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게임 ‘드래곤볼 프로젝트: 멀티’ 속 손오공. 힘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사이어인(人)으로 각성한 모습이다. /반다이 남코

“일곱 개의 드래곤볼을 모아 주문을 외우면 말야… 신룡(神龍), 즉 용의 신이 나타나 어떤 소원이라도 반드시 들어준다는 거야.”

맥박이 요동치는 이 약속, 아직 가슴에 품은 ‘어른이’들로 지난 주말 서울 잠실은 북새통을 이뤘다. 국내 첫 ‘드래곤볼’ 팝업 스토어가 롯데월드몰 1층에 차려졌다. 탄생 40주년이기 때문이다. 굿즈 대부분이 순식간에 품절됐다. 꼬마 협객 손오공이 동료들과 드래곤볼을 찾아 떠나는 성장 만화의 정석. 일찌감치 판매 부수 3억부를 돌파하고, 게임·영화 등으로 변주되며 전 세계 매출 약 30조원을 올린 불후의 명작. 이날 실물 재현된 ‘드래곤볼’ 무술 경기장 앞에서 “에네르기 파(波)”를 외치며 남녀노소 두 손바닥을 앞으로 힘껏 내민 이유다.

국내 최대 팬카페 ‘포에버 드래곤볼’ 운영진 서병훈(42)씨도 이 자리에 있었다. “아버지께 처음 선물받은 만화책이었어요. 내성적인 아이였거든요. 친구들이랑 다 같이 모여 책장을 넘기면서 어울릴 수 있었어요. 어릴 적 사랑했던 것들은 사라지거나 잊히기 마련인데 지금도 남아 있어줘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마침 청룡의 해, 불혹의 나이에도 ‘드래곤볼’은 단단하다. 올해 나온 컬래버레이션 상품만 봐도 알 수 있다. ‘드래곤볼 아이스크림’(배스킨라빈스) ‘드래곤볼 키보드’(로지텍) ‘드래곤볼 스낵’(롯데마트), ‘드래곤볼 빵’(SPC삼립)…. 내놓기 무섭게 팬들이 몰린다. 전설은 끝나지 않았다.

◇걸작의 탄생, 성룡의 ‘취권’ 덕분?

이달 개장한 국내 첫 ‘드래곤볼’ 팝업 스토어에서 한 여성이 인증샷을 찍고 있다. 만화의 초반 인기를 견인했던 '천하제일 무술대회' 경기장 등이 재현됐다. /롯데백화점

‘원기옥’이라는 단어를 들어 보셨는지.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 알음알음 힘을 얻어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형성하는 필살기. ‘기(氣)를 모은다’(화장실에서도 가끔 필요하다)거나 ‘정신과 시간의 방’(시험 기간마다 간절해지던 공간)이라는 표현도 귀에 익을 것이다. 출처가 모두 ‘드래곤볼’이다. 분노하면 몸에서 신비한 불길이 치솟고, 공중을 날아다니고, 순간이동에, 도시 하나쯤 거뜬히 날려버리는 장풍까지…. 허무맹랑하지만 이후 모든 격투 만화의 초석이 된 재미 요소다.

그런데 왜 손오공인가? 중국 고전 ‘서유기’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복식까지 모두 중국풍이다. 평소 이소룡의 ‘용쟁호투’ 등 홍콩 영화를 즐기던 만화가 도리야마 아키라(鳥山明). “성룡 영화를 특히 좋아해서 일하는 중에도 몇 번이고 계속 비디오를 보곤 했습니다. 무심코 담당 편집자에게 말했더니 ‘그럼 쿵후 만화를 그려보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그린 것이 ‘기룡소년’이라는 만화였습니다.” 괜찮은 반응을 얻자 장편으로 발전시켜 세상에 내놨다. 1984년 11월 20일이었다.

'드래곤볼'의 초석이 된 단편 만화 '기룡소년'. 초능력을 사용하는 주인공의 모험을 다룬다.

초반에는 영 반응이 신통찮았다. 조기 완결 위기까지 몰렸다. 담당 편집자가 승부수를 띄웠다. 강력한 악당을 만들어 대결 구도를 형성하자는 제안. 그렇게 ‘천하제일 무술대회’가 열렸다. 강화된 액션에 독자는 열광했다. 작가 특유의 시원시원한 전개 방식이 인기에 기름을 부었다. “성룡 영화의 전투 리듬 같은 것도 참고가 된 것 같아요.” 1986년 TV 애니메이션 방영이 시작됐다. 11년 장기 연재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애니메이션·게임 등으로 꾸준히 변주됐고, 2009년에는 홍콩 배우 주윤발, 한국 가수 박준형 등이 출연한 실사(實寫) 영화까지 개봉했다. 훗날 각본가가 “원작을 실추시켰다”고 사과하기는 했지만.

◇한국 만화계가 뒤집혔다

만화 원작의 엄청난 인기는 실사 영화 제작으로 이어졌다. 2009년 국내 개봉했던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 속 배우 주윤발(무천도사 역). /20세기스튜디오코리아

‘드래곤볼’은 한국에 정식 출판된 최초의 일본 만화다. 만화 잡지 ‘아이큐 점프’ 별책 부록 1989년 12월 14일 자에 처음 실렸다. 첫 장에 실린 출판사의 소개 글. “이제부터 여러분은 세계 수준의 독자입니다! ‘드래곤볼’은 미국·프랑스·이태리·서독·일본 등지에서 만화화·만화영화화되어 어린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세계 명작 만화입니다.” 과연 세계 명작 만화, 이미 정식 수입 이전부터 ‘드래곤볼’은 전국을 뒤집어 놓은 상태였다. ‘드라곤의 비밀’ 등의 제목으로 해적판이 나돌았고, 몇 달 만에 몇 십억 원을 벌었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아이큐 점프’ 당시 편집장 황경태(고은문화사 대표·67)씨는 말했다. “일본이요, 우리나라를 ‘해적판의 나라’로 보고 신뢰를 안 하더라고요. 근데 시장 정상화가 돼야 앞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거죠.”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매국노 소리도 들었고요. 작가들 반발이 심했어요. 국산 만화 다 죽는다고요. 그래도 센 작품이랑 맞붙어 경쟁해야 우리도 강해질 것 아니겠습니까?” 대항마로 한국 전통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 1995년 배우 윤석화는 직접 영화사를 차려 ‘돌아온 영웅 홍길동’을 제작했다. “’드래곤볼’이나 ‘디즈니’ 만화처럼 우리 어린이들에게 꿈을 키워주는 주인공상을 심어주겠다”는 포부. 놀랍게도 ‘드래곤볼’ 연출진이 합류한 한·일 합작이었다.

◇왜 ‘드래곤볼’에 환호하는가

'드래곤볼'은 오리지널 버전 완결(1995년) 이후에도 후속작을 통해 꾸준히 세계관을 확장하며 독자층과 팬덤을 늘려왔다. /11번가

보통의 소년 만화는 주인공 외모가 변하지 않는다. 독자의 반발 가능성, 실패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래곤볼’은 등장인물의 변신(소년→어른)이 완벽한 성공을 거둔 흔치 않은 사례다. 그림, 그러니까 캐릭터의 매력이 더 강화됐다는 얘기다. 손오공의 적수로 등장하는 베지터·프리저·셀·마인부우 등 악당마저 팬덤을 형성했다. 이 중 원작자가 꼽은 ‘최애 캐릭터’는 거대한 메뚜기처럼 생긴, 선악이 공존하는 피콜로 대마왕. 다만 “사실 그림에는 별로 기합을 넣지 않았다”고 도리야마는 밝힌 바 있다. “움직임 표현에 중심을 뒀기에 그림 자체에는 의식적으로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속도감을 살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냉정하게 말하면 이 만화는 결국 허구한 날 치고받는 싸움 얘기다. 그러나 책 ‘드래곤볼 깊이 읽기’를 쓴 미사키 데쓰(59)는 여기서 철학자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를 읽어낸다. 손오공과 친구들은 매일 겨룬다.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그게 전부다. “지구를 지킨다든가 정의를 위해서 같은 ‘큰 이야기’가 아니고, 가족이나 친구를 지킨다는 ‘작은 이야기’도 아니며 타인의 동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오직 자신이라는 ‘가장 작은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드래곤볼이 시대에 뒤처진 낡은 것이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을지 모릅니다.” 니체가 강조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는 선언은 만화적 설정에서도 발견된다. 빈사 상태에서 회복하면 훨씬 강한 존재로 거듭나는 등장인물, 이 극적 쾌감이 부모님 지갑과 서점과 문방구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오타니의 ‘드래곤볼’ 활용법

'드래곤볼' 마니아로 유명한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 파란 티셔츠에 팀 연고지 '로스앤젤레스'와 '드래곤볼Z'를 합친 글자, 만화 속 장면을 패러디한 그림이 담겨 있다. /X(옛 트위터)

지난 5월 기시다 후미오 전(前) 일본 총리가 프랑스 방문 당시 가져간 선물이 바로 ‘드래곤볼’ 인형이었다. 세계적 만화, 친선 외교에도 애용된다. 미국 프로야구를 제패한 오타니 쇼헤이 역시 마찬가지. 지난 3월 닛칸스포츠는 “오타니는 LA 에인절스 시절 헨드릭스·에스테베즈 등과 ‘드래곤볼’을 주제로 우호 관계를 다졌다”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로 선수들과의 교류 계기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올해 LA 다저스 이적 이후에는 오타니의 제안으로 일부 선수가 안타 및 진루 시 ‘드래곤볼’에 나오는 시그니처 포즈(’퓨전’)를 취하기도 했다. 트래비스 스미스 코치는 이 포즈를 ‘DBZ’로 명명했다.

특히 흑인들 사이에서 의외의 인기를 누린다. 재미도 재미지만, 이방인 손오공이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지구 최강자로 발전해나가는 스토리를 흑인의 역사로 대입해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명 힙합 그룹 우탱클랜 리더 르자(RZA)는 2009년 낸 저서 ‘The Tao of Wu’에서 이렇게 밝혔다. “’드래곤볼’은 가장 심오한 만화 중 하나입니다… 제게는 미국 흑인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손오공은 먼 행성에서 온 사이어인의 일원으로 은하계에서 가장 사나운 전사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압박 속에서 ‘초사이어인’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힙합의 영역에서 ‘드래곤볼’ 관련 랩 가사가 꾸준히 나오는 이유다.

◇漫神의 죽음… 전 세계 애도 물결

지난 4월 5일 서울 혜화역 인근 공연장에서 열린 도리야마 아키라 추모 행사. /독자 제공

‘닥터 슬럼프’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드래곤볼’ 덕에 만화의 신으로 추앙됐던 도리야마 아키라. 연재 펑크가 단 한 번도 없던 성실의 아이콘. 지난 3월 1일 급성 경막하 혈종으로 별세했다. 향년 69세. 미국·프랑스·브라질 등 각 대륙에서 추모 물결이 일었다. 중국 외교부 마오닝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선생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앞으로 식견 있는 더 많은 인물이 양국 문화 교류와 우호 사업에 적극 뛰어들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축구팀 AC밀란은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 추도사를 남겼다. “손오공의 에너지로 인생에 태클을 날리겠습니다! 매 순간 사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난 4월 5일 서울 혜화역 인근 공연장에서 소규모 추모 행사가 열렸다. 작가 영정 앞에 촛불을 켜고, 만화영화를 상영하고, 직접 그린 팬아트를 공유하며 애도하는 자리. 이날 참석한 여성 팬 윤혜림(28)씨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착잡해하다가 다른 애독자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어 다녀왔다”며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고 그저 다른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을 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원작자는 가도, 재미는 계속된다

지난 3월 사우디아라비아 키디야 투자 회사가 2035년 완공 목표로 건립 계획을 밝힌 ‘드래곤볼 테마파크’ 예상도. /QIC

실망할 필요 없다. 생전의 도리야마가 스토리·캐릭터 디자인에 참여한 마지막 유작 ‘드래곤볼 다이마’가 지난달 국내 TV 방영을 시작했다. ‘드래곤볼’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어린아이로 변해버린 황당한 상황을 그려내는 후속작. 그간 다소 난삽하게 확장돼 왔던 ‘드래곤볼’ 세계관을 다시 초심(初心)에서 정리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최근에는 다중 격투 게임 ‘드래곤볼 프로젝트: 멀티’가 공개됐고, 지난달 출시된 게임 ‘드래곤볼 스파킹 제로’는 발매 하루 만에 300만장이 팔려나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최초의 ‘드래곤볼 테마파크’ 건설 계획을 올해 초 공식화했다. 서울 롯데월드의 3~4배 크기로 수도 리야드에 건설될 이 테마파크에는 70m짜리 신룡 롤러코스터를 비롯한 30여 개 놀이기구와 만화 속 공간이 설치될 예정이다. 한번 제대로 놀아보자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