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기 기계가 한창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500원짜리 동전이나 1000원짜리 지폐를 넣고 크레인처럼 생긴 기구를 조작해 인형이나 열쇠고리, 작은 전자제품 같은 것을 집는 것이지요. 당시 제가 살던 낡은 집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 그 가장자리 또한 어느 날부터 놓인 뽑기 기계로 소란하고 밝았습니다. 불 꺼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잠시 붐볐던 것입니다.

늦은 퇴근길, 저 역시 몇 번이나 그 기계에 눈과 발이 묶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시도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기계를 세밀하게 조작해 단번에 뽑을 자신도 없었거니와 막상 가지고 싶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가장 아랫부분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상술이라 말하겠지만 저는 이것이 삶과 문학에 관한 하나의 은유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늘 깊숙한 곳에 자리하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이 탓에 종종 헛된 것들에 가리어지는 것이지만.

제가 시인이 되고 나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어느 순간에 서정적인 시상(詩想)이 떠오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관심 어린 물음을 던진 분에게는 송구한 일이지만 그럴 때마다 선뜻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사실 시상은 떠오르는 게 아니라 한없이 가라앉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상을 마주하려면 나의 내면으로 또 더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야 합니다.

일러스트=유현호

제63회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는 문화센터에서 시 창작을 배우는 주인공 미자가 등장합니다. 시상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는 미자에게 시 창작 강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상은 찾아오지 않아요. 내가 찾아가서 빌어야 돼. 사정을 해야 돼. 그래도 줄 동 말 동 해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함부로 주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막 찾아가서 사정을 해야 돼.”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시상은 필요합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간 속에도 순간순간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빛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거친 정의가 되겠지만 서정은 맛을 보는 일보다는 향을 맡는 것에 가까우며 감정을 토로하며 모조리 꺼내 놓는 것보다는 침묵으로 한 번, 고요로 또 한 번 감정을 곱게 개어두는 일에 가깝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세상 전부처럼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즉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일수록 한번쯤 의심해 봐야 합니다.

오늘날 내가 가진 기억 속에는 특별한 장면보다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소소한 순간들이 몇 갑절쯤은 더 많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촘촘하게 덮인 내 기억의 가장 아랫부분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가만가만 살펴보고 싶은 가을입니다. 말씀드렸듯 가장 중요한 것은 늘 깊숙한 곳에 자리하기 마련이니까요. 이와 함께 이번 가을을 지내는 동안 내가 어떤 장면과 누군가의 눈빛을 새로 넣어두게 될지 기대해보는 일도 함께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