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을 찾는 이들이 있다. J S 바흐(1685~1750)의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1번’을 대표로 꼽는다. 아내를 잃은 바흐가 토로한 영혼의 절규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 있을 리 없다. 오직 나에게 슬픈 음악과 우리가 사랑하는 노래가 있을 뿐이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저린다. 정훈희의 명곡 ‘안개’ 음반을 자신의 관에 넣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절절한 노래다. 박찬욱 영화 ‘헤어질 결심’에 삽입돼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노년층이 나훈아와 패티김을 좋아하듯 청년들은 방탄소년단과 뉴진스에 환호하고 많은 중년 여성이 임영웅 노래를 사랑한다.

클래식 음악의 ‘보편성’을 증명하기 위한 서구 음악가들의 실험이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 마을을 찾아간 전문 연주자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한 것이다. 원주민 반응은 시큰둥했다. 지루한 표정으로 일관하더니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모두 자리를 떴다. 클래식이 유럽 특정 시기 특정 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의 실험도 흥미롭다. 출근길 워싱턴 DC 지하철역에서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연주했다. 50억 원 넘는 스트라디바리우스로 43분간 열연했건만 행인 수천 명 중 연주를 지켜본 사람은 단 일곱 명이었다. 이틀 전 입장료 수십만원이 넘는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청중에게 환호받던 조슈아 벨이었다. 이로써 우린 연주회장과 미술관을 찾는 관객은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콘서트홀과 미술관은 신앙 없는 시대의 성당이다.

20년 전 연구년 때 딸아이와 뉴욕 J 음대 예비 학교에 매주 토요일 동행했다. 딸아이 수업 끝날 때까지 학생 연주회에 종일 앉아 있는데 무료라는 것 외에 큰 장점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듣다가 자고 깨어나서 다시 듣는 비몽사몽 음악 체험으로 ‘귀명창’이라는 옛말을 조금은 짐작하게 됐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오랫동안 품었던 무식한(?) 의문이 있다. ‘연주자는 왜 악보를 그대로 외워 연주하는가?’였다. 연주자는 한 곡을 익히려고 몇 달에서 몇 년 피나는 노력을 한다. 작곡가는 곡의 창조자이지만 작곡가 지시를 따라야 하는 연주자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차라리 컴퓨터에 악보를 입력하면 오류 없이 작곡가 의도를 재생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수많은 음악 영재를 만나면서 ‘모든 연주는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됐다. 연주자의 기량과 곡 해석, 개성에 따라 음악은 무한히 변주된다. 같은 노래도 가수에 따라 다르다. 연주는 작곡과 동등한 제2의 창조인 것이다. 지휘자의 해석도 곡 색깔을 바꾼다. 임윤찬이나 카라얀 같은 스타 음악가가 탄생하는 배경이다.

그럼에도 음악이 우리를 울리는 비밀은 아직 풀지 못했다. 음악은 희로애락의 변화를 역동적으로 담아낸다. 인체 자체가 울림통이고 호흡과 심장 리듬은 음악적이다. 시간예술인 음악의 흐름과 시간적 존재인 인간의 내면 흐름은 영원한 동반자다. 그러나 음악의 본질에 대한 논쟁보다 중요한 건 ‘음악은 힘이 세다’는 단순 명쾌한 사실이다.

대중음악과 클래식 모두 강렬한 음악 체험을 제공한다. 정교한 음악 문법과 역사적 깊이를 가진 클래식은 듣는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게 음악의 핵심은 아니다. 사람을 웃고 울리는 직접적인 힘은 대중음악이 더 강할 수 있다.

팝 가수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비틀스의 ‘렛 잇 비’나 임재범의 ‘고해’가 클래식보다 아래라고 어느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가을이 깊어 간다. 떠나가는 가을을 ‘한국의 슈베르트’ 송창식의 절창 ‘푸르른 날’로 기리는 아침이다.

기타를 잡은 음유시인 밥 딜런. 스웨덴 한림원은 2016년 "밥 딜런이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 왔다"면서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밥 딜런은 1960년대 저항적 가사를 담은 노래들로 미국 인권과 반전 운동의 음악적 상징이다. 올해는 한국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