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라면 하나 끓이는 일을 요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제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늘 애매한 것으로 남습니다. 라면이 요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맛이 아니라 끓이는 사람의 의도와 신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끓이는 라면은 요리라 부르기에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라면은 무조건 라면 봉지에 적힌 설명대로 끓여야 맛있다’는 정도의 고집만 갖고 있어도 라면은 하나의 요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나 마늘 혹은 대파 같은 익숙한 식재료부터 해산물이나 트러플 오일 등 다양한 재료를 곁들이는 이의 라면은 몇 걸음 더 나아간 요리가 되는 것이고요.

지인들에게 자신만의 라면 조리법이 있냐고 기대하며 물을 때가 있습니다. 인스턴트 라면 하나 끓이는 일에도 대부분 저마다의 생각과 분명한 방식과 순서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말해주는 라면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아, 우리가 이렇게나 다른 결을 가진 존재구나’ 하고 느낍니다. 자연히 상대와 함께하고 있는 현재라는 시간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내리는 비는 같아도 떨어지는 빗소리는 저마다 다른 법입니다. 빗방울이 넓은 호박잎 위에 떨어질 때, 자동차 보닛 위로 떨어질 때, 물안개 피어오른 호수 위로 떨어질 때, 모두 다른 소리를 냅니다. 모두 다르지만 모두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다르기에 모두 아름답다 말할 수도 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만 날씨가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작은 손으로 바람개비를 만들어 막 유치원 앞마당으로 나온 아이들에게는 바람 잦은 날이 좋은 날씨고 야외에서 사진 촬영을 할 때에는 조금 흐릿한 날씨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묵은지를 꺼내 바삭하게 전을 부칠 때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가 제격입니다. ‘좋다’는 개념은 이렇듯 추상적인 것이어서 세상 수많은 것을 한 번에 품어낼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 역시 그러합니다. 물론 인간은 오랫동안 아름다움을 비례와 조화로 생각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수학과 음악은 물론 미학까지 모두 법칙으로 연결했으니까요. 당대의 조각과 건축이 대부분 좌우 대칭으로 고안된 것도 이 까닭입니다. 훗날 철학자 니체는 이를 아폴론적인 미라고 칭했습니다. 질서와 척도로 규명할 수 있는 평온함에서 오는 아름다움. 하지만 니체는 규정된 형식과 틀을 부술 때에도 디오니소스적인 아름다움이 탄생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성이 밝혀내는 빛의 미학이 아닌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어둠의 미학인 것입니다.

내 삶의 형식을 탄탄하게 쌓아 올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문득 나의 형식을 와르르 허물어내는 순간도 필요합니다. 연둣빛 새잎을 다시 밀어 올리기 위해 이제껏 꼭 쥐고 있던 붉고 노란 잎들을 모두 놓아버리는 저 가을 나무처럼.

주말 늦은 오후, 오랜만에 라면이나 하나 먹을까 생각하는 참입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물을 넉넉하게 잡고 지난 추석 선물로 받은 마른 멸치를 한 움큼 넣어볼 것입니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또 새로운 요리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