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온 이웃들은 밤마다 아버지를 찾았다. 나쁜 신호였다. 급하게 달려간 아버지 앞에서 그들은 “차라리 죽겠다”며 자해하거나, 술을 마시고 “일본에 돌아가자”고 푸념했다. 둘째 딸 봉순이를 이뻐하던 아버지였지만 이웃집에 갈 때는 광에 가두곤 했다.
“일본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간부로 활동했던 아버지는 잘 살던 이웃들을 북한에 데려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누가 부르든 달려갔죠. 동시에 북한에서 살아가야 할 딸이 혹시 불순한 마음을 먹을까 두려웠던 것 같아요.” 이제 55세가 된 강봉순씨는 탈북해 북송 재일교포 피해자 모임 ‘모두모이자’의 한국지부장을 맡고 있다.
모두모이자 회원 등 북송 재일교포 유족 27명은 “재일교포 북송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달라”며 2022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공식 조사를 요청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8월 “재일교포의 북송은 북한 정권과 조총련에 의한 인권 유린 사건”이라고 공식 규정했다. 우리 정부가 재일교포 북송과 관련해 조사한 첫 번째 사례였다.
◇너 남조선 출신 쪽발이지?
강원도 춘천의 이북오도청 사무실에서 최근 강씨를 만났다. 1969년 북한 함경북도 무산읍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을 ‘경남 하동군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아버지는 북송 재일교포이고 당신은 북한에서 태어났잖아요?
“아버지의 원적을 따르는 거예요. 아버지는 일본에서도 귀화를 하지 않았고, 북에서 남조선 출신이라고 차별을 받으면서도 고향을 숨기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조총련 간부였다면서요.
“조총련 재정소장이었어요. 열여덟 살에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큰오빠가 세 살 때 이혼하고 혼자 자식을 키웠대요. ‘조센진’으로 불리는 삶이 쉬웠을 리 없죠. 그때 북한에 오면 ‘차별 없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다’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선전을 들었답니다.”
-지상낙원이라 믿었을까요.
“무상 교육, 무상 의료에 가족이 2명이면 방 2칸짜리 아파트, 3명이면 3칸짜리 아파트를 준다고 했대요. 철저히 속은 거죠.”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동포 975명을 태운 첫 배가 북한으로 출발했다. 북한 땅이 가까워지자 배가 소란스러워졌다. 지상낙원이라던 북한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회색빛이었다. 강씨는 “다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간파했죠. 뭘 받아먹고 우릴 데려온 거냐고 항의하는 와중에 기절한 사람,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해요”라고 전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북송 재일교포는 모두 9만3340명으로 추산된다.
-막상 가 보니 대우가 좋지 않았나요?
“자본주의 물 먹었다며 차별하고, 인민반에서도 중국이나 일본 출신자 명단은 따로 관리했어요. 여덟 살에 북한에 온 큰오빠는 커서도 술만 먹으면 ‘왜 내가 쪽발이 소리 듣고 살아야 하느냐’고 한탄했어요. ‘밥 무라’(밥 먹어라) ‘일나라’(일어나라)는 아버지의 사투리로도 남조선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용접 8급 기능공을 따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아버지는 북에서 재혼해 아들 하나와 봉순씨를 포함한 딸 셋을 더 얻었다. 그리고 강씨가 열두 살에 방광암으로 사망했다. 강씨는 “조총련 활동한 것을 죄스럽고 한스럽게 생각한 아버지가 배급이나 더 받아보겠다고 화장실 갈 시간까지 아껴 일하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며 눈물을 보였다. 6개월 뒤 어머니마저 사망했다. 광산에 배치된 큰오빠가 분가하고, 둘째오빠가 출근하면 강씨가 남의 집 일을 해 받아오거나 배급 타온 쌀에 도토리를 섞어 도토리밥을 먹었다.
-탈북은 어떻게 결심했나요?
“제가 결혼해서 애 낳고 2년 만에 김일성 위원장이 사망했어요. 돈 벌러 다녀오면 쫄쫄 굶은 애가 뼈만 남아 있었죠. 생전에 아버지가 ‘통일 되면 고향에 가서 살자’ ‘하동 밑에 남해 바다에 가면 뱀장어도 많고, 쌀알도 손가락만큼 굵다’는 메모를 남겨두셨어요. 통일되길 기다리느니 탈출하자 싶었죠.”
2004년 탈북한 강씨는 1년 반 만에 아들도 중국 다롄으로 데려왔다. 모자가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해 돈을 모았다. 아들이 두 번 공안에게 잡혀갔을 땐 석 달치 월급을 바치고 빼왔다. 결국 쿤밍에서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08년 10월 한국 땅을 밟았다.
하나원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서울의 진주 강씨 종친회를 찾았다. 아버지가 남긴 친척들 이름을 읊어대자 쉽게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경남 하동에 있는 할아버지 묘를 찾아 북한에 있는 아버지 무덤에서 파온 흙을 묻었다.
“그 흙 담은 통을 6년쯤 목에 걸고 다녔어요. 하동에 묻는 순간 마음을 짓누르던 무엇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죠. ‘고향 동네 쌀알은 손가락만큼 굵다’더니 그건 아니더라고요(웃음). 그리움이 그만큼 컸던 거라고 생각해요.”
◇북한 인권 고발해야
올해는 재일교포 북송 65주년이자 그 사건을 ‘북한 정권과 조총련에 의한 인권 유린 사건’으로 첫 규정한 해다. 일본에서는 모두모이자 대표 등 북송 피해자 4명이 북한을 상대로 제기한 5억엔의 손해 배상 소송 최종심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서 모두모이자 회원 등 재일 교포 2세 탈북민들이 조총련과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낸다는 계획도 있다.
-어떤 이들은 ‘자발적으로 북한에 간 것 아니냐’고 하는데.
“거짓 선전한 것에 속은 겁니다. 재일교포 10명 중 9명은 고향이 다 남조선이에요. 북한의 거짓 선전에 9만명 넘는 사람이 인권도 없이 억울하게 산 것을 알려야 합니다.”
-지금도 조총련이 건재하다는 게 놀랍습니다.
“저도 일본에서 아직도 조총련이 날치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조총련 사무실 앞 집회가 끝나고 사무실을 들여다봤더니 공화국 깃발에, 김일성 초상화까지 달려서 마치 북한의 왕궁 같더라고요. 세뇌를 시키고, 이탈하지 못하게 서로 감시하며 버티는 거예요.”
모두모이자는 다음 달 열리는 제4차 유엔 국가별정례인권검토(UPR)에서 북한의 인권 유린에 대한 증언도 할 예정이다. 유엔 회원국의 인권 상황과 권고 이행 여부를 4년 6개월 주기로 점검하는 UPR에 앞서 북한은 “주민들이 인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완비해 왔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북한은 UPR 등에서 채택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이 심각한 장애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적반하장이지요. 북한 소리는 믿을 게 하나도 없어요. 부부간에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신고해 감옥에 보내는 나라에 무슨 인권이 있나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말하지만 매주 생활총화에서 서로 비판하고 의심하고 감시하게 만드는데 그런 나라에 민주주의가 있나요?”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인민 반장, 세대주 반장의 집중 감시 대상이던 재일교포들은 ‘돌아가고 싶다’는 말 한마디 했다고 척박한 산골로 추방됐습니다. 제가 알아 듣진 못해도 일본어로 속삭이며 서로를 위로했어요.”
일본 니가타에서 태어나 북한에 온 강씨의 큰오빠는 56세에 죽었고, 소 달구지를 타고 옥수수 나르던 언니는 49세에 두만강에 빠져 죽었다. 브로커를 통해 돈을 보냈다가 두 번이나 잡힌 동생 소식과 조만간 환갑이라던 둘째오빠와는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조카들은 꽃제비가 다 됐고, 큰오빠네 조카들은 이번 수해에 집을 잃었대요. 쌀이라도 맛보게 해주고 싶은데 연락이 닿질 않아요.” 강씨는 다시 눈물을 훔쳤다.
-북한이 남북 연결 도로와 철도를 끊고 폭파했습니다.
“북한이 DMZ(비무장지대)에 장벽을 더 쌓겠다고 하는 뉴스를 듣고 화가 나서 욕이 나왔어요. 기껏 만든 연락소와 도로를 폭파하고, 한국 대통령한테 멍텅구리라고 하는 북한에 뭘 기대할까요. 지금도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통일 문제라면 좌우도, 유불리도 따지지 말고 합심해야 하는데 한국에선 정쟁만 벌이고 있고요. 재일교포 1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국제 사회에 인권 유린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통일을 위한 목소리
일본에서 ‘조센진’으로, 북한에서는 ‘쪽발이’로 불리며 이방인으로 살아온 강씨는 “한국에 와서야 ‘자유’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북한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한민국에서는 언제든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거예요.” 배곯던 아들은 국민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고, 강씨는 2019년 북한인권단체 물망초가 주최한 시낭송대회에서 만해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로 대상을 받았다.
그가 북한 브로커에게 50만원 주고 받아왔다는 가족 사진을 기자에게 내보였다. “우리 아버지 멋있죠? 일본에 남았으면 지금도 살아계실 텐데…. 이웃들에겐 평생 죄인처럼 살고, 북한에서 일만 하다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불쌍해서 눈물만 나요.”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돌아가시기 전, 기력이 없어 말도 못 하던 아버지가 열두 살 봉순이 손바닥에 두 글자를 썼다. 바로 ‘통일’ 이었다. “북에서는 ‘공상이 망상’이라고 했지만 한국에선 ‘공상이 꿈’이 될 수 있잖아요. 저는 아버지의 꿈이던 통일을 위해 계속 목소리를 낼 겁니다.” 이 말을 할 땐 어린 아이처럼 눈이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