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으로 이사한 뒤 아침마다 책을 읽으러 나가는 집 앞 공원 벤치 /편성준 제공

보령시립도서관에 가서 무슨 자료를 찾다가 내가 사는 연립주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노인과 마주쳤다. 집 앞 작은 공원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무료하게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70대 남성이었는데 얼굴엔 권태가 가득했다. ‘권태’라는 글을 쓴 이상(李箱)이 일흔 살까지 장수했으면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도대체 저 할아버지는 왜 대낮에 저렇게 무료한 표정을 하고 저기 앉아 계신 걸까, 같이 놀 친구도 없고 재밌는 것도 못 찾아 저러나? 나도 나이가 들면 어느 날 저이처럼 무료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을까, 할 일이 있으면 표정이 좀 달라질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평생 죽어라 일만 하다가 ‘아이고, 이제 좀 살 만해지니까 가네’ 하고 주변인들이 혀를 차는 모습을 많이 보고 들었다. 물론 ‘살 만해진다’라는 게 꼭 경제적인 안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생이라는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조종하는 사람이 진짜 신나는 삶의 주인공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적어도 인생이 허무하다거나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서 지겹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렸을 때부터 주도적인 삶을 산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심심하진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즉 심심해도 괜찮았다. 어린애들은 마구 뛰어놀고 밥을 엄청 퍼먹기도 하고 그러는 법인데 나는 그런 것보다 혼자 구석에 처박혀서 책을 읽거나 공상하는 걸 더 좋아했다. 물론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성적이 너무 좋은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어렸을 때라 멋있는 척을 하고 싶었는데 초점이 잘 안 맞은 것이다).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해서 어른들의 근심을 사곤 했다. 변호사나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긴 한데, 그건 거짓말이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이다 /편성준 제공

군대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제대할 때가 가까워지면 ‘추억록’이나 ‘방패’를 만든다고 분주했으나 나는 말년 병장이 되어도 천하태평으로 놀기만 했다. 내가 근무하던 공병대는 나무나 합판이 흔해서 전역할 때면 저마다 거북선이나 정육면체 바둑판을 만들곤 했다. 나무로 깎은 거북선 몸체 위로 수많은 이쑤시개가 촘촘히 박히는 걸 목격하다 보면 어느새 그 선배는 전역을 하기 일쑤였다. 내가 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니까 하루는 후임병이 물었다. “편 병장님, 그렇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면 심심하지 않으세요?” 나는 해맑게 대답했다. “아니, 난 괜찮던데.” 거북선을 만드는 대신 같이 근무하던 방위병에게 장정일의 시집을 사다 달라고 부탁해 읽었다. 그때 깨달았다. 하루 종일 TV 드라마만 보거나 책만 읽어도, 글만 끄적거려도 좋아하는 게 있으면 심심하지 않다는 것을.

그렇다고 그때부터 엄청나게 책을 읽고 문학 수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심심할 때 내가 뭘 하고 있나 스스로를 쳐다보면 어김없이 뭔가를 읽거나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광고 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읽고 쓰는 것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 덕분이었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게 있느냐는 점이다. 심심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을 보면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다’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반면 뭔가를 좋아하는 게 확실한 사람에겐 결핍이 없다. 쉽게 늙지도 않고 눈은 언제나 초롱초롱한데 때로는 좋아하는 걸 통해 엄청난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첫 공식 소감을 살펴보자.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최근에는 건강을 생각해 커피를 비롯한 모든 카페인도 끊었습니다. 좋아했던 여행도 이제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 사람입니다. 대신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읽어도 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는 좋은 책들을 놓치지 않고 읽으려 시도하지만, 읽은 책들만큼이나 아직 못 읽은 책들이 함께 꽂혀 있는 저의 책장을 좋아합니다… (후략).”

무슨 재미로 살긴. 좋아하는 것만 해도 하루가 바쁘지. 한강 작가 얘기를 내 식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내가 얘기하는 ‘좋아하는 것’은 취미 생활을 말하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것으로 돈도 벌고 세상의 인정도 받아야 그게 진짜다. 물론 나는 그러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적어도 평생 심심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한강 작가의 작품 중 안 읽은 책들을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

군산북페어에서 한국영화 대사들이 든 책을 사고 기뻐하는 모습 /편성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