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저를 관리직으로 강제 승진시킨 대서 잠이 안 옵니다. 지금 잘하는 일이나 조용히 하고 싶지, 여러 사람 눈치 보며 책임질 일 많아지는 승진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다고요. 발령 거부하면 잘리나요? 퇴직금 제대로 못 받나요?”
한 공인노무사에게 접수된 38세 직장인 A씨의 상담 내용이다. 요즘 노무사나 노동법 전문 변호사들에게 근로자는 물론 회사 측에서도 이런 ‘승진 거부’를 둘러싼 법률 문의가 쏟아진다고 한다.
연말 인사를 앞둔 고과(考課)의 계절, 쌓아온 업적과 경력을 갈무리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경쟁이 불붙는 때다.
옛날엔 모두가 그랬다. 1980년대 드라마 ‘TV손자병법’에선 매번 승진에 실패하는 백발의 만년 과장 이장수(오현경)가 위에서 눌리고 아래서 치받히는 직장인의 애환을 그렸다.
그러나 지금은 부장 또는 임원 같은 ‘별’을 달아준대도 싫다는 직장인이 많다. 일명 ‘의도적 승진 기피(conscious unbossing)’ 트렌드다. 올라가 봤자 별 볼 일 없는 성장 한계의 시대, 불확실성 속 책임지기를 꺼리는 심리가 직장 내 역학을 바꾸고 있다.
“임원, 보상 적고 부담만 커”
언보싱(unbossing)은 보스, 즉 중·상급 관리자로 승진하는 것을 꺼리거나 늦추는 경향을 말한다. 21세기 노동 문화의 화두인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코로나 팬데믹 이후 확산한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최소한의 노력만으로 영혼 없이 직장 생활을 이어가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미 경제 매체 포브스는 “기업 관리직이 공석으로 남는 경우가 늘었다”며 “가장 경험 많고 똑똑한 구성원이 간부가 된다는 생각은 쓸모없어졌다”고 했다.
한 취업 플랫폼 설문에선 2030 직장인 과반이 “임원 승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책임지는 위치가 부담스럽다’가 압도적이었다. ‘승진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서’ ‘워라밸이 불가능할 것 같아서’ ‘회사 생활을 오래 하고 싶지 않아서’ 등이 뒤를 이었다.
실제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어중간하게 높은 자리’는 책임질 일 많고 욕먹기 쉬운 자리로 보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불만, 아래서 치받는 불만이 모두 그의 책상에서 충돌한다.
주어지는 보상은 오너나 기관장 같은 최상위 권력층보다 미미하다. 그래서 중간 관리자는 ‘중간에 낀 자’, 임원은 ‘임시 직원’으로 불린다. ‘만년 과장’이 모욕이던 시절이 무색하게, ‘웰빙 대리’ ‘웰빙 9급’이 각광받는다.
관리직을 ‘높은 자리’가 아닌 ‘생소한 업무’로 여기는 이가 많다. IT 대기업 직원 30대 B씨는 “관리직이란 내가 쌓아온 전문 지식과는 다른 트랙이다. 현업 실무와 멀어지고 커리어가 달라지는 것”이라며 “임원 승진을 지위 상승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동료들도 “책임 떠밀고 빨리 자르려고 임원 시키는 것” “선배들처럼 회사에 뼈 묻을 생각 없다” “밑바닥이 제일 편하다” “퇴근 일찍 해 부업을 하거나 쉬는 게 낫다”고 입을 모은다고. 이런 조직원들에게 ‘충성하면 너도 조직의 사다리를 올라올 수 있다’는 당근이 먹히지 않고 영(令)이 서지 않는 건 당연하다.
중견 기업에서 동기보다 일찍 부장이 된 40대 C씨. “승진했다는 기쁨은 잠깐일 뿐, 워라밸이 기존의 10분의 1도 안 된다. 내 일만 할 때가 그립다”고 한다. 연봉·수당 인상은 미미한데 직원 경조사에 내야 하는 품위 유지비 지출은 커졌다.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은 크고, 익명 커뮤니티에서 뒷담화하는 부하들 심기까지 신경 쓰다 보니 건강도 상했다고 한다.
성공의 정의도, 경로도 변했다
통상 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무원이 되면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바뀐다. ‘목을 내놓고’ 일하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상 주52시간 근무 적용이 안 되고, 급여와 수당·복지가 되레 깎이는 경우도 많다.
요즘 대기업 임원들이 위기 상황이라며 주 6일 출근하지만, ‘효율’ ‘공정’의 이름 아래 과거 같은 혜택은 줄었다. 그러다 조직에 문제가 생기면 1~2년 만에 잘리기도 한다.
사회 전체로 보면 집값 등 자산 가격이 크게 올라 승진을 통한 임금 인상의 매력은 떨어졌다. 투자나 유튜버 등 투잡을 뛰어 돈을 벌 길이 많아졌다.
그런데 국제·경제 정세 등 대내외 변수가 커지며 관리자가 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커졌다. 게다가 코로나 이후 원격 근무가 확산하고, 디지털로 무장한 MZ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조직 내 결속력과 권위, 소통은 무너졌다.
높은 직위와 연봉은 이제 더 이상 성공의 척도가 아니다. 개인의 능력과 안녕을 보존하며 필요한 만큼만 거래하고 빠지겠다는 심리가 커진다.
승진이란 인사권이 조롱받는다는 건 고도 성장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런 경향은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등 안정적인 직장일수록 심하다.
예산이 투입되는 공기업이나 국책 연구소에선 “대놓고 승진을 피하는 현상이 너무 심해 조직이 위태로울 정도”라고 한다. 승진 점수를 쌓아놓고도 “날 임원 명단에 올리지 마라” “딴 사람 알아보라”거나, 갑자기 육아휴직이나 장기 병가를 낸다는 것이다.
한국전력 관계자 D씨는 “진급 안 하면 연고지에 알박기 근무가 가능한데 임원이 되면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 가야 하는 데다 연봉이 역전되기도 한다. 2년마다 임원이 교체되는데, 나간 분들은 뭐 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HD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올해 단체협상에 ‘승진 거부권’을 안건으로 올려 업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간부가 되면 노조에서 탈퇴해야 해 고용 불안에 노출되니, 승진 안 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현대 계열사 직원 E씨는 “과장이 되면 연봉은 1000만원쯤 오르지만, 졸지에 ‘사측’이 돼 휴식·수당 등 많은 권리를 박탈당한다. 대리들이 과장으로 강제 승진 당할까 봐 전전긍긍한다”고 했다.
리더 못 키우는 조직, 활력 떨어질 우려
승진에 준하는 특혜 코스로 여겨졌던 해외 파견도 기피하는 추세다. 삼성그룹 F 임원은 “요즘 미국·유럽 일부국을 제외하면 동남아·남미 등 신흥 시장 법인 주재원으로 가겠다는 이들은 씨가 말랐다”고 했다. 낯선 외국에서 수년간 온 가족이 고생하면서 국내 부동산 투자나 자녀 교육 흐름을 놓치는 것을 돌이킬 수 없는 손실로 본다는 뜻이다.
또 다른 글로벌 기업에선 우수 직원에게 미 보스턴 지사 발령을 내려 하자 “와이프가 알아보니 그곳 아파트와 학군이 별로라고 한다. 고민할 시간을 달라”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선망의 대상이던 장학사나 교장 승진 코스가 백안시되고 있다. 승진 핵심 관문인 교감직이 학폭과 학부모 민원, 늘봄학교 등 어려운 행정 업무를 떠맡기 때문.
젊은 교사들은 “말년에 교장으로 몇 년 편하자고 젊은 날을 갈아넣을 수 없다” “그 시간에 재테크나 하자”면서 교감은 물론 담임·학생부장 같은 보직을 피하고, 승진에 필요한 지방 근무 연수도 채울 생각이 없다고 한다. 강남·분당 지역 교사들에게 두드러진 현상으로, 이런 ‘교포(교장 포기자)’가 많아져 학교 운영이 어렵다고.
경찰 조직에서도 수사 형사부터 ‘경찰의 꽃’이라는 경찰서장까지 핵심 직책을 맡지 않으려 한다. 승진을 코앞에 두고 경찰복을 벗고 로펌으로 이직하기도 한다.
언보싱은 미 빅테크 기업들이 최근 3~4년간 대규모 구조 조정을 하면서 본격화했다. 국내 기업들도 경기 침체를 이유로 임원 규모를 줄여 승진문을 크게 좁혔다.
이 때문에 승진 기피를 개인들의 정당한 반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차피 어려운 승진, 단체로 거부해 권위를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리더가 조롱받고 리더가 사라지는 조직은 활력을 잃고 무사 안일주의에 곪아 들어갈 것이란 우려가 크다.
대책은 뭘까. 일본에선 승진 기피 현상 탓에 중간 관리자를 외부에서 데려오는 ‘상사 대행’이 확산하고 있다. 미 기업들은 아예 중간 관리자를 없애 위계질서를 단순화하는 ‘선제적 언보싱’으로 직원의 부담을 줄여준다.
전문가들은 “임원에게 단순한 명예심보단 확실한 금전적 보상과 책임 분산으로 당근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