하기 좋은 게임이다 보니 먼저 시작된 것이고요. 또 AI가 나왔다 해서 바둑이 정복된 게 아닙니다. 첫수에 100%가 되지도 않고 5대5로 한동안 가니까, 바둑이 어렵고 길이 많다고 할 수 있어요.”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법?
승승장구하던 나날에 큰 금이 간 시점은 2016년 LG배 당이페이와의 4강전. 어처구니없는 착각으로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세계 대회 우승 기회를 날려버렸고, 대국장 창문으로 달려가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긴 슬럼프가 찾아왔다고요?
“그날의 좌절과 절망은 바둑 인생에서 가장 크고 깊었습니다. 벗어나기까지 3~4년 걸렸어요. 2018년 천부배와 2019년 바이링배에서 또 우승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지독히도 안 풀렸고요.”
-슬럼프에서 탈출한 계기는.
“2018년 천부배에선 세계 1인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를 판가름한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3국까지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었지요. 이듬해 커제와의 결승은 1국에서 역전패하고 2국에선 그 여파로 둬서는 안 될 바둑을 뒀습니다. 정말 가볍게, 종이처럼 가볍게 패했어요. 그 후 LG배 16강에서 미위팅을 만났는데 완승 무드였다가 또 경솔함이 나오면서 99%였던 승률이 5대5가 됐어요. 그 승부에서 졌다면….”
-결국 이겼군요.
“재역전해 이기고도 분했어요. 경솔함을 고쳐야 한다는 각오를 새긴 한 판입니다. 2020년 LG배에서 우승하면서 길고 긴 슬럼프에서 벗어났어요. 미위팅과의 승부는 역전당한 뒤 이기고 교훈까지 얻은 바둑이었습니다. 큰 실수가 결과적으론 좋게 작용한 첫 번째 바둑이었죠.”
-미위팅은 특급 도우미가 됐다는 사실을 아나요? 단점을 극복한 ‘신의 한 수’라면.
“전혀 모를걸요(웃음). 승패를 바꿀 수 있는 신의 한 수는 마음가짐이에요. 제가 반복한 실패는, 당시엔 상처라고 생각했지만, 극복할 원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승리는 자만심만 부를 뿐 제 단점을 고치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데 패배는 분명히 뭔가를 깨닫게 합니다. 전장의 상처를 훈장으로 바꾸듯이요.”
-아버지는 ‘무슨 바둑을 두는지도 모른 채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패배하더라도 내 바둑을 만들어가는 기사가 되길 원하셨다’고 썼는데.
“늘 하시는 말씀이에요. 축구에도 아름다운 패배와 엉망진창인 승리가 있잖아요. 승부의 세계에서는 아름다운 패배가 차라리 나아요. 2021년 삼성화재배 패배는 좀 아쉽고 작년 란커배는 특히 더 그랬어요. 아, 2018년 천부배에서 졌을 땐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저를 격려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패배였지요.”
-그 천야오예가 근년엔 안 보이더군요.
“그 선수가 저한테 이기고 인터뷰에서 ‘내 바둑 목표, 인생 목표를 이뤘다’고 했어요. 승부의 세계에서 멀어졌지요. 저는 복수할 일이 남았는데. 그 시합 이후 한 번 이기긴 했는데 그 정도론 분이 안 풀려요(웃음).”
-이젠 단점을 극복한 거 아닌가요.
“아버지는 항상 이창호 사범님을 떠올리시기 때문에 아쉬워하세요. 저는 스타일이나 바둑을 대하는 태도가 정반대다 보니 지금도 저를 완전히 인정하질 않으시죠.”
-아니, 아버지의 DNA를 받은 거 아닌가요?
“제가 아버지한테 항상 하는 말이에요. 이렇게 두는 건 아버지 때문이다, 하하하.”
◇바둑과 인생의 닮은 점
패배를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둑이라고 했다. 작은 승리, 작은 기쁨, 작은 발전이 쌓이면 슬럼프를 벗어나게 된다고. 드라마 ‘미생’도 인용했다.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른다.”
-평소 체력 관리는 어떻게.
“헬스장이 좋은데 시간이 아까워요. 시합 없는 날은 집에서 매일 30분 동안 유튜브 보면서 팔굽혀펴기 같은 맨몸 운동을 해요.”
-대국이 없는 날, 즉 승부를 하지 않는 날의 일과가 궁금합니다.
“진짜 부끄러운데 예전에는 11시 반에 일어났어요. 회사원이 보면 놀랄 일이죠(웃음). 그런 일상은 바꾸려고 노력해 요즘엔 오전 1시에 자서 9시에 일어납니다. 아침 먹고 보통은 국가대표실에 가요. 혼자 공부하거나 선후배 기사들과 연구하거나 연습 대국을 하죠. 저녁 먹고 귀가하면 쉬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바둑 공부를 합니다. (구독하는 유튜브를 묻자)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보는 편이에요. 상식이 부족해서 그런 채널도 봅니다.”
-중요한 대국에서 지면 폭음을 하고 싶을 텐데.
“맥주를 안주 없이 많이 마신 적이 있어요. 속이 안 좋더라고요. ‘이성의 끈’을 가지고 마시기 때문인지 주량은 아직 모르겠어요.”
-세계 1인자가 됐을 때 기분은.
“감격스러웠지만 엄청 특별한 건 없었어요. 사실 ‘철벽 같은 박정환 9단을 넘으면 커제 9단은 자연스럽게 넘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가장 괴롭힌 상대는 박정환 사범님이에요. 커제는 실력보다 승부에서 밀리는 느낌이라 극복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2020년 LG배 우승 후 커제와 겨룬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마우스 미스를 냈지만 별로 밀리지 않으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 뒤론 계속 이겼지요.”
-이제 ‘공공의 적’이 됐는데.
“예전에는 ‘박정환, 커제를 넘고 싶다’고 했다면 지금은 ‘신진서를 이기겠다’고들 말해요. 공공의 적이 된다는 게 불쾌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뿌듯하죠. 저는 항상 위를 보고 있습니다.”
-세계 1인자 위에 뭐가 있나요?
“AI도 존재하고, 커리어 면에서 제 위에 있는 기사도 있잖아요. 제가 최고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더 성장하기 위해 저만의 바둑을 두어나가야죠.”
-신진서에게 AI란 무엇일까요.
“친구이자 스파링 상대, 넘어서야 할 스승이요. 끊임없이 숙제를 내며 게을러질 수 없게 만드는 1등 공신이죠. AI를 정답지가 아니라 참고서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요. 실수에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만회하려는 노력, 내 바둑을 둘 수 있다는 믿음, 어려움 속에 희망이 있다는 마음가짐이 인간의 바둑에서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AI로 착점의 선악을 정량적으로 알 수 있는데, 승자와 패자가 복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복기는 바둑의 일부예요. 흑돌과 백돌로 ‘가지 않은 길‘을 놓아 보는 것입니다. 한 판의 바둑은 승패가 갈리며 끝나는 게 아니라 복기로 마무리됩니다. 패자는 아픔이 진정되고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는 순간이 될 수 있고요.”
-몇 년간 계속 상금 랭킹 1위인데 재테크도 하나요.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용돈을 받아 씁니다. 옷도 사고 밥도 맛있는 걸 먹어요. 예전에는 (돌의 효율처럼) 가성비를 많이 따졌어요. 미성년자로 10억 벌 때까지만 해도 선배들이 ‘아냐 진서야, 내가 살게’ 했는데 최근엔 ‘그래 진서야’로 바뀌는 중이에요, 하하. (선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동안 많이 사주셨으니 저한테 기회를 좀 주십시오.”
-바둑과 인생, 닮은 점이 있지요?
“솔직히 제가 인생을 잘 몰라요. 바둑은 첫 수부터 마지막까지 구상하며 내 색깔을 가지고 이뤄나가는 거잖아요. 그런 면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아,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 빨리 잊어버리고 새 삶을 살아야 하죠. 바둑도 인생도.”
-인생을 한 판의 바둑으로 보면 이제 치열한 중반전인데 ‘굵고 짧게’와 ‘가늘고 길게’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저는 가늘고 길게 가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굵고 길게’면 더 좋으련만.”
기사에겐 누구나 전성기가 있다. 마흔 살 즈음의 자신에게 미리 당부하는 말을 묻자 그는 “그때는 바둑 외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궁극적 목표는 뭘까. 다음 착점을 궁리하는 표정으로 신진서가 생각에 잠겼다. “세계 대회 우승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바둑계 저변을 넓히는 데 한몫하고 싶어요. 제가 한국의 마지막 세계 1인자가 아니었으면 좋겠고요. 부와 명예, 목표를 위해 두어 왔지만 이제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바둑인이 돼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