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시픈 당신에게’는 늦깎이 한글학교 어르신들 문집이다. 예순 넘어 한글을 깨친 분들이다. 소리 나는 대로 써 내려간 소박한 글에 삶의 희로애락을 담았다. 맞춤법은 서툴러도 절절한 이야기가 마음을 적신다.
늦게나마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된 기쁨이 지면에 가득하다. ‘글자 몰라 기죽어서 어깨 움츠리고’ 살아온 족쇄를 벗고 자유롭게 은행도 가고 병원에도 가는 일상을 즐긴다. ‘6심 평생 삼국시대 처음 아랐다’는 시는 쓰기와 읽기가 열어젖힌 새로운 세상을 찬탄한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느끼며 상상한다. 누구나 자기 인생이 한 편의 대하소설 같다고 여기지만 아무리 파란만장한 삶도 기록하지 않으면 비바람 속에 사라진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자신이라는 존재를 쓸 수 없다.’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갖는 진정한 의의는 여기에 있다. 작가는 폭력 앞에 스러져 간 단독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들의 나지막한 부르짖음을 절제된 시적 공감의 언어로 그려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민중소설과 증언문학을 넘어 세계 문학사의 시민권을 획득한 이유다. 한강 작품은 ‘피로 쓴 글’임에도 아름답고 고요하다.
돈과 권력이 호령하는 시대에 문학은 무력하다. 하지만 문학은 돈과 권력의 억압에서 인간을 숨 쉴 수 있게 한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다. 모든 문명국가에서 국어는 필수 과목이고 어린이는 읽기와 쓰기부터 배운다. 읽어야 깊고 넓게 사유할 수 있고 글로 써야 삶과 세계가 선명해진다.
박식하고 통찰력 있던 한 철학 교수는 ‘도서관에 있는 책 대부분이 쓰레기’라며 글을 쓰지 않았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의 지성을 몇몇 지인만 안타깝게 기억한다. 청나라 화집 수백 권을 모은 의사 친구는 세계 곳곳 미술관 다니며 그림 ‘읽는’ 게 평생 취미다. 난 귀한 경험을 글로 남기라고 응원한다. 글의 세계엔 계급이 없다. 맛으로만 겨룬 ‘흑백요리사’처럼 오직 글만이 말한다.
서양은 시골 동네 도서관도 자서전과 전기 서가가 따로 있다. 유명인뿐 아니라 보통 사람 자서전이 가득한 게 인상적이었다. 공인의 회고록 출판도 활발하다. 우리 사회와는 다른 풍경이다. 타인에 대한 평가나 개인적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낸 글이 화근이 되는 한국적 풍토가 걸림돌이다.
대학 신입생들에겐 철학책 대신 장편 대하소설을 권했다. 재미있는 소설 읽기는 마음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골방에서 만화책 보며 혼자 깔깔대던 아이를 대견하게 바라보던 어머니 눈길이 한없이 따뜻했다. 만화와 무협소설, 삼국지와 임꺽정을 거쳐 한국 문학과 괴테,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를 통독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문학이었다. 방황하던 나를 책의 바다가 살렸다.
문학은 한 시대와 인간 내면의 초상화이며 독서는 언제나 옳다. 읽기와 쓰기는 영혼의 모음(母音)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누구와도 대화하고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일기를 씀으로써 새 세상을 만난다. 누구나 삶과 사유의 조각들을 쓰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다. 소셜미디어엔 빛과 그림자가 있지만 ‘모두가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는 스스로 빛난다.
한글학교 늦깎이 어르신들은 읽기와 쓰기로 자신을 입증했다. 새로운 세계가 활짝 열렸다. 무수한 밤하늘의 별에 제 자리가 있듯 각자의 자투리 글도 이미 의미 충만하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지금은 글로 삶을 증명할 때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글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