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나운서 왕고참 C 선배의 부고를 접했다. 20여 년 전 명퇴 때 잠깐 뵙고, 어쭙잖게 나는 독일 연수를 떠나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다. 세월 지나 신문에서 별세 기사로 마주할 줄이야…. 1980년대 후반 조(組) 근무 때 그는 조장, 난 말번이었다. 어느 날 함께 숙직을 마치고 퇴근용 타각기(打刻器) 앞에서 그가 말했다. “괜찮으면 집까지 좀 태워다 주게.” 서민풍인 C 선배는 버스로 출퇴근했고, 나는 신참 주제에 르망을 월부로 뽑아 몰고 다녔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그냥 가기 뭣하다며 감자탕 집에 들렀다. 새로 알게 된 두 가지. 첫째, 감자탕은 감자와 관계없고 감저탕(甘猪湯)이 변한 말이며 감저는 단맛 나는 돼지등뼈를 의미한다고. 둘째, 대조(大棗)는 ‘큰 대추’라는 뜻. 그래서 동네에 대추나무가 많다고 했다.
C 선배는 먼저 발동을 거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술자리는 즐겼다. 고달팠던 4교대 야근⸱숙직은 뉴스를 1인당 7~8건씩 소화해야 해 입에서 단내가 났다. 위안이 필요할 터. 소주가 있어야 했다. 자정 뉴스를 마치면 조장이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준다. 포장마차서 사온 두꺼비 서너 병과 그의 애호 안주 오징어숙회. 신문지를 포개 탁자 위에 펴면 간이 술상이 차려진다. ‘취약 시간대 음주 절대 금지’라는 윗선의 강력 경고는 무시되기 일쑤. 특히 두 부류가 우리의 성토 대상 안줏거리였다. 우선 아나운서 중 소위 TV 스타급들. TV프로그램을 3~4편 하면 생방송과 녹화 시간이 많기에 열외가 된다. 그리고 한국어 연구 멤버들이었다. 국어국문학 전공 아나운서 중심으로 당시 KBS 한국어 이론 무장과 그 연장선에서 논문⸱책자 발간 등 이유로 숙직을 빼주었다. 아나운서실을 대외적으로 빛내주는 명분도 있었고. C 선배는 유독 두 그룹에 질색했다. “아나운서의 본령은 라디오예요. 티브이는 요망한 것. 다 일장춘몽이라고. 뭣이라? 국어 공부한다고 숙직 면제?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어이구 학자들 납셨네.” 얄궂은 운명이라 했던가? 티브이는 차치하고, 공적(公敵)이던 방송 언어, 표준어, 외래어 연구와 교육은 30년 이상 내 밥줄이 되었다.
C 선배는 간부들과 불화했다. 특유의 야인 기질로 자주 뻗대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있었다. 축구⸱농구 중계가 주특기.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4강의 위업을 기억하는가. 박종환 감독의 카리스마에 더해 C 선배의 애국 중계(?)가 단연 빛났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한국 축구가 세계 4강에 올랐습니다.” 아나운서의 전설 이광재 선배가 원조였으나 그에게 외려 잘 어울렸다. 자못 어두운 톤, 애조 띤 음색에 울음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치닫는 절규에 가까운 코멘트가 극적 효과를 내곤 했다.
마라톤 현장 중계는 ‘죽음의 중계’라고들 했다. 아나운서는 중계차 위 의자에 올라 난간에 끈으로 몸을 묶는다. 낙상 방지가 목적. 그러곤 선수들을 역방향으로 내내 바라보며 중계해야 했다. 어느 춥고 스산했던 날, 과업을 마치고 돌아온 C 선배. 남극 탐험 원정대의 아문센이 그러했으리라. 그 애틋하고 기괴한 복장을 본 선후배들은 시쳇말로 모두 웃픈 표정이 되었다. 흑회색 사파리 차림에 털모자 쓰고 장갑⸱망원경⸱물통에다 주머니에선 자양강장제⸱지사제(止瀉劑)까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우직한 준비성을 웅변하는 대목이다.
큰 시련도 있었다. 1980년 서울 장충체육관. 주지하다시피 전두환씨가 무도하게도 이 나라 대통령이 된다. 그 취임식 때 C 선배가 의식 중계를 맡은 것. 국가 행사 방송은 잘하면 본전이요 못하면 쪽박이다. 그는 잔뜩 긴장했다. 중계 배당받은 날부터 어색한 새 대통령 이름 ‘전두환’을 줄기차게 읊조렸다. 열여덟 해 입에 붙은 ‘박정희’라는 이름과 마침내 작별하는 날 아닌가. ‘박정희가 아니라 전두환’, 연신 주문을 걸고, ‘대한민국 제11대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입에 붙게끔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행사 당일, 중계석에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단상을 바라본 C 선배. 그런데 아뿔싸! 전두환씨는 영부인과 함께 등장했던 것. 불행히도 부부 동반 입장이라는 상황은 뇌리에 없었기에 ‘이순자’라는 이름은 아득하기만 했다. 결과는 최악 실수. “지금 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입장하고 계십니다!” C 선배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가 1주일여 만에 나왔다. 이후 아무리 만취해도, 대선배들이 무섭게 채근해도, 절대로 남산에서 겪은 일을 발설하지 않았다. 시대의 아픔이 빚은 촌극이었노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선명한 2대8 가르마, 불그스레한 낯빛의 상남자 C 선배. 여느 땐 순박하지만, 울혈을 건드리면 마치 사자 같았던 의협(義俠)의 충청인. 공활한 가을 하늘 바라보며 그를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