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숭고한 미술품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작가가 창작하면, 누군가 구매합니다. 소장품이 되고, 소중히 보존됩니다. 바로 ‘컬렉션’입니다. 돈만 많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컬렉터의 안목과 열정, 스토리가 있어야 하죠. 전시 경력 30여 년의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이 세계 곳곳의 컬렉션, 컬렉터들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반은 우연이고 반은 필연이었다. 사실 그 명성은 2000년대 초부터 들어왔다. 블록버스터 수준의 서양 추상미술 전시가 잇따라 열리면서 해외 유명 컬렉션이 소개되는 일이 왕왕 일어났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거장 이우환 선생이 이때 건넨 의견이 바로 “프랑스 매그(Maeght) 가문의 컬렉션을 소개해 보라”는 것이었다. 모더니즘의 본령이라든지, 추상성의 형성 과정 같은 것을 여러 말 필요 없이 그 훌륭한 소장품들로 단박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그들과 닿을 인맥도, 천문학적 예산도 모두 꿈같은 얘기였다.
그러다 만난 것이다. 6년 전 경기도미술관 관장으로 일하던 시절, 매그 가문의 일원이 미술관을 방문했다. 당시 열렸던 전시에 출품 작가로 참여한 친구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그와의 만남으로 매그 재단과 협업할 길이 처음 열렸다. 이듬해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재단(미술관)을 방문했다. 일단 정원에서부터 놀라고 말았다. 호안 미로, 알렉산더 칼더, 알베르토 자코메티…. 20세기 미술사 거장이 빚어낸 예술적 생동감이 공간마다 가득했다. 프랑스 최초의 사립 미술 재단, 20세기 근현대 미술의 보고. 이곳의 설립자 매그 부부 얘기를 해볼까 한다.
◇예술, 고통을 뛰어넘다
에메 매그(Aimé Maeght·1906~1981)는 사업가였다. 판화가이자 디자이너였고 출판업자였다. 그의 역량을 눈여겨본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의 조언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화랑업에 나섰다. 부인 마르그리트(Marguerite)와 함께 1937년 ‘갤러리 아르테’를 칸에 열었다. 1945년에는 파리에 ‘갤러리 매그’를 열었고, 앙리 마티스 전시를 개최했다. 매그의 명성은 1947년 기획된 ‘초현실주의전’으로 급상승했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꿈과 무의식, 환상의 세계에 주목한 부부의 안목과 열정은 그들의 갤러리를 최정상급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곧 슬픔의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막내 아들 베르나르(Bernard)가 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요양을 위해 생폴드방스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1953년 아들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11살이었다. 이때 평생의 조언자, 입체파 거장 조르주 브라크가 부부에게 제안했다.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슬픔에 젖어 있는 대신, 햇빛이 내리쬐고 산들바람이 항상 불어오는 이곳에 예술의 집을 가꿔보라는 것이었다.
이곳에 재단을 세우기로 마음먹은 부부는 미국에 가서 그들보다 먼저 재단 사업을 시작한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 반스 컬렉션, 필립스 컬렉션 등을 둘러봤고, 그들의 소중한 소장품이 온전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구상했다.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전폭 지원도 보태졌다. 스페인 출신 미국 건축가 주제프 류이스 세르트(Josep Lluís Sert)의 설계도 훌륭히 이뤄져, 마침내 1964년 1만3000여 점의 20세기 미술품을 보유한 프랑스 최초이자 최대의 미술 재단이 탄생했다. 올해 개관 6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확장 공사도 진행됐다. 매그 부부와 예술가들의 우정을 기리는 특별 전시가 지난달까지 열렸다.
◇“피카소 말고 신예 원해”
재단 곳곳은 자연과 인위가 조화를 이룬다. 동네에서 난 돌을 적극 활용한 외부 벽면의 자연스러움, 하늘을 향해 초승달 모양으로 굽어 올라간 흰 지붕의 형태감처럼. 매그 부부는 예술과 삶의 조화라는 명제를 충실히 드러내기 위해 공간마다 예술가들과 협업한 환경적 예술 작품을 설치해 놨다. 호안 미로의 유머러스한 조각으로 조성된 미궁 정원, 고독한 인물 조각이 무심코 툭툭 놓여 있는 자코메티의 중정, 마르크 샤갈과 피에르 탈 코트가 함께 제작한 벽화, 물고기 문양으로 장식된 브라크의 수영장….
그러나 모든 거장은 처음에 신예였다. 찬란한 매그 컬렉션 역시 초기부터 부부가 현재 거장이 된 당시의 무명 작가들을 후원했던 결과다. 재능 있지만 이름이 덜 알려진 유망 작가 발굴에 주력해 왔다. 지금도 그런 작가들을 골라 작업 공간 등을 지원한다. 한국의 오수환 화가 역시 자코메티가 썼던 작업실에 묵으며 작품 활동을 했고 전시도 열었다. “역량은 있으나 덜 알려진 작가를 지원한다”는 것이 매그 컬렉션의 전통이자 원칙. 손녀 요요 매그는 2008년 방한 당시 “피카소 작품은 다루지 않는다”며 “그는 스스로 작품 판촉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매그가 사랑한 자코메티
컬렉션은 실로 화려하다. 이를테면 재단 개관을 위해 특별 제작된 샤갈의 대작 ‘인생’은 프랑스 국보로도 지정된 상징적 작품. 샤갈은 매그 부부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헌신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296×406㎝의 이 대작을 완성했다. 인간의 대소사, 음악과 춤, 종교 등 인간 삶의 대서사시가 총망라돼, 그림이 걸린 이 장소를 굴곡진 20세기를 뚫고 강인하게 버텨낸 예술적 승리의 성지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매그 재단을 방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보고 싶어 하는 건 자코메티의 조각일 것이다. 철사처럼 가늘고 긴 조상(彫像)으로 존재의 고독을 표현한 조각가. 스위스 태생이지만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매그 부부는 자연스레 자코메티와 친분을 쌓으며 교감할 수 있었다. 1940년대 매그는 자코메티의 가능성을 간파했고, 자신이 기획한 전시에 적극 초청하고 책으로 출판했다. 그런 연유로 자코메티의 걸작 수십점이 매그 부부에게 소장될 수 있었다.
특히 ‘개’를 아꼈다. 매그의 집무실과 거실에는 자코메티의 ‘개’(1951)가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았다. 청동 ‘개’는 매그의 가족처럼 테이블 위에, 화로 앞에 놓여 희로애락을 공유했던 것 같다. 요요 매그는 2020년 발간한 책 ‘요요 매그의 매그 이야기’에서 유년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할머니·할아버지 댁 거실에는 자코메티의 ‘개’, 디에고 자코메티(동생)의 ‘고양이’, 미로의 ‘태양의 새’ ‘달의 새’ 같은 조각들이 놓여 있었어요. 자코메티가 디자인한 램프와 테이블도 있었지요. 우리는 거실에서 놀았어요. 어떤 제약도 없었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깨뜨리지 않았는데, 예술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심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죽어서도 자코메티 손길이…
‘베니스의 여인 Ⅲ’(1956)도 대표 소장품이다. 자코메티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이상하고 길고 점점 가늘어진 다리’를 가진 여성을 묘사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은 동일한 뼈대를 15가지 버전으로 만든 여성 누드 시리즈 중 하나인데, 이 조각상을 제작하면서 자코메티는 여성의 ‘머리’를 납작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여성의 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의 이 작품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걸어 나오는 유령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쟁으로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노력은 자코메티로 하여금 직관적인 인체 탐구에 몰두하도록 했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그런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매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묘지 디자인을 자코메티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4년 뒤 동반자 곁에 묻혔다.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했기에,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부부의 컬렉션은 가능했다. 이 컬렉션에는 지독한 상처를 겪고도 파멸에 이르지 않으려 예술에 투신했던 거장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숨결을 느끼기 위해, 지금도 전 세계에서 매년 약 20만명이 이곳을 찾는다. “이곳은 미술관도 갤러리도 아닙니다. 우리가 늘 지원했던 예술가들을 소개하고자 우리 가족이 꾸린 장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