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사무관 중 10%는 로스쿨 준비하는 것 같아요. 올 연말에도 수십 명 로스쿨 붙었다고 나갈걸요?”
세종시에서 근무하는 중앙 부처 과장 A씨가 전한 관가 풍경이다. 그는 “수년 전부터 부처마다 로스쿨 가는 이들이 한둘씩 있었지만, 쉬쉬하다 합격한 뒤에야 공개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20~30대 직원들이 대놓고 로스쿨 스터디를 하고 시험 정보를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행정고시·외무고시 등 5급, 살인적 경쟁률의 7급 공채를 뚫고 들어온 이들이 로스쿨 입시에 전념하려 미련 없이 사표를 내기도 한다.
2009년 도입된 로스쿨(law school·법학 전문 대학원) 15년, 그 인기가 다시 불붙고 있다. 인문·사회 계열 학부생은 물론, 안정적 엘리트 직장의 대명사였던 공직과 대기업에 안착한 젊은 직장인도 로스쿨로 눈을 돌린다.
저성장 시대의 불안한 노동시장, 어떤 조직도 길어진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 믿을 건 정년 없이 평생 화수분이 돼줄 전문직 라이선스뿐. 개인들은 끝없는 스펙 군비경쟁에 돌입한다.
의대 입시 광풍이 미성년자들의 고소득 전문직 도전 리그라면, 다음엔 로스쿨 입시라는 성인 리그가 활짝 열린다.
공무원·전공의·반수생까지 몰려
올 초 ‘1등 부처’ 기획재정부 5급 사무관 3명이 나란히 로스쿨에 붙어 사표를 냈다. ‘갑 오브 갑’ 금융위원회의 사무관과 주무관도 로스쿨 진학을 위해 퇴직했다. 앞서 주요 국에 파견된 외시 출신 신입 외교관도 같은 이유로 나갔다.
“이런 부처마저 미래가 없다는 거냐”며 파장이 컸지만, 퇴직자들에겐 “언제부터 어떻게 준비한 거냐”는 동료들 전화가 수십통씩 빗발쳤다고 한다.
최근 접수를 마감한 2025학년도 전국 25개 로스쿨 전형엔 2000명 정원에 1만1492명이 지원, 평균 경쟁률이 5.75대1이었다. 로스쿨 도입 첫해인 2009년 ‘개점 효과’로 1만3689명이 몰려 6.8대1을 찍은 이래 최고치다.
로스쿨 입시 전형에 필수인 법학 적성 시험(LEET) 응시자 역시 올해 역대 최다인 1만7519명으로, 15년 전 인원의 두 배에 육박했다.
중앙 부처는 물론 지방직·법조 공무원들, 삼성 등 굴지의 대기업과 공기업 직원들, 교권 추락에 염증을 느낀 초·중·고 교사들도 로스쿨 대열에 합류한다. “고시·대기업 붙을 머리면 변호사 시험 안 떨어진다. 3년(로스쿨 재학)만 투자하자”면서.
경찰대는 ‘로스쿨 사관학교’가 됐다. 문재인 정부의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 업무가 폭증하고 승진이 지연되자 이탈 바람이 거세져, 올해 경찰대 출신 중 92명이 로스쿨로 가는 신기록을 세웠다. 상당수가 의무 복무 6년을 못 채워 국비 지원액을 토해냈다고 한다.
의대 증원 갈등으로 휴직한 전공의들이 의료 소송과 병원·보험 시장 성장 가능성을 보고 로스쿨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올해 LEET에 응시한 의학 계열 출신은 156명으로 지난해보다 44% 급증했다.
어렵게 로스쿨에 합격하고도 수도권·상위권 학교로 옮기려는 ‘로스쿨 반수생’이 늘어난 것도 경쟁률을 높인다. 전국 로스쿨 신입생의 43%가 LEET에 재응시한다. 일부 지방대 로스쿨에선 합격 요건에 ‘반수 금지’를 내걸었다.
그런데도 광역단체 중 유일하게 로스쿨이 없는 경상남도는 “청년 인재 유출을 막으려면 이제라도 로스쿨을 유치해야 한다”며 도민 서명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조직? 믿을 건 라이선스뿐”
2017년 사법고시가 완전히 폐지돼 로스쿨이 유일한 법조인 양성 기관이 됐다. 법조는 문과의 전통적 엘리트 코스였지만 소위 ‘전문직 고임’ 현상에 따라 변호사 자격증 수요는 더 높아졌다.
일반 기업에선 장기 불황과 수시 구조 조정으로 정년 보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공계 선호로 상경대 등 문과생이 설 자리도 좁아졌다. MZ 직장인들은 “일류대 나와 삼성 가느니, 지방대 로스쿨 나와 평생 자격증 들고 사는 게 백배 나은 투자”라고 말한다.
이 불안감은 국가가 신분을 보장한 공무원 사이에도 팽배해 있다. 사교육비와 부동산 값이 미친 듯 뛰는 세상, 오랫동안 조직에 헌신해 주어지는 직위와 명예보단 즉각적인 연봉과 워라밸이 중요해졌다. 직장별 복지·급여 등 보상 체계는 소셜미디어에서 실시간 비교된다.
임용 5년 이내 퇴직하는 신입 공직자는 지난 5년간 두 배 늘었다. 2022년엔 LEET 응시자가 처음 행시 응시자를 제쳤다. 부동의 1위였던 공무원 인기도 올해 처음 그 자리를 민간에 내줬다.
‘철밥통’이라던 공직, 왜 자격증에 못 미칠까. 중앙 부처 직원 B씨는 “가족과 떨어져 서울과 세종을 오가며 ‘월화수목금금금’ 격무를 해도 월 실수령액은 300만원대다. 그런데 로스쿨 나온 대학 동기는 벌써 강남에 집을 사 자녀 교육에 올인하더라”며 “30대 초반 결혼·출산 이전을 로스쿨 도전의 마지노선으로 보는 분위기다. 그 손익분기점을 놓치면 루저로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서울시 공무원 C씨도 “공무원은 늘 정치권력에 시달리고, ‘라인’을 잘 타야 산하 기관장이라도 간다. 아니면 50대 중반에 잘려 별 볼일 없는 동네 아저씨가 된다”며 “반면 6~7급 계약직으로 들어온 로스쿨 출신들은 웰빙하면서 연봉도 높고 이직도 잘하더라”고 했다.
현재 등록 변호사는 3만여 명. 변시 출신이 처음 배출된 2012년 이래 두 배 넘게 늘었다. 일감을 구하지 못한 신입까지 합친 변호사 평균 연봉은 7770만원이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면 여전히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전문직이다.
지난 10여 년간 변호사도 늘었지만 법률 시장 규모(로펌·개인 변호사 소득 기준)도 8조원대가 돼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여의도 투자은행이나 공공기업의 사내 변호사, 인수합병 전문가, 전문 입법보좌관 등 고급 일자리도 계속 발굴된다. 이 자격증의 호환성과 지속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22대 국회에선 의원 300명 중 61명(20.3%)이 법조인 출신으로 역대 최다다.
로스쿨은 ‘변시 학원’으로 전락
정작 로스쿨 내부는 곪고 있다. 사법시험이 못 한 ‘깊이 있고 다양한 법학 교육’을 하겠다던 로스쿨이 “변시 학원으로 전락했다”(조홍식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것이다.
법철학·법사회학·법사학 등 변시에 안 나오는 기초 법학 과목은 고사했다. 교수에게 로스쿨 학생들이 “폐강 안 되게 5명을 모아 올 테니 4주만 수업하고 나머지는 변시 공부하게 내버려두라”고 제안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법학 논문과 박사 학위 취득자도 급감했다. 지난달 3부 요인이 참석한 한국법학교수회 창립 60년 학술 대회에선 로스쿨 15년을 두고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 “130년 법학 교육에서 잃어버린 15년” “판례만 암기하는 저사양 법률 로봇 양산” 같은 성토가 쏟아졌다.
로스쿨은 여전한 학벌과 중앙 집중 사회를 보여준다. 법률신문에 따르면 전국 로스쿨 합격자 중 ‘SKY(서울·고려·연세) 대학’ 출신이 과반이다. 또 2012년 이래 대형 로펌 입사자와 판검사 임용자 3명 중 2명이 SKY 로스쿨 졸업생, 특히 35%가 서울대 로스쿨 출신으로 조사됐다.
정성 평가 위주였던 로스쿨 입시가 갈수록 ‘학토릿(학점·토익·리트)’에 치중하고, 대형 로펌의 변호사 선발 때 학벌과 집안을 고려하는 풍조가 강해지며 나타나는 현상이다.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제’란 비판이 나오자 2022년 대선에서 이재명·안철수 후보가 사시 존치를 공약하기도 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시골 토굴에서 사시 공부해 판사가 됐지만 일류대 중심 문화에서 겉돌았다”며 사법 개혁 차원에서 로스쿨을 도입했다.
그러나 다양한 학력·배경을 가진 인재를 모아 법조계 학벌주의와 서열주의, 순혈주의를 타파하겠다던 로스쿨의 취지는 무색해졌고, 오히려 사회 전체의 다양성까지 무너뜨리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