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석

#장면1.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배 속 아기 초음파를 보고 나왔다. 남편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 목소리를 높여 “오빠?”라고 불렀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남자 약 20명이 일제히 돌아봤다. 너무 민망했다. 앞으로 밖에서는 ‘오빠’라는 호칭은 못 쓸 것 같다.

#장면2.

네 살 딸이 물었다. “엄마, 아빠는 외할머니가 낳은 거야?” “어머나,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는 아빠를 오빠라고 하잖아.” 딸 위로 두 살 터울의 아들이 있다. 딸은 아들을 ‘오빠’라 부르고, 엄마는 아빠를 ‘오빠’라 부르니 엄마, 아빠는 한배에서 나온 남매라는 나름 ‘합리적 결론’에 다다른 것. 네 살의 추론치곤 기특하다. 당장 남편의 호칭을 바꿔야겠다.

#장면3.

199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1학년 때 만난 한 학년 위 ‘오빠’부터 대부분 ‘오빠’와 연애했고 ‘오빠’와 결혼했다. 거의 명맥이 끊긴 운동권 학회 소속인 한 친구만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 얼마 전 만났는데 여전히 자기 남편을 ‘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박찬대(오른쪽)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그 오빠가 누구인지, 김건희 여사 직접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1

오빠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거나 일가친척 가운데 같은 항렬의 여자가 손위 남자를 가리키는 친족 용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정의. 본디 혈연 관계에서 나온 호칭이지만, 교우 관계, 연인 관계까지 확장돼 사용되고 있다. 학교와 직장의 지인을, 연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다. 적어도 50대 이하에게는 그다지 귀에 거슬리는 표현도 아니다.

최근 김건희 여사가 명태균씨에게 보낸 카톡 속 ‘우리 오빠’가 남편 윤석열 대통령인지 친오빠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김 여사는 ‘우리 오빠’가 ‘철없이 떠든다’ ‘무식하다’고 했다. 대통령실과 명씨 모두 이 ‘우리 오빠’는 김 여사의 친오빠라고 밝혔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항간에는 “친오빠가 있었길래 망정이지, 없었으면 어떻게 넘어갈 뻔했느냐”는 오지랖도 넘실댄다.

지난해 2월 미국의 지식 문답 사이트 ‘쿼라(Quora)’에는 “한국인들이 남자 친구를 손위 남자 형제란 뜻의 ‘오빠’로 부르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냐”는 질문이 등록됐다고 한다. 피를 나눈 형제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연인·남편을 같은 호칭으로 부르는 건 너무나 독특한 한국 문화라는 것. ‘오빠’라는 단어의 용례가 넓어진 탓에 벌어진 일이다.

그래픽=송윤혜

◇X세대와 등장한 ‘오빠’

혈육 관계가 아닌 남자에게 ‘오빠’라는 호칭이 본격 사용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1970년~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학가에서 여자 대학생들은 남자 선배를 ‘오빠’가 아닌 ‘형’이라 불렀다. ‘학형(學兄)’의 줄임말이라고도 한다. 더러 86(80년대 학번·60년대생) 운동권 세대는 여전히 이 ‘형’이라는 표현을 남녀 선후배 사이에 사용하기도 한다. 나는 너를 남자로 보지 않고, 너는 나를 여자로 보지 않는, 우리는 가부장제에서 출발한 계급에 얽매이지 않은 동등한 혁명 동지라는 ‘의식적인 의식화’가 깔린 것이리라. 90학번인 박민재(53)씨는 “군대에 다녀온 뒤 93~94년 언저리부터 남자 선배를 부르는 여학생들의 호칭이 ‘오빠’로 확실히 변했다”며 “’형’이라는 호칭은 촌스럽고 우울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고, 운동권의 쇠락과 연결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즈음의 20대를 X세대(1970년대생)라 부른다. X세대는 80~90년대 고도성장기와 민주화 혜택을 누리며 성장했다. 남녀 구분 없이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구김살 없는 이 신인류는 개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남성성·여성성도 금기시되지 않았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고, H.O.T.·젝스키스로 이어지는 아이돌 문화가 자리 잡았다. 대학 농구가 인기를 끌며 ‘오빠 부대’도 등장했다. 오빠는 더 이상 가내(家內)에 갇히지 않는 호칭으로 불려 나온 것이다.

90년대 후반에는 ‘OPPA(오피피에이)’라는 보이 그룹도 활동했다. 2012년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 유행을 타면서 ‘오빠’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도(오빤 강남스타일!)도 글로벌하게 격상됐다. ‘오빠’를 영어로 표기한 ‘Oppa’는 2021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출간하는 영어 사전에 정식 등재됐다.

북한에서 ‘오빠’를 쓰면 감옥에 간다. 김정은 정권이 한국 문화의 유행을 막는다며 3~4년 전부터 ‘오빠’라는 말을 쓰는 행위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평양문화어보호법 제19조는 “혈육관계가 아닌 청춘남녀 사이에 ‘오빠’라고 부르는 행위는 괴뢰식”이라고 명시했다. /일러스트=김성규

◇남성이 더 ‘오빠’ 호칭 선호?

일종의 지체 현상이라 해야 할까. 70~80년대생 부부들은 이 ‘오빠’ 호칭을 두고 뒤늦은 혼란을 겪는다. 99학번인 이지현(44)씨는 지난해 남편을 부르는 호칭을 ‘여보’로 바꿨다고 한다. “불혹이 되면서 언제까지 오빠라는 ‘유아틱’한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여보’나 자녀 이름을 넣어 ‘누구 아빠’라고 하고요.” 그런데 정작 이씨의 남편 한모(48)씨는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남편이 남자 형제뿐이에요. ‘오빠’라는 호칭이 다정하고 좋았나 봐요. 누구 아빠는 너무 나이 든 느낌이래요.”

SM C&C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지난 19~20일 진행한 설문 조사(30~50대 기혼 남녀 1603명 대상)에 따르면, 50대 남성의 20%도 ‘오빠’라는 호칭을 가장 선호한다고 답했다. 기혼 여성 중 남편을 ‘오빠’라 부른다는 응답은 30대 37.7%에서 40대 26.2%, 50대 9.4%로 급감했다. 하지만 ‘오빠’로 불리는 게 편하다는 남편들은 30대 33.1%에서 40대 29.5%, 50대 20%로 아내들보다 낙폭이 작았다. 호칭은 쌍방의 합의로 정해지고, 애정이 기반인 관계에서는 상대가 듣기 좋은 쪽으로 불리게 마련. 여전히 남성이 연상인 결혼이 일반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앞으로 부부 관계에서 ‘오빠’라는 표현이 애용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뜻이다.

그래픽=송윤혜

30·40대 여성들에게는 ‘여보’와 ‘오빠’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30대 여성의 37.7%는 ‘오빠’, 31.5%는 ‘여보’를 썼고 40대 여성의 27.3%는 ‘여보’, 26.2%는 ‘오빠’를 썼다. 50대에서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는 한 자릿수로 확연히 줄어드는데, 86세대는 이 용어가 친숙하지 않은 탓도 있다는 분석이다.

결혼 전후로 호칭을 바꾼 사람들 대다수(67.4%)는 ‘기존 호칭이 나이와 상황 등 처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21.16%는 ‘양가 부모님 등 어른들의 눈치가 보여서’, 9.25%는 ‘자녀들의 눈치가 보여서’라고 답했다.

◇“부부간엔 자유롭게 하되…”

맘카페 등 여성 커뮤니티에는 이런 글이 올라온다. ‘남편이랑 동갑인데 시댁 가서 평소처럼 남편 이름을 부르면 눈총을 받아요.’ ‘자기야라고 부르다가 시어머니한테 한번 혼나고 이제 시댁 가면 아예 남편을 안 불러요.’

03학번인 김현진(40)씨는 “남편도 나도 오빠라는 표현은 이상하게 입에 안 붙어 연애 때부터 자기라고 했고 지금도 여보라고 한다”고 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조현우(53)씨는 “처음부터 남편을 OO씨라고 불렀다. 싸울 때는 성까지 붙여 ‘김OO씨’라고 부른다”고. 오빠·여보·자기(honey) 등이 아닌 성(姓)까지 붙여 풀네임(full name)으로 상대를 부르는 건 만국 공통의 ‘사이렌’이기도 하다. 유튜브에는 ‘남편을 풀네임으로 불렀을 때의 반응’이라는 해외 동영상도 많다. 어느 집이든 부부 주변의 모든 사람이 산지사방 흩어지고 자세를 고쳐 앉은 남편이 ‘내가 또 무얼 잘못했나’ 눈알을 굴리는 모습.

그렇다면 남편을 부르는 적절한 용어가 있을까. 국립국어연구원과 조선일보가 함께 만든 표준화법(1992)과 표준언어예절(2011),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2020) 등에 따르면 아내가 남편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92년 버전에는 신혼 초엔 ‘여보, OO씨, 여봐요’, 자녀가 있을 땐 ‘여보, OO 아버지(아빠)’, 장·노년에는 ‘여보, 영감, OO(손주 이름) 할아버지(아버지)’ 등을 적절한 호칭으로 규정했다. 2011년 버전도 크게 바뀌진 않는다. 자녀 유무와 세월의 흐름 등을 개의치 않고 이상 언급한 호칭을 두루 쓸 수 있고,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더해졌다. 어느 쪽에도 ‘오빠’라는 호칭은 없다.

국어원은 특히 “결혼 전 호칭을 결혼 후에도 사용해 형·오빠·아저씨라고 하는 것은 어법에 맞지 않으므로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남편 호칭의 또 다른 문제로 ‘자기’를 꼽으면서, “’자기야’는 안 돼도 ‘자기’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으나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 박았다. 다만 2020년 버전에는 “부부간 부르는 말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혹은 어색하게 하지 않는지 주의하는 게 좋다”고 했다.

필리핀 마닐라의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든 선전물에 ‘Oppa’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세계 한류팬들은 이민호, 박서준, 이종석, 지창욱 등을 '궁극의 오빠들(ultimate oppas)'이라 부른다. /인터넷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