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 운동하러 온 거 아니야. 남자 꼬시러 온 거라고.”
러닝 동호회(러닝크루)의 ‘여왕벌’ 자리를 뺏기게 된 홍일점이 신입 여성 회원에 대한 뒷말을 한다. 너무 바빠서 회사에서 바로 왔다며 멀끔한 ‘수트핏’을 일부러 내보이고, ‘쌩얼’이라며 찍지 말라는 구(舊) 여왕벌의 앞니에는 분홍 립스틱이 잔뜩 묻었다. 최근 쿠팡플레이 SNL에는 MZ세대에 유행인 러닝크루를 희화화하는 이 코너가 편성됐다. 영상에는 “현실고증 제대로 했다”는 댓글과 함께 “조만간 인도 점령하고 블루투스 스피커 크게 틀며 달리기, 횡단보도 단체 사진도 나올 것 같다”는 얘기가 달렸다.
광화문과 이태원, 한강공원 등 서울 도심을 무리 지어 달리는 러닝크루가 이른바 ‘길바닥 운동족’들의 민폐 캐릭터로 낙인찍히고 있다. 최근 러닝 동호회 커뮤니티 등에는 일부 러닝크루들이 수십 명씩 떼로 달리면서 보도를 점거하거나, 학교 운동장에 모여 달리기를 하면서 큰 소리로 고함치기, 음악 틀기 등의 비매너를 보여 논란이다. 주 2회 저녁에 여의도 한강공원 인근을 뛰는 직장인 한모(45)씨는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우악스럽게 ‘지나갑니다’ ‘비켜요’라고 소리 지르는 행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고 말했다.
러닝크루 인기의 원조 격인 ‘88서울크루’는 지난달 13일 서울 세운상가 앞에서 20m 내외의 짧은 도로를 질주하는 1대1 대결 토너먼트 게임을 진행했다. 그러자 일부 커뮤니티에 해당 행사에 대해 “안전 확인 서약서와 방비책 등이 준비됐는지, 영리 목적 행사 사용 허가가 났는지 궁금하다”는 민원을 넣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인도에서 무슨 달리기를 하냐” “무개념 친목질 모임” “오토바이 폭주족과 뭐가 다르냐”는 댓글들이 이어졌다.
88서울크루는 지난해에도 서울 대림상가에서 비슷한 행사를 진행했고, 지하철역사 안에서 수십 명이 뛰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때때로 맥주 파티까지 이어지는 이벤트를 열기도 해 MZ들의 주목을 받는 사교의 장으로 진화했는데, 이 같은 ‘패션 러너’의 모습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러닝 3년 차인 김모(34)씨는 “88크루 러닝에 한 번 참여해 봤는데 과한 장비와 유행 브랜드로 칠갑을 한 사람이 많았다”며 “운동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러닝크루를 러너와 고라니의 합성어인 ‘런라니’라 부르기도 한다. 도로의 무법자로 떠오른 ‘킥라니(킥보드+고라니)’ ‘자라니(자전거+고라니)’와 같은 맥락이다. 최근 BTS의 슈가가 술을 마시고 전동 킥보드를 타다 넘어진 채 발견돼 경찰 조사를 받았는데, “음주 상태에서는 킥보드를 타면 안 된다는 걸 몰랐다”고 사과했다. 적발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는 0.227%로 면허 취소 기준(0.08%)을 훨씬 웃돌아 ‘음주 킥라니’라는 오명이 붙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출신 제시 린가드(FC서울) 선수도 최근 전동 킥보드를 무면허로 탔다가 안전모 미착용, 승차 정원 위반, 역주행 혐의 등으로 범칙금을 내게 됐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두어 명이 함께 킥보드를 타거나, 교통 법규를 무시하고 역주행하거나 마구 도로에 끼어드는 킥보드 유저들을 가리켜 ‘킥라니’라고 고발하는 영상이 올라오고 있다. 전동 킥보드는 빠르게 대중화됐지만, 안전 의식은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태다. 전동 킥보드는 원동기장치자전거 이상 면허가 있어야 운전할 수 있고, 자전거 전용도로나 차도의 가장자리로 이동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타거나 인도·차도를 가리지 않고 질주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한국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9~2023년) 킥보드 같은 개인형 이동 장치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87명, 부상자는 8665명에 달했다. 개인형 이동 장치를 타다 사고를 낸 3명 중 1명은 무면허 운전자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자라니도 킥라니에 앞서 오랜 골칫거리였다. 인터넷 커뮤니티 ‘보배드림’ 등에는 요즘도 지하철 역사 내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1차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경우, 휴대폰을 보면서 자전거를 타다 뒤에서 자동차를 들이받는 사고 장면 등이 올라온다. 주차된 새 차를 들이받고 도망쳤는데 잡을 길이 없다는 호소 글도 최근 화제가 됐다.
문제는 현행 도로교통법으로 킥라니·자라니 등을 적발하기 어렵다는 점. 이에 국회에서도 최근 킥보드 같은 개인형 이동 장치에 대해 자동차 음주운전과 동일하게 처벌토록 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발의(더불어민주당 임호선 의원)됐다. 최고 속도를 현행 시속 25㎞에서 20㎞로 낮추는 내용도 포함됐다.
일부 지자체도 ‘민폐 크루’ 차단에 나섰다. 서울 서초구는 지난 1일 반포2동 반포종합운동장 내에 5인 이상 단체 달리기를 제한하는 내용의 이용 규칙을 시행했다. 서초구는 “10인 이상의 친목 동호회는 4인, 3인, 3인 등으로 조를 구성하고 트랙 내 인원 간격은 약 2m 이상으로 유지해 달라”고 권고했다. 서울 송파구도 석촌호수 산책로에 ‘3인 이상 러닝 자제’ 요청 현수막을 걸고 “한 줄로 뛰라”는 안내 방송을 시작했다. 성북구는 ‘우측 보행, 한 줄 달리기’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었고, 경기 화성시는 “동탄호수공원 산책로에 러닝크루 출입을 자제해 달라”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