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는 차 떼고 포 떼고 오직 수력(水力)과 고인물력(?)만으로 계급이 결정된다. 수면은 잔잔하지만 등록 전쟁, 자리 전쟁, 샤워기 강탈 전쟁, 탈의실 선풍기 앞 자리 전쟁 등이 벌어지는 장소. 수영장이다.
‘수(水)강 신청’도 치열하다. 참전 1시간 전부터 PC방에서 대기한다. 59초가 되면 미친 듯 마우스를 클릭하고 희비는 1초 만에 갈린다. 기회는 매달 있지만, 한번 승리자는 영원한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존 수강생에게 신입 회원보다 우선권(재등록 우선권)을 주는 곳이 많기 때문. 그러면서 꿰찬 자리를 영~원히 내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우리는 이들을 ‘수영장 지박령’이라고 부른다.
구천, 아니 수영장을 떠도는 이들 때문에 신입 회원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도통 나질 않는다. 서울 시민이 경기도까지 원정을 떠날 정도라니 말 다했다. 굿판을 벌일 수도 없고, 어쩐담. 신통한 해법을 찾은 마포아트센터 수영장에서 지난달 23일, 새벽부터 밤까지 14시간 상주하며 관찰해 보기로 했다. 전쟁터 같은 수영장의 하루를.
◇새벽,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전 5시. 아침 최저기온 11.4도, 점퍼가 필요하다. 게다가 보슬비까지. 따악~ 운동 가기 싫은 날이다. 그러나 나만 게을렀다. “어이! 허이!” 꼭두새벽부터 수영장에 울려 퍼지는 우렁찬 기합. 수모와 수경으로 무장한 성인 수십명이 입장 시간 15분 전부터 몸을 풀었다. 오전 6시 정각 준비운동을 마치고 입수.
수영장 첫 시간인 6시반(班)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출근 도장 찍는다는 ‘새벽반 사람들’로 통한다. 전국 공통이다. “폭우로 지하 수영장 일부가 빗물에 잠겼는데 새벽반 사람들이 태풍을 뚫고 나와 바가지로 빗물을 퍼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 ‘수친자(수영에 미친 자)’라 불리는 초인적 의지의 직장인 혹은 새벽잠 없는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비장하다. 대화도 없다. 강사의 구호에 맞춰 수영만 한다. 혹자는 “잠이 덜 깬 상태로 물에서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에 새벽반은 말이 없다”고 한다. 수영 7개월 차 직장인 김서현(25)씨는 “이렇게 꿀꿀한 날은 오히려 사람이 적을 수 있어 더 부지런히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수영장이 한가한 날은 드물다. 왜? 새벽반 사람들 모두가 “오늘은 사람 적겠지?” “오늘은 좀 적을까?” “오늘은…?” 같은 헛된 희망을 품기 때문.
◇오전, 피 튀기는 오픈 런
“띵동, 1001번 고객님, 1번 창구로 오십시오.” 오전 7시, 은행 창구에서나 들을 법한 안내음이 수영장 로비에 울려 퍼졌다. 안내 데스크 앞에는 가방 수십여 개가 사람 대신 놓여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가방 주인 30여 명이 먼저 온 순서대로 번호표를 뽑기 시작했다. 며칠 전 수강 신청엔 성공했지만, 원하는 시간대를 고르지 못한 기존 회원들이 시간 변경을 위해 오픈 런을 하는 모습이었다.
수영 수강생 신영순(67)씨는 이날 2번 번호표를 뽑았다. 새벽 1시부터 차에서 쪽잠 자며 기다렸단다. 1번은? 탁구 수강생 구은우(70)씨. 전날 밤 9시부터 가족들과 돌아가며 기다렸단다.
신입 회원들의 수강 신청은 더 치열하다. 기존 회원이 차지하고 남은 자리로 경쟁하다 보니 재수나 삼수가 일상. 이날 만난 수강생 중 단번에 ‘피케팅(피 튀기는 티케팅)’에 성공했다는 이는 드물었다.
직장인 허모(40)씨는 작년 8월 첫 수강 신청을 시도했지만 석 달 내리 실패했다. 그는 “온라인 수영 카페에서는 ‘누가 죽어야 자리가 난다’는 말까지 있었다”고 했다. 2022년 마포아트센터 수영장 36개 강좌는 접수 시작 1초 만에 마감됐는데, 전체 정원 1688명 중 약 80%(1350명)가 기존 수강생이었다.
바늘 구멍 뚫고 들어와 ‘텃세’에 시달리기도 한다. 40대 초반 한 수강생은 “좀 오래 다녔다 싶은 사람들은 원하는 강사님과 원하는 수영 순서까지 있다”며 “신입이 오면 ‘수영복 노출이 심하다’ ‘머리 안 감고 입수한 거 아니냐’ 꼬투리를 잡고 내보내려 한다”고 고발(?)했다. 어떤 수영장에서는 40~50명 되는 할머니들이 5~6명인 할아버지들에게 “이 레인은 남금(男禁·남자 금지)”이라며 쫓아내는 일도 있었다고.
마포아트센터는 최근 기존 회원의 재등록 우선 기간을 1년으로 제한하는 ‘기간 수료제’를 도입했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산하 공공 체육 시설 중 최초다. 등록 후 1년이 지난 기존 회원은 신규 회원처럼 다시 선착순 수강 신청을 해야 한다.
기존 회원 불만은 없냐고? 반발이 있었지만 수긍하며 양보하는 사람도 많다. 이 수영장에 온 지 1년 9개월 차인 주부 천모(67)씨는 최근 딸의 도움으로 오전 9시 수업과 오후 1시 수업 등록에 모두 성공했지만, “대기 인원만 100여 명”이라는 말에 수업 하나를 포기했다. 천씨는 “내 욕심을 차리기보다 배려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며 “떨어지면 다른 수영장에 가야지 뭐~”라고 웃었다.
◇정오, 웰컴 투 더 정글~
매 시각 길이 25m 레인 6곳에서는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강사 구호에 맞춰 레인 끝에서 끝까지 다녀오길 반복한다. 일명 ‘뺑뺑이’.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미묘한 질서가 보인다. 1번 레인은 초급반, 2·3번 레인은 마스터즈, 4·5번 레인은 상급반, 6번 레인은 중급반이다. 초급반은 부력 있는 킥판을 들고 병아리처럼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수영복은 대체로 검은색. 수영장이 처음인 신입은 단색을 주로 입는단다. 반면 옆 마스터즈 레인 수강생은 큼지막한 팔동작으로 요란하게 물을 잡으며 청새치처럼 날아다닌다. 수영복도 화려한 컬러. 한 수강생은 “수영복 색만으로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균형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으니, 바로 낮 12시 ‘자유 수영’. 시간대별로 주연령대와 레인이 나뉘는 강습과 달리 이 시간에는 나이도, 실력도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모인다. 숙취에 시달리다 나온 대학생, 점심 시간 짬을 낸 직장인, 아이 어린이집 보낸 엄마들, 마실 갔다 방문한 어르신….
신경전이 시작됐다. A씨가 앞으로 간다(자유형). B씨는 뒤로 간다(배영). 속도가 느린지 뒤따라오던 C씨가 어정쩡하게 멈춰선다. 개구리 헤엄(평영) 하던 D씨 발에 나비 헤엄(접영) 하던 뒷사람이 머리를 맞았다. 맞은 사람은 멈췄는데 친 사람은 그냥 간다. E씨는 수영은 안 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운동을 한다. 이 모습을 F씨가 못마땅하게 흘겨보며 지나간다.
수강생들은 “자유 수영 시간엔 온갖 군상을 다 볼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인지 화장실에서 뒷담화(?)가 들리기도. “저 언니 뭐야, 왜 이렇게 짜증을 내?” “몰라, 오전반이래~.” 역시 정글이 맞구나.
◇오후, 어르신과 직장인 타임
“요즘 딸내미 안 보이네?” “응, 직장 옮겨서 오후에 와~.” “병원을 집처럼 생각해야…” “언니야, 물리치료 받아야 된다니까?” 오후 1시쯤, 딸내미 안부까지 챙겨 묻는 소리가 탈의실에서 새어 나온다. 음악에 맞춰 물속에서 춤추며 체조를 하는 아쿠아로빅 시간이다. 하중 부담이 적은 물속 운동이라 관절이 좋지 않은 어르신 수강생이 많단다. 대부분 60~70대. 그래서인지 탈의실은 온통 건강 이야기, 자식 이야기, 간혹 “귀여운 우리 똘이” 같은 반려견(추정) 이야기.
어둑해졌다. 피곤에 찌든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저녁 시간엔 주로 대학생이나 20~30대 직장인이 많다고. 한 여성이 어정어정 탈의실로 들어왔다. 정장 차림에 손에는 단화를 들고. 영락없는 퇴근 직후 직장인. 갈색 생머리에 트레이닝복 차림, 안경 끼고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 차림새는 달랐으나 공통점이 있었다. 좀비처럼 움직임이 상당히 느리다는 것.
오후 7시, 시작 시간에 딱 맞춰 온 이는 정원 100명 중 20명이 채 안 됐다. 정각에서 5~10분쯤 지나야 수영장이 꽉 찬다. 허나 지각이 대수인가. 공부 끝나고, 퇴근하고 온 것만으로도 박수 받아야 한다. 직장인 이아란(37)씨에게 “일 마치고 피곤하지 않으냐” 묻자 “사실 저녁 약속이 많은 금요일은 잘 못 오는 편”이라고 했다. 술을 마시고 싶진 않을까. 그는 “운동하고 술을 마시면 죄책감이 덜해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14시간을 보내고 귀가하는 길에도 수영장이 어른거렸다. 물도 깨끗하고 넓다. 매년 1600명 넘는 신규 회원이 들어올 수 있다니, 마포구민으로서 여기 등록하지 않는 건 손해다 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