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2월 2일 저녁, 한국민주당(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는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한민당 동지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며 유엔 결의에 따라 곧 치러질 총선거 대책을 논의했다. 그때 경찰 제복을 입고, 어깨에 카빈소총을 멘 청년 한 명과 검정 외투를 입은 청년 한 명이 찾아왔다. 현관으로 나간 장덕수는 경찰 제복을 입은 청년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장덕수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진남포이사청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주경야독해 판임관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와세다대를 고학으로 졸업하고 13년 동안 미국·영국에 유학해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김구가 세운 보강학교에서 공부해, 김구와는 사제지간이었다.
사건 이틀 후, 수도경찰청 수사대는 암살범으로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22세)과 연희대 3학년생 배희범(20세)을 체포했다. 곧이어 그들과 함께 ‘대한혁명단’을 결성해 범행을 모의한 연희대 2학년생 최중하(19세) 등 3명을 공범으로 체포했다. 이들 모두는 김구가 총재로 있던 ‘대한학생총연맹’ 간부였다. 범행 전, 이봉창·윤봉길의 거사 직전 모습을 본떠 태극기를 배경으로 수류탄을 들고 “나는 조국 대한의 완전 독립을 위해 혁명 단원으로서 내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함”이라는 혈서를 가슴에 붙인 채 사진을 찍었다.
20대 초반 청년들에게 총기, 수류탄, 자금, 정보를 제공한 배후는 김구를 30년 가까이 수행한 한국독립당(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54세)이었다. 함께 체포된 신일준, 김중목 등 4명은 모두 김구가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한독당의 핵심 간부들. 이들은 경찰과 미군 범죄수사대(CID)에서 김구로부터 “장덕수는 내 제자이지만 죽일 놈이다. 한민당이 미소공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장덕수의 장난이다. 민족 반역자는 단호히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범행을 도모했다고 자백했다.
한독당 핵심 간부 5명과 현직 경찰관이 포함된 우익 청년 5명이 기소된 민감한 정치적 사건인 만큼, 장덕수 암살 사건은 미군정 특별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검사와 판사를 위협해 정당한 판결을 방해하는 사법 테러를 예방하고,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장 헤론 대령 등 판사 4명, 라만 대위 등 검사 2명, 빌스 대위 등 법정 변호인 2명은 모두 미군 장교들이었다. 그 밖에 김구의 개인 변호사인 강거복 변호사 등 한국인 사선 변호인 3명이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군사재판은 ‘5‧10 총선거’를 두 달 앞둔 3월 2일부터 4월 1일까지 거의 매일 총 21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3월 8일, 제5회 공판에서 김석황 등 한독당 간부 5인은 모두 “김구의 지시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증언했다. 이에 따라 변호인 빌스 대위의 요청으로 김구를 ‘피고인들을 변호하기 위한 증인’으로 채택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 명의로 발부된 소환장은 미군 스미스 중령이 경교장을 방문해 강거복 변호사를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 김구는 12일 제8회, 15일 제9회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재판 시작 30분 전, 방청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중앙 통로를 좌우로 100석씩 배치된 좌석의 바깥쪽은 한민당, 안쪽은 한독당 인사들이 앉아 적의에 찬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강거복 변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검정 두루마기 차림의 김구가 증인석에 앉자, 피고인 10명은 일제히 일어나 김구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김구는 오른쪽 다리를 꼬아 왼쪽 무릎에 올린 채 신문에 답변했다.
“김석황이나 누구에게든 장덕수 사건에 대해서 무슨 명령을 내린 일이 있습니까?”라는 강거복 변호사의 질문에 김구는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대한혁명단의 혈서나 사진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도 “혈서를 하도 많이 받고, 심지어 손가락까지 잘라 보내는 일까지 있으니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고 부인했다. 이어서 신문에 나선 라만 검사가 “그렇다면 선생의 제자 격인 피고인들이 왜 한결같이 선생의 지시를 받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을까요?”라고 묻자, 김구는 “알 수 없소.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하오”라고 답변했다. “모략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김구가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경찰이 고문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답변했다.
증인이 고문을 받아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것은 신문조서를 작성한 미군 CID와 검찰에 대한 모욕이었다. 라만 검사는 “고문한 경찰에 미국인 경찰도 포함되느냐?”라고 되물었고, 김구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선 경찰의 조서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수습했다. 이후에도 검사가 집요하게 범행 지시 여부를 캐묻자, 변호인 빌스 대위가 “증인이 사건에 관련이 없다는데 왜 자꾸만 같은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증인에게 죄가 있다면 정식으로 기소를 하시오”라고 항의했다. 오전에 시작된 김구의 증인신문은 오후 4시 반까지 이어졌다.
15일 오전 9시에 재개된 제9회 공판에서 김구는 “나는 국제 예의를 존중해서 미국 대통령이 증인으로 나오라기에 여기 나왔는데,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니 매우 불만이오.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소. 그때도 실행자에게 직접 명령했지, 다른 사람을 통해 말을 전하지는 않았소. 내게 죄가 있다면 체포해서 기소하시오”라고 말하며, 검사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
김구의 증언 이후 피고인들은 일제히 진술을 번복하고 “CID 조사관이 고문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제19회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CID 미국인 조사관, 군의관, 간수, 한국인 통역은 한목소리로 피고인들의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4월 1일, 제21회 공판에서 재판장 헤론 대령은 박광옥·배희범 등 8명에게 교수형을, 조엽·박정덕에게 10년형을 선고했다. 4월 22일, 하지 중장은 죄질에 따라 피고인들의 형을 각각 집행 유보, 종신형, 10년, 5년형으로 감형했다.
훗날,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김구의 혐의를 포착하고 ‘경교장에 대한 수색 영장’을 청구했지만, 하지 중장의 저지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검찰총장 이인은 회고록에, 2월 말 미군 정보참모부(G2) 소속 한국인 대위가 찾아와 김구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요청했지만 “임정 주석을 체포해 봐. 일반 민심의 격화를 누가 수습할 것인가. 꼭 백범을 지목한다면 달리 증인으로 불러보면 몰라도…”라고 타일러 돌려보냈다고 기록했다.
증인석에서 ‘모략을 받았다’고 주장한 날인 3월 12일, 김구는 ‘남한 단독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19일, 김구는 김일성이 평양에서 개최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
<참고문헌>
김상구, ‘김구 청문회’, 매직하우스, 2014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박태균,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역사비평사, 2021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지성사, 1994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정안기, ‘테러리스트 김구’, 미래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