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몇 년 전 나는 시칠리아에 있었다. 장화를 닮은 이탈리아반도 발 끝부분에 있는 제주도 14배 크기 섬이다. 괴테가 ‘모든 섬의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내겐 ‘서양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의 정치 실험 현장이 시칠리아였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시칠리아 항구도시 시라쿠사 골목 곳곳을 걸으며 플라톤의 꿈과 좌절을 떠올렸다.

순수 학문 철학이 권력과 욕망의 아수라 현실 정치를 감당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플라톤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철학의 힘을 믿었다. 동양철학의 비조인 공자도 대륙 유랑으로 ‘상갓집 개’라는 조롱을 받았음에도 이상 국가의 꿈을 잃지 않았다.

플라톤은 책상물림 선비이기는커녕 무너져가는 나라를 살리려는 충정으로 무장한 정치철학자였다. 공자와 노자를 비롯한 동아시아 철학자들의 화두가 세상을 바꾸려는 정치사상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플라톤은 세 차례 시라쿠사를 장기 방문해 현실 정치에 뛰어든다. 아테네가 몰락하고 시라쿠사가 지중해 세계 신흥 강대국으로 떠올랐을 때다. 시라쿠사 참주(僭主·폭군) 디오니시우스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당시 플라톤은 마흔 살이었다(BC 387년). 소크라테스가 당쟁에 휘말려 사형당한 후에도 정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플라톤에게 ‘별의 순간’이 온 것이다. 참주도 플라톤에게 관심이 컸기에 전망은 밝아 보였다.

그러나 파국은 순식간이었다. 플라톤이 정의로운 정치를 설파하며 쓴소리를 계속하자 왕은 격노한다. 플라톤을 노예시장에 넘기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철학자와 독재자의 충돌이 빚은 참사였다. 플라톤은 겨우 목숨을 건져 아테네로 돌아온다.

20년이 지나 60대 노인이 된 후에도 플라톤은 현실 정치의 문을 다시 두드린다(BC 367년과 361년). 새로 즉위한 디오니시우스 2세를 ‘철학자 왕’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불행하게도 결과는 총체적 파국이었다. 내란에 휘말린 시라쿠사는 결국 무너지고 만다.

예순여섯 플라톤은 왜 참혹한 실패가 기다리는 정치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을까? 아테네 학당에 머물렀다면 최고 철학자로서 명예로운 노후가 보장됐을 것이다. ‘출세’를 원했다면 폭군의 역린을 건드려 고난을 자초하진 않았을 터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흙탕물 현실에 온몸을 던졌다.

‘정치는 직업 정치인만의 것’이라는 통념은 타파해야 할 거대한 편견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정치는 각자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민주정치에선 더욱 그렇다. 가정과 학교, 직장과 지역사회 같은 생활 정치 현장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출발점이다.

공적인 일에 적극 참여해야만 정치적 주체가 돼 ‘철학하는’ 존재로 상승해 갈 수 있다. 철학은 결코 골방의 사유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치와 철학은 사람 사는 세상을 창조하는 근원적 실천이다. 본능에 갇힌 동물은 철학도 정치도 알지 못한다.

타락한 정치가 세상을 파괴하는 현장에서 노년의 플라톤은 자신의 정치 참여를 ‘기도하는 일과 흡사하다’고 탄식한다. 가슴을 울리는 비탄이 아닐 수 없다. 천하 대란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나라를 보고 누군들 기도하는 심정이 되지 않겠는가.

시라쿠사 옛 도심 오르티자섬은 평화로웠다. 폭군의 흔적은 사라지고 철학자의 기도는 2000여 년 풍상을 뚫고 살아남았다. 인간은 정치라는 공기를 호흡하며 삶과 국가를 빚어내는 ‘정치적 동물’이다. 더럽다는 이유로 현실 정치를 멀리하면 최악의 협잡꾼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바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그대로다. 백척간두 조국(祖國·patria)의 운명 앞에선 각자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바른 정치 없이는 인간다운 삶도 없다.