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으로 유명한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가 요즘 달콤해졌다. 도넛과 케이크 같은 디저트 매장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디저트 마니아’들의 행선지로 떠오른 것이다. SPC가 도산대로에 고급 도넛 매장 ‘던킨 원더스’ 1호점을 지난 12일 오픈했다. 줄 서는 도넛 열풍을 불러일으킨 ‘노티드’도 기존 매장을 특화 매장인 ‘노티드 스튜디오’로 바꿔 같은 날 개장했다. 지난 24일, 직접 가 본 두 매장 사이의 거리는 150m. 대로변에서 모퉁이를 도니 걸어서 2분 만에 닿았다.

서울 도산대로 인근에 문을 연 '던킨 원더스 청담점'. /이미지 기자

도산대로는 편의점들이 협업하자고 손 내미는 까뇰레 전문점 ‘이웃집 통통이’와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운영하는 ‘누데이크 도산’, 고급 컵케이크 전문점 ‘리암스 케이커리’ 같은 쟁쟁한 디저트 전문점이 버티고 있던 장소다. 이달 유명 도넛 브랜드들까지 이곳에 고급 특화 매장을 열면서 도산대로는 이제 ‘디저트 거리’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경쟁을 피하는 것은 기업이나 업장의 기본 생존법 아닌가. 비슷한 전략과 상품으로 경쟁하는 ‘레드오션’ 대신 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는 게 경영학의 기본이다. 하지만 요즘 요식업계에서는 ‘적과의 동침’이 심화하고 있다. 비슷한 음식을 파는 비슷한 가게들이 모이면서 하나의 거리가 형성될 정도다. 결투를 신청하는 것일까? ‘맛잘알’(맛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찾는 서울 새로 뜨는 먹자 거리를 훑었다.

그래픽=송윤혜

◇버거대로 된 강남대로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서울 강남대로에 있는 ‘파이브가이즈’ 매장엔 벌써 20여 명이 주문 줄에 서 있었다. 1, 2층으로 이뤄진 매장에선 태블릿 PC를 보며 영어 공부를 하는 학생과 정장 입은 직장인 100여 명이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머리 희끗한 중년 부부도 꽤 보였다. 이 매장은 작년 6월 한국에 첫선을 보인 파이브가이즈 1호점. 앞서 이 길에 자리를 잡은 미국 뉴욕의 버거 브랜드 ‘셰이크쉑’ 강남대로점에서 130여m 떨어진 위치였다.

강남대로는 직장인과 학생, 외국인들이 다양하게 섞인 상권으로 미국 버거 브랜드의 한국 진출 공략지가 됐다. 사진은 지난 24일, 파이브가이즈 매장. /이미지 기자

요즘 이 길은 ‘버거대로’로 불린다. 이 매장 오른쪽으로 270m 옆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버거 브랜드 ‘슈퍼두퍼’ 1호점이 운영 중이고, 최근엔 국내 버거 브랜드 맘스터치까지 인근에 매장을 열었다. 업체들은 국내 최대 상권인 ‘강남’의 유동 인구와 소비력, 상징성을 기대하며 강남대로에 자리를 잡는다. 파이브가이즈를 운영하는 에프지코리아는 “유동 인구가 많아 브랜드 알리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슈퍼두퍼를 운영하는 다이닝브랜즈그룹은 “어학원과 사무실이 밀집돼 구매력 있는 20~30대 유동 인구가 많기 때문에 미국 브랜드를 거부감 없이, 자주 소비할 고객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남대로에 버거 매장이 몰리는 이유로 꼽았다.

서울 강남대로 슈퍼두퍼 매장. /이미지 기자

하지만 강남대로가 버거 브랜드 흥행의 보증 수표는 아니다. 앞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좋아하는 버거로 유명한 굿스터프이터리, 미국 서부 스타일 치킨 버거를 내세운 토니버거도 이곳에 매장을 열었다가 쓸쓸히 퇴장했다. 강남권 중에서도 임대료가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대로의 월세를 감당하며 버티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빵·디저트·쌀국수도 뭉친다

요즘 새롭게 주목받는 먹자 거리는 안국역 북촌로를 따라 이어지는 ‘빵촌로(빵+북촌로)’다. 한옥마을로 기억되는 동네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빵을 구매하러 가는 목적지다. 시작은 2021년 문을 연 ‘런던베이글 뮤지엄’ 1호점. 이후 성수동에서 시작한 ‘어니언’도 북촌로 초입에 자리를 잡았고, 올해 7월 이탈리아 빵을 전문으로 하는 ‘아모르 나폴리’가 오픈하면서 북촌로는 다국적 빵지 순례 코스로 떠올랐다.

/아모르나폴리

떡도, 한과도 아닌 빵이라니. 전통 찻집과 한옥으로 한국적 면모를 뽐내던 이곳에 빵집들이 모인 이유는 뭘까? 가장 최근 문을 연 아모르 나폴리를 운영하는 김경하 도레컴퍼니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에 가서 화과자를 사오는 대신 치즈케이크나 바나나빵을 사오고, 대전에서 성심당 케이크를 사오듯 젊은 층에서 빵은 지역 특산품, 관광 기념품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하다. 임대료가 높은 강남이나 패션 팝업 스토어 중심의 성수동에서 벗어나 직장인이 많으면서 외국인, 한국인 관광객이 주로 몰리는 북촌이 빵 판매에 적격이다.” 실제로 아모르 나폴리 구매 고객의 절반가량은 외국인이다.

상권의 빈 곳을 파고드는 틈새시장이 새로운 거리를 형성하기도 한다.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과 BTS 소속사인 하이브, K뷰티 주역인 아모레퍼시픽의 용산 이전이 맞물리면서 탄생한 ‘용리단길’(서울 지하철 숙대입구역~남영역~삼각지역~신용산역 일대)이 먹자 거리로 변신한 게 약 4년 전. 최근에는 대로변을 따라 간단한 안주를 곁들여 술을 마실 수 있는 와인 바와 위스키 바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와인 거리’가 생겼다. 안병익 식신 대표는 “3~4년 전 형성된 용리단길이 저녁 식사 중심의 가게들로 구성되면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2~3차 장소가 부족하다는 빈틈을 노린 것”이라고 했다.

소규모 사무실이 모인 지식산업센터가 대거 들어서 있는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는 베트남 현지인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몰려 있다. 2020년 베트남 사람이 문을 연 ‘코애식당’이 인근에 2호점을 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자 여기서 일하던 베트남 사람들이 독립해 식당을 오픈했다. 건물 하나 걸러 하나 꼴로 베트남 식당이 들어선 것이다.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은 베트남 현지인이 운영하는 쌀국수 집이 건물 하나 걸러 하나 꼴로 들어서 있다. /코애식당

한국식 베트남 음식점이 아닌 현지 맛을 구현했다는 소문에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도 생길 정도다. 한국식 베트남 프랜차이즈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점심 시간이면 인근 IT·패션 관련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20~30대 고객이 줄을 선다. 30대 직장인 정모씨는 “국밥 등에 비해 가격 부담이 작고, 각자 쌀국수를 시킨 뒤 스프링롤이나 짜조, 닭봉 등을 나눠 먹기 좋아 젊은 직원들끼리 밥 먹을 땐 베트남 식당을 주로 찾는다”고 말했다.

◇성격이 바뀐 먹자 거리도

먹자 거리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서울에는 전통적인 먹자 거리가 많다. 마장동 도축장에서 부산물을 이용한 요리를 내놓으면서 만들어진 왕십리 곱창 골목이나 북한에서 온 실향민이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에 터를 잡고 평안도식 족발을 팔며 생긴 장충동 족발 거리도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다. 새로 생기는 먹자 거리의 특징은 옆 가게와의 ‘차별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왕십리 곱창 골목의 식당들이 모두 곱창볶음을, 족발 거리에선 왕 족발을 주 메뉴로 내는 것과 달리, 요즘 뜨는 먹자 거리는 같은 햄버거도 주 재료와 사이드 구성이 전혀 다르거나 같은 빵이라도 베이글 혹은 크루아상, 치아바타로 주력 메뉴가 다르다.

SNS에서 맛집을 검색하면 나오는 해시태그들. 동네 별로 검색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인스타그램

과거와 현재의 먹자 거리가 달라진 가장 큰 이유는 ‘목적지’를 결정하는 방식의 차이라는 분석이다. 걸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식당을 고르던 과거엔 줄 서는 유명 고기 집 옆에 비슷한 메뉴를 내면서 줄 안 서는 비슷한 스타일의 고깃집, 거기서 밥을 먹고 나와 2차로 갈 수 있는 맥줏집이나 치킨집, 집에 갈 때 사들고 갈 빵집 같은 게 들어서면서 하나의 먹자 거리를 형성했다. 요즘에는 디저트·빵·쌀국수처럼 먹고 싶은 메뉴를 정하고 ‘북촌 빵집’ ‘용리단길 와인바’ 같은 대표 지역을 검색해 목적지를 정하기 때문에 경쟁 업체들이 옆에 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김성순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리테일본부 전무는 “과거 먹자 거리가 한 가문에서 뻗어나온 사람들이 몰려 사는 ‘집성촌’에 비유됐다면 요즘 먹자 거리는 비슷하지만 저마다 개성 있는 업장들이 모이는 ‘페스티벌’과 같다”고 설명했다. 소셜미디어로 홍보만 잘되면 신생 브랜드도 손님을 끌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것도 신규 브랜드들이 기존 경쟁자 근처에 몰리는 이유라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