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보면 사약 그릇처럼 생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미·영 정상회담에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에게 받은 선물이다. 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에서 받은 첫 취임 선물이었다.
이름은 ‘퀘이치(Quaich)’. 퀘이치는 중세 시대부터 사용해 온 영국 전통 술잔이다.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컵’을 의미한다. 요즘 우리 돈으로 3만~10만원이면 살 수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재산이 많다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몇만원짜리 대중적인 선물을 한 것이다.
위스키를 좋아한다면 퀘이치의 전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켈트족이 인신공양을 집전할 때 사람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로 퀘이치를 채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세에 의료 행위를 위해 피를 담는 그릇으로 탄생했다는 설도 있다. 또 해안가나 섬에서 조개껍데기에 위스키를 마시다가 자연스럽게 대체품을 만들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손잡이에 부족이나 가문의 문양을 새기기도 한다.
퀘이치는 ‘사랑’과 ‘우정’, ‘평화’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진부하게 들리지만 중세 영국에서는 다소 낯선 단어들이었다. 친족 살인과 배신, 권모술수, 왕좌 쟁탈전이 살벌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왕좌의 게임’이 계속됐다.
1589년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덴마크 안나 공주에게 결혼 선물로 퀘이치를 전달하면서 이 물건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제임스 6세는 안나가 바다를 무사히 건너올 수 있도록 기도회와 예배를 열었고, 그 배의 안위를 지속적으로 보고받았다. 노래를 지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가 안나에게 건네준 퀘이치가 마침내 사랑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손잡이가 두 개 달린 퀘이치는 몇 세기 동안 하이랜드 지역 족장들끼리도 교환했다. 환대이자 연대감의 표시였다. 매우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술잔을 양손으로 주고받아야 남은 한 손으로 무기를 꺼내 상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퀘이치가 오가는 동안 만큼은 평화가 유지된 셈이다. 같은 이유로, 퀘이치에 술을 담아 손님에게 주려면 주인이 먼저 한 모금 마셔야 했다. 조선 시대 기미 상궁처럼.
스코틀랜드 어부들은 해마다 연어 시즌의 개막을 축하하며 퀘이치에 스카치위스키를 담아 강으로 뿌린다. 그곳의 전통 결혼식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피로연 때 남녀가 퀘이치에 담긴 술을 나눠 마신다. 과거에는 스카치위스키였지만 브랜디, 물, 차를 담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순간을 함께한다는 데 의미가 있으니까.
오늘날 퀘이치는 스코틀랜드에서 다양한 기념행사에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왕이나 왕비, 총리가 존경의 의미로 손님들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메이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건넬 때도 그런 뜻을 담았을 것이다. 퀘이치는 단순한 컵이 아니다. 양국의 유대 관계와 공통의 이익을 계속 추구하자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