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가 군함을 타고 한 달 동안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고려대 부총장을 지낸 박길성(67·푸른나무재단 이사장) 명예교수는 2022년 가을, 임관을 앞두고 순항 훈련을 하는 해군사관학교 생도 164명과 함께 한산도함에 올랐다. 전장 142m, 4500톤의 철갑을 두른 한산도함은 2020년 취역한 해군 첫 훈련함. 그는 호주 시드니부터 미국 하와이 진주만까지 약 1만km를 항해했다.
“무풍(無風)의 적도를 건너며 어수선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 어른거렸다. 요즘 한국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두 극단이 만나 사회의 동력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국민은 여야가 이렇게까지 대립한 적이 있는지 묻는다.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가는 형국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남는다.”(64쪽)
박길성 교수가 펴낸 책 ‘태평양 항해’를 쾌속으로 읽다가 여기서 눈길이 멈췄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에 범선들의 지혜를 떠올리는 대목. 당시 선원들은 적도 부근의 무풍지대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범선을 움직일 바람이라는 동력이 소멸하기 때문이었다. 박 교수는 “사회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면 매서운 비판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고 했다. 지난 11일 이순신 동상이 있는 서울 광화문에서 이 사회학자를 만났다.
◇한산도함 오디세이
해사 77기 생도들은 110일간 인도양, 태평양을 횡단하며 9국 10도시를 순방했다. 박 교수는 그중 호주~뉴질랜드~피지~하와이 구간에 편승했다. 적도 무풍지대를 건넜고 하루를 오롯이 새로 맞이하는 날짜변경선을 넘었다.
-사회학자가 어떻게 한산도함을 타게 됐나요.
“고향이 강릉이라 동해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바다 저편에는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내재해 있었어요. 2022년 8월 정년 퇴임한 뒤 다른 사회 경험은 한산도함 탑승이 처음이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뭘 놓치고 있는가를 늘 고민해 왔는데, 함대 공동체를 체험하고 싶다는 제 희망을 해군이 들어준 거예요.”
-승선하기 전 가장 큰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경외의 시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함대 공동체의 풍경, 그리고 ‘한반도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
-항해를 앞두고 설렜겠습니다.
“동시에 걱정도 많았지요. 제복을 입지 않은 유일한 민간인이었으니까요. 승조원들과는 시쳇말로 공통점이 1도 없었습니다. 나이 차이도 큰데 그 좁은 공간에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선실에만 머물 수도 없고 일과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항해를 견딜 체력은 될까? 그런데 한 달 뒤 하선할 땐 굉장한 포만감을 느꼈습니다.”
-포만감요?
“사회학자가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관찰한 새로운 경험이라서요. 이 책을 해군 중령에게 선물하니 ‘애들한테 읽히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직업이 뭔지, 바다가 뭔지, 어떤 자부심이 있는지 가족에게 한번도 들려준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집에서 이해를 받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며(웃음).”
-이방인의 시선으로 꾹꾹 눌러쓴 항해 이야기더군요.
“바다의 용사들과 태평양을 항해한 ‘한산도함 오디세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요. 윌리엄 포크너의 표현처럼 ‘육지에서 멀어질 용기가 없다면 새로운 수평선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돌아보면 어떤 경험이었습니까.
“외형적으로는 모험이었고 내면적으로는 성찰이었어요. 협소한 공간에서 배려와 겸손을 보았고 망망대해와 군함,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항해일지를 쓰느라 글씨는 삐뚤빼뚤했지만 그때가 그립네요.”
-한산도함 곳곳에 적혀 있다는 충무공 어록 중 묵직하게 다가온 것이라면.
“이순신 장군이 1592년 옥포해전에서 최초로 승전하고 남긴 말이에요.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무풍지대에 갇힌 한국 사회
조직을 이끄는 리더를 선장에 비유하듯이, 새로운 정부를 ‘대한민국호’라 부르듯이, 바다는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박 교수는 “인생이라 부르는 것을 다시 보게 됐다”고 했다.
-좀 더 설명해주신다면.
“흔히 ‘인생은 등산인가, 항해인가’ 묻곤 하잖아요. 산이 울림의 철학이라면, 제가 겪어 보니 바다는 흐름의 철학이더라고요. 바다에는 중심이 없어요. 어디나 중심이죠. 누구나 살면서 높낮이는 다르겠지만 멀리서 보면 평평하게 흘러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행복이란 높은 데도 있겠지만 바다처럼 넓은 곳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해하며 겪어 본 파도는 어땠나요?
“태평양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거친 파도를 경험하고 나면 순한 파도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돼요. 함정은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과 앞뒤로 흔들리는 피칭을 절묘하게 받아들이며 쉼 없이 나아갑니다. 파도가 4~5m 높이로 치면 뻥! 소리가 나고 제 몸이 침대에서 굴러요. 반대편에서 또 뻥! 치면 제자리로 돌아오고요. 앞뒤로 출렁일 땐 다리가 들렸다 내려오죠. 신기한 게 그래도 잠은 잘 잡니다(웃음).”
-하루도 빠짐없이 선상 일지를 썼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항해를 마치곤 ‘난중일기’부터 펼쳤지요. 다시 읽으니 진면목이 보였습니다. 무용담이나 웅장한 이야기는 없고, 솔직한 일상 기록이었어요. 날씨가 어땠다, 누가 다녀갔다, 누구와 이야기했다, 누구의 목을 쳤다…. 지명이 200개, 인명이 1000개나 등장할 만큼 이순신은 디테일에도 강했어요. 바탕에는 애민(愛民)이 깔려 있고요.”
-이 책의 절정은 적도를 건너는 대목이더군요.
“무풍지대를 헤쳐나간 범선의 지혜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해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교양 시민들이 정치나 사회에 무관심해지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잖아요. 참 안타까워요. 갈등이나 흔들림을 겪더라도 그것이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요. 무풍지대에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있습니다.”
-그 구간을 범선들은 어떻게 벗어났나요?
“무풍지대에 운 좋게 미풍이 불면 나갔어요. 역풍이라도 돛을 돌리며 지그재그로 빠져 나갔고요. 비과학적이지만 적도제(기풍제)도 지냈답니다. 그렇다고 바람이 불겠어요? 다만 그 의식을 치르면서 믿음과 희망을 주고 선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굴러가는 이치는 다르지 않은데.
“극복하려면 다섯 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이라는 한배를 탔다는 최소한의 신뢰가 필요하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는지 좌표를 알아야 하고, 큰 조류 즉 시대정신을 읽어야 하고,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경제 자원이 튼튼해야 하고, 무엇보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겸허한 설득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어렵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간을 반드시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모두 힘들지만 마음을 모아주세요. 제가 책임을 무겁게 지고 솔선수범하겠습니다’ 말해야죠.”
◇한배를 탄 운명이라면
파도를 이기거나 거스를 재간은 없다. 한산도함도 순응하며 완급을 조절한다. 정해진 스케줄은 7시 아침, 11시반 점심, 5시 저녁, 8시 야식 등 하루 4번의 식사뿐이었다. 그는 “에너지 쓸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자주 먹나 싶었지만 이틀 만에 이유를 알았다”며 “계속 흔들리는 함정에서 균형과 중심을 잡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고 했다.
-기억나는 식사 메뉴가 있다면.
“함대 스테이크가 유명해요. 장성부터 병사까지 음식은 똑같고요. 육지에서는 보통 센 불로 굽는데 함정에선 전기로 합니다. 함대 스테이크는 처음엔 ‘이게 뭐지?’ 했다가 끝으로 갈수록 맛이 좋아져요. 야식으로 나온 소바도 광화문 유명 소바집보다 낫고요.”
-나머지 일과는 어떻게 보냈나요.
“가장 널찍하고 가성비 좋은 인기 공간은 격납고였습니다. 체육관 역할도 하는데, 흔들리고 요동치는 함정에서 탁구를 친다고 상상해보세요(웃음). 월드컵 축구도 격납고에서 봤습니다. 함정 후갑판에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거나 책을 읽기도 했지요.”
-후갑판으로도 파도 보라가 들이치나요?
“책 읽는 동안 안경에 파도 보라가 달라붙어요. 입술 주위를 혀끝으로 돌려보면 짭조름한 청정 소금의 맛이, 하하.”
-함정에서 ‘사람 사치’를 누렸다고 썼는데.
“함정은 비좁지만 동시에 아주 넉넉한 공간이었습니다. 장교들이 쾌활하고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어요. 고담준론이 가능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한 달을 보냈으니 사람 사치죠.”
-해군답게 원팀(One Team)이군요.
“그곳에선 ‘한배를 탔다’는 말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삶이에요. 일상에서 체득한 것은 이념으로 체득한 것보다 훨씬 오래 가고 강건합니다. 함정은 국가 운영의 축소판과 같아요. 경청하는 문화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함정에선 허위가 용납되지 않아요. 기관, 사격, 조타 등 각 전문 분야에 따라 병사라도 지휘관에게 직언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침몰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해군사관학교 교훈 중 하나가 ’허위를 버리자‘다)
-기항지에서 기억에 남은 장면이라면.
“호주 시드니에 6·25전쟁 참전 기념비가 있어요. 경기도 가평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헌화대를 두 개 만들어 놓았는데, 통일이 되면 두 돌을 붙이겠다고 합니다. 낯선 나라에서 싸우다 희생된 자국 청년들을 단순히 기리는 수준이 아니라 한국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지요. 하와이에서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 침몰한 애리조나호를 인양하지 않았어요. 물에 잠긴 선체 위에 추모 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침몰한 전함의 기름 탱크에서 약 1분마다 기름 방울이 떠오르죠. 역사와의 대화를 이렇게 촘촘하게 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몸이 반응한 낯선 경험도 있습니까.
“땅멀미요(웃음). 흔들림에 익숙해진 뒤 육지에 내리면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익숙함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시각과 평가가 달라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땅멀미로 배웠어요.”
-그렇게 임관한 해군 장교들을 포함해 바다의 용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들은 돌아오는 것이 목표인 바다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겪어 보니 배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방향타와 앵커(닻)예요. 지금 어디에 있든 방향을 잃지 말고 중심을 잘 잡으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대한민국호’ 앞에 놓인 뱃길은 순탄치 않다. 민생은 어렵고 나라 밖도 격변 중인데 정치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함대 공동체 문화에서 배울 점이 있어요. 한 발짝도 못 나가는 현실이라면 만나서 직언하고 경청하며 출구를 찾아야죠. 정치는 국민이 질식하지 않도록, 숨 좀 쉴 수 있게 해주는 게 최소한의 책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