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을 맞으며 고독을 잘근잘근 씹고 싶을 때, 홀로 사색에 빠지고 싶을 때, 걸어볼 만한 길이 있다. 강화도 20개 코스를 엮은 ‘강화나들길’ 중 11코스인 ‘석모도 바람길(바람길)’이다. 강화군의 서쪽 섬, 석모도에서 꼭 가봐야 할 ‘빅 3′ 명소는 물론이고 만추(晩秋)의 단상을 퍼즐처럼 엮어 놓은 듯한 아름다운 길이 16km에 걸쳐 이어진다. 이 무렵 갯벌을 붉은 색감으로 물들이는 칠면초 군락부터 서해 명품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산사와 해변까지, 하루로도 충분히 알찬 석모도 바람길을 걸었다.
◇석모도 바람길 ‘체크인’
여행의 시작은 석모대교를 건너는 것부터다. 석모대교는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와 석모도를 잇는 1.4km의 연륙교. 2017년 6월에 석모대교가 개통된 후 배를 타고 입도하던 섬 여행의 낭만은 사라졌지만, 언제든 다리 하나만 건너면 석모도에 ‘체크인’할 수 있다. 석모도 바람길은 섬의 남쪽으로 해안길과 제방길을 따라 석모도 나룻부리항시장, 매음리 선착장, 어류정항, 민머루 해변, 어류정 수문을 거쳐 보문사까지 이어진다.
첫 코스인 나룻부리항은 석모도 여행의 관문과 같다. 석모대교 개통 전 외포항에서 배를 타고 오가던, 석모도에서 가장 오래된 나루터 ‘석포리 선착장’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여객선이 다니지 않아 한적해진 항엔 ‘나룻부리항시장’이 자리한다. 대여섯 상점에서 토박이 주민들이 젓갈과 강화군 특산물인 속노랑고구마, 순무, 늙은호박 등 농산물을 내다 판다. 맞은편엔 횟집과 식당들도 모여 있다. 나룻부리항시장엔 석모도 여행의 기분 좋은 출발을 알리는 보석 같은 풍경 하나가 숨어 있다. 다른 섬보다 크다는 뜻의 ‘대섬’이다. 이른 아침이나 오후에 느슨한 빛이 스며들 때, 때마침 물까지 차올랐을 때 호수처럼 잔잔한 수면에 반사된 대섬 풍경은 한 폭의 유채화 같다.
◇‘바다 단풍’ 만나는 칠면초 군락지
나룻부리항시장에서 석모도 바람길을 따라 도보 40여 분, 차로 5분 정도 달리면 ‘석모도 칠면초 군락지’와 만난다. 칠면초 군락지는 석모도를 대표하는 가을 풍경 중 하나. 석모도를 여행하는 날 운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는 칠면초 군락지로 알 수 있다. 미처 물때를 체크하지 못하고 무심코 바다에 닿았을 때 칠면초 군락이 펼쳐져 있다면, 괜스레 운이 좋은 날처럼 느껴진다. 광활한 갯벌을 뒤덮은 칠면초 군락지는 밀물 때 물에 잠겨 있다가 썰물 때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염생식물인 칠면초는 1년에 일곱 번 색을 바꾼다고 하여 붙은 이름. 여름엔 녹색을 띠다가 초가을부터 붉은빛이 돌기 시작해 10월이 지나면 비로소 자줏빛을 뽐낸다. 10월의 마지막 날 찾은 칠면초 군락지는 포도주를 뿌려 놓은 듯, 붉은 카펫을 깐 듯 강렬한 색감으로 여행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산책 나온 주민은 “올해는 조금 늦게 물들기 시작했으니 11월 중순까지도 붉은 칠면초 군락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대는 ‘석모도 칠면초 해안길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관찰 전망대가 있어 칠면초 군락지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주변이 막힘없이 트여 칠면초가 없더라도 시원한 전망을 만날 수 있다. 물이 차오르면 해상 전망대로 변신한다.
탐방로 옆에 갯벌로 진입하는 계단이 나 있다. 썰물 때 갯벌에 물이 완전히 빠져 단단해지면 칠면초 군락지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가 볼 수 있다. 단, 신발에 펄 묻을 것은 각오할 것. 칠면초 군락지는 다양한 해양 생물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갯벌 바닥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으로 게나 갯지렁이가 이따금 모습을 드러낸다. 공원 입구엔 4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평일엔 여유롭지만, 요즘 같은 여행 성수기 주말엔 주차 경쟁이 치열하다.
◇섬과 바다의 경계, 제방길 걷기
석모도 칠면초 군락지에서 석모도 바람길 따라 다시 20여 분 걸으면 ‘보문 선착장’이 나온다. 차로는 5분 이내로 가까운 거리다. 도착하면 개와 고양이가 먼저 나와 반긴다. 알록달록 자전거 조형물이 전시된 선착장은 응급 의료 전용 헬기의 이·착륙장으로 쓰인다. 평상시엔 물이 들 때에 맞춰 바다낚시를 즐기는 이들의 천국이다. “’사유지’ 팻말은 있지만, 바람 쐬러 온 여행객들을 막지는 않는다”는 게 주변 상인의 설명. 휴게소와 나란히 있어 누구나 잠시 숨 고르고 갈 수 있다.
휴게소 옆으로도 석모도 바람길 코스의 매력을 흠뻑 느낄 만한 제방길 구간이 연결된다. 밀물이 시작되면 석모도 바람길을 사이에 두고 한쪽으로는 바다 윤슬이 반짝반짝 빛나고, 다른 한쪽으로는 가을걷이를 끝낸 전원 풍경이 펼쳐진다. 제방 아래쪽으로 찰랑찰랑 청아한 물소리까지, 힐링 3종이 따로 없다. 여기에 볏짚이나 장작 태우는 냄새까지 바람에 실려 오면 몸과 마음이 ‘잠시 멈춤’ 상태가 된다. 지친 마음 쉬어 가라는 듯 사방으로 고요하고도 소박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마애석불좌상 굽어보는 ‘보문사’
칠면초 군락지와 함께 석모도 바람길의 ‘빅 3′ 중 하나는 보문사다. 보문사는 경남 남해 금산 보리암,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3대 해수 관음 성지, 기도 도량으로 꼽히는 명찰이다. 불가에선 기도 발원 명소로 알려졌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보문사는 전등사, 정수사와 함께 강화의 3대 고찰이다.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보문사 마애석불좌상’이 유명하다. 경내에 들어서면 열반에 든 부처의 모습을 한 거대한 와불과 오백나한이 먼저 맞는다. 오백나한 옆의 석굴사원 ‘석실’도 보문사의 명소에서 지나칠 수 없는 볼거리다.
마애석불좌상은 대웅전 옆 계단을 따라 10여 분을 오르면 나타난다. 계단 초입부터 “올라가 보자”는 이와 “나는 못 가네~” 하는 이들 사이의 가벼운 실랑이가 펼쳐진다. “내일, 내년은 두 다리로 못 올라갈 수도 있으니 갈 수 있을 때 올라가 봅시다.” 앞선 한 노인의 말에 무릎 탁 치고 힘차게 계단을 밟아보지만, 반도 못 가 숨이 턱 막히기 시작한다. 가을 한낮엔 목이 마르고 덥기까지 해 생수는 필수. 오르는 이들을 격려하듯 등 뒤론 서해의 풍광이 선물처럼 펼쳐진다. 420개의 계단을 오르면 마침내 9m가 넘는 마애석불좌상과 만난다. 서해를 품에 끌어안는 듯 인자한 표정으로 굽어 내려보는 마애석불좌상은 1921년 보문사 주지였던 스님이 조각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보문사는 서해에서도 손꼽히는 일몰 명소. 마애석불좌상 부근 전망대에 서면 서해로 떨어지는 장엄한 일몰을 감상할 수 있기에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다만 동절기엔 주말 오후 6시(평일 5시)까지만 개방한다. 일몰 감상 후 하산까지 시간이 촉박할 수 있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다. 매표소(입장료 성인 2000원·주차 요금 별도)에서 대웅전까지 오르는 길도 상당히 가파르다. 노약자의 경우 30분 간격으로 매표소와 대웅전을 오가는 승합차를 이용하면 비교적 편히 오르내릴 수 있다.
◇민머루 해변에서 인생 일몰을
석모도 바람길의 마지막 코스는 동선상 보문사지만, 해가 짧아지는 계절엔 코스를 바꿔 보문사 탐방 후 민머루 해변에서 마침표를 찍어보는 것도 괜찮다. 석모도 바람길 ‘빅 3′의 마지막 주자다. 보문사만큼이나 보장된 일몰을 만날 수 있는 해변이자 석모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이기도. 전체 1km, 폭 50m로 그리 크지 않은 해변은 해가 느슨해지는 오후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백사장에 간이 의자나 피크닉 매트를 편 나들이객부터 카메라를 든 사진 동호인들까지 저마다 일몰 감상 명당을 찾아 자리 잡는다.
일몰이 시작되면 하늘은 주홍빛이었다가 차츰 보랏빛, 푸른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석모도가 왜 서해 손꼽히는 일몰 명소인지 알려주는 듯 어둠이 내릴 때까지 황홀한 색감을 선보인다. 썰물 때면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다양한 생물을 관찰할 수 있다. 천연기념물인 저어새의 번식지이기도 하다. 미네랄이 풍부한 해변에선 바닷물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맨발로 걸어보겠다는 이들도 목격된다.
◇‘석모도 상주해안길’, 외포항도
석모대교에서 북쪽 길로 향하면 석모도의 또 다른 강화나들길 코스 중 하나인 ‘석모도 상주해안길’로 이어 갈 수 있다. 석모도 바람길보다는 볼거리가 적지만, 홀로 고독을 즐기며 걸어볼 수 있는 코스다. ‘동촌’에서 시작해 ‘석모나루’를 거쳐 ‘상주해안길’을 한 바퀴 돌아본다. 걷다 보면 강화도와 교동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기다린다. 하지만 버스 시간을 놓치면 여행이 아닌 고행이 될 수 있다.
석모도를 오가는 길에 참새 방앗간처럼 들러볼 만한 곳을 추가하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될 수 있다. 김장철인 요즘 석모도와 마주한 ‘외포항수산물직판장’에선 새우젓이 제철을 알린다. 만창호·현덕호·덕화호·재형호 등 배 이름을 딴 가게마다 뽀얀 새우젓을 수북하게 쌓아두고 “맛보고 가시라”며 손짓한다. 강화는 추(秋)젓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지역. 역시 추젓이 인기다. 외포항수산물직판장의 만창호 주인은 “3~4년 숙성된 게 감칠맛이 많이 난다”며 “강화 추젓은 적당히 짠맛이 나고 씹을수록 단맛이 느껴진다”고 소개했다. 젓갈뿐 아니라 꽃게, 대하 등 싱싱한 해산물, ‘만 원의 행복’을 내세운 접시 회 등도 발걸음을 붙잡는다. 외포항수산물직판장은 오후 6시까지 문 연다.
강화읍 원도심을 지난다면 ‘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도 들러볼 일이다.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직물 산업으로 번성하던 강화의 또 다른 특산품 ‘강화 소창’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소창은 주로 기저귀나 손수건을 만들던 친환경 천이다. 평화직물을 리모델링해 2018년에 개관한 소창체험관에선 소창에 스탬프를 찍어보는 체험과 바느질 체험 등을, 동광직물 공장을 리모델링해 2020년에 문을 연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에선 컵 받침 만들기 체험 등을 진행한다(일부 체험은 예약 필수). 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는 걸어서 5분 이내에 있다. 석모도에서 일몰까지 알뜰하게 감상하고 체크아웃할 계획이라면, 입도 전 들르는 게 낫다.
[ 밴댕이무침에 솥밥 먹고, 속노랑고구마라떼 한잔! ]
석모도 ‘가을 맛’ 음미할 공간들
강화도 외포항을 지나 석모대교에 들어서기 전 ‘꽃게 맛집’들이 유혹한다면 과감히 뿌리치고 석모도로 입도해도 괜찮다. 석모도의 가을 맛을 느낄 만한 식당들이 여럿 있으니. 강화도보다 비교적 한적한 석모도에선 ‘보문사’ 초입에 밴댕이정식을 내세운 식당들이 모여 있다.
메뉴 구성에 큰 차이는 없으나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춘하추동’의 밴댕이무침정식(1인 1만8000원·2인 이상 주문)엔 밴댕이무침과 함께 갓 지은 솥밥이 나온다. 매콤 새콤하게 무쳐낸 밴댕이무침도 맛있지만 순무김치, 잔새우볶음 등과 함께 간장게장도 상에 오르니 골고루 맛보기에 좋다. 강화 밴댕이는 멸칫과에 속하는 ‘반지’다. 지역에 따라 밴댕이, 디포리, 빈지럭 등 다양하게 불리는 생선. 성질이 급해 그물망에 걸리면 살아 있는 걸 보기 어렵기 때문에 건조시켜 주로 국물 내기용, 젓갈로 쓰지만, 석모도 일대에선 바로 잡아 회로 먹을 수 있다. 싱싱한 밴댕이회는 부드럽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식후 석모도 바람길 보문 선착장 휴게소에 입점한 ‘석모바람길11th’ 카페에 들러볼 일이다. 최근 석모도엔 근사한 인테리어의 ‘오션 뷰’ 카페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지만, 매점을 겸한 간이 휴게소 카페를 찾는 이유는 ‘속노랑고구마라떼’(6500원)가 맛있기 때문이다. 주인 오선희씨가 강화 속노랑고구마를 직접 갈아 만든다는 라테는 인공적인 맛이 느껴지지 않아 금세 바닥이 보인다.
고즈넉한 한옥에서 순무차를 무료 시음해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석모대교 건너편 강화읍 원도심에 있는 ‘소창체험관’ 내 ‘1938한옥’은 ‘평화직물’ 사택을 체험관 시설의 하나인 다도관으로 꾸민 곳이다. 상량문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따뜻한 강화 특산 순무차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다 보면 시간을 잊기 쉽다. 월요일엔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