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여기가 결혼식장이야, 장례식장이야?”
60대 주부 박모씨는 요즘 지인들 자녀 결혼식에 갈 때마다 놀란다. 신랑·신부의 친구들이 죄다 검은 옷을 입고 오기 때문. 검정 바지에 점퍼 차림으로 부케를 받기도 한다.
그는 “예전엔 ‘장례엔 돈이 부조, 결혼엔 옷이 부조’라는 말처럼 잔칫집엔 화사하게 꾸미고 가는 게 예의였다. 그런데 예의의 기준이 바뀐 것 같더라”고 했다.
결혼식 드레스 코드가 확 달라졌다. 닥치고 블랙이다. 밝은 옷 입었다간 평생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짧은 드레스나 레이스·스팽글 장식 등 화려한 디자인도 위험하다. 딱 ‘블랙 캐주얼’이 정답이란다.
이유는 신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결혼식이라는 일생일대 이벤트에서 신부가 가장 예뻐야 하고 공주처럼 시선을 빨아들여야 한다는 것. 흰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를 어둡게 깔아주는 ‘바둑알 콘셉트’로 단체 사진이 나와야 한다.
이달 초 서울의 한 결혼식에 블랙핑크 제니와 배우 송혜교·변우석·김고은 등 톱스타들이 참석했다. 하나같이 평범한 검은 옷이었다. 해외 팬들은 “누가 죽은 거냐” “한국 결혼식은 미쳤다. 다들 직장에 출근하는 것 같다”며 놀랐다.
외국에선 하객도 멋지게 입는다. 간혹 신부와 같은 흰 드레스를 입은 시어머니나 친구가 도마에 오르지만, 그렇다고 검은 옷으로 ‘드레스 다운’ 하자고 결의하지는 않는다.
미국인 영어 강사 제니퍼씨는 “한국 동료 결혼식에 짧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었더니 ‘네가 뭔데 차려입었느냐’는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 한 한국 여성은 도쿄에서 열린 일본인 친구 결혼식에 검은 옷을 입고 갔다가 화려한 하객들을 보고 ‘아차’ 싶었다고.
불과 4~5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남의 결혼식에 정성껏 차려입었다. 단체 촬영 때도 화려한 차림 하객은 앞줄에 세워 분위기 돋우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최근 결혼 비용이 치솟고 연애부터 프러포즈, 결혼과 출산에 이르는 과정이 희귀한 경험이 됐다. 그 정점의 이벤트인 결혼식 분위기도 달라졌다. 당사자가 주인공이 되는 극강의 효용을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해졌다. 너도나도 호텔 결혼식을 하면서 어두운 실내에서 드라마틱한 조명을 신랑·신부에게 쏘는 사진이 유행했다.
사진사들은 밝은 옷 입은 하객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밝은 옷=민폐’ 공식을 많은 이의 뇌리에 심었다. 한 웨딩 스냅 업체는 “신부들이 ‘밝은 옷 하객은 촬영에서 빼달라’ ‘재킷 속 흰 셔츠도 신경 쓰이니 포토샵으로 어둡게 처리해 달라’고 미리 요청한다”고 했다.
요즘 ‘민폐 하객’ 1순위는 축의금 적게 내는 이나 예식 안 보고 밥만 먹고 가는 이가 아니라 신부보다 예쁜 하객이다. 예쁘다는 건 주관적이지만, 옷 색깔만으로 그 불순한 의도를 가려낼 수 있다니 마녀 재판이 손쉬워졌다.
블랙 하객 룩을 둘러싼 ‘프로 불편러(매사 예민한 사람)’들의 상호 검열과 갈등은 상상 이상이다. 결혼 준비 카페와 소셜미디어에선 밝은 색이나 리본 달린 옷을 입고 신부 옆에 선 하객을 콕 집어 “미친 거 아닌가요?” “자기 결혼식인 줄 아나 봐요”라며 비난한다.
수년 전 보라색이나 노란색 옷을 입고 결혼식에 간 유명인이 ‘레전드 민폐 하객’으로 다시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이 원피스 민폐일까요?” “베이지 재킷 입고 간 게 마음에 걸리는데 늦게라도 신부에게 사과할까요?” 같은 고해성사도 쏟아진다.
여성 친척의 국룰 하객 룩이었던 한복도 화려하다는 이유로 거의 퇴출되고 양가 어머니만 입는 추세다. 손윗동서 될 사람이 흰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었다고 신부가 “내 결혼식 망치려 했다”며 격분, 집안싸움으로 번진 경우도 있다.
30대 여성 이모씨는 “친구들에게 ‘내 결혼식에는 제발 예쁘게 입고 와달라’고 사정했지만 결국 검정 일색이더라”며 “남들에게 찍힐까 봐 조심하는 것 같다”고 했다.
옳든 그르든 남들처럼 하지 않으면 인격 살인 당하는 사회, 이렇게나 칙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